소설리스트

〈 66화 〉66. 그때 그곳에서 깊게 (66/70)



〈 66화 〉66. 그때 그곳에서 깊게

캐빈이 다시 자리에 앉자 태식이 태블릿 PC 화면을 이리저리 넘겨 캐빈에게 보여주었다.

“이 위쪽에 있는 약이 왕무택 회장님이 드셨어야 하는 약입니다. 그리고 이 아래쪽이 실제로 드신 약입니다. 시중에서 처방전 없이도 구할 수 있는 비타민 제품인데, 비타민K였나요? 왕무택 회장님 상태엔 치명적인 성분이라고 하더군요.”

캐빈이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아버지 심장수술하시고 비타민K 드시면 안 된다고 식사하실  시금치도 가리셨어.”

태식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화면 왼쪽으로 넘겨보시면 왕창식이 제약회사와 주고받은 이메일이 있습니다. 고용량 비타민K를 왕무택 회장님이 드셨어야 하는 약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달라고 특별 주문했더군요. 왕무택 회장님이 쓰러지신 건 왕창식 부회장이 약을 바꿔치기 했기 때문인  같습니다.”

쉼 없이 이어진 충격적인 이야기들에 캐빈이 넋을 놓고 멍하게 앉아있었다. 태식이 채근하듯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필요하시면 방금 보신 자료 그대로 드리겠습니다. 저희 회사 오너이시지만 연쇄살인에 패륜까지는  봐드리겠습니다.”

캐빈이 영혼이 빠져나간 목소리로 되물었다.

“담배 있어?”
“피우십니까?”

캐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끊었어! 끊었는데, 하나만 줘봐.”
“저는 안 피워서요. 필요하시면 하나 사다 드릴까요?”
“아냐. 됐어.”

캐빈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서랍 구석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들고 나왔다.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였다 천장을 보며 내뱉었다. 뿌연 연기가 캐빈의 시야를 가렸다가 흩어졌다.

오랜만에 피운 담배에 격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창식을 잡을 방법을 찾았지만 알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들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창식의 소유욕이 지나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과 몸을 섞은 여자들을 괴롭히는 것을 넘어 죽이는 취미까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창식의 타깃이 되어 있는 여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유빈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참을 수 없이 암담했다.

창식이 아버지 왕무택 회장을 살해하려 시도했다는 것도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었다. 어렸을 때 은근히 서자(庶子)로 대우받았던 기억에 대한 서러움 적자(嫡子)가 아니라는 이유로 프로텍 후계구도에서 철저히 배제 당했던 억울함이 떠올랐다.

담배 맛이 지나치게 역하고 씁쓸했다.

* * *

유빈은 동영상 속 연기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나서야 링크에서 나올 수 있었다. 수없이 반복되었던 전기자극과 진동에 마음은 녹초가 되었고, 완연한 여름이었던 바깥과는 다르게 영하의 기온을 유지하고 있는 링크 안에서 알몸으로 얼음과 사투를 벌여야 했던 몸은 이곳저곳이 동상에 걸린 것처럼 저려왔다.

가지 다행이었던 점은 완벽하게 연기를 마치고 나자 창식은 유빈에게 식사를 허락해 주었다. 며칠 만에 먹는 한 끼에 식곤증이 몰려왔고 그 위에 쌓인 피로까지 더해져 유빈은 던젼 안 철창 모퉁이에 몸을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물론 딜도 팬티와 꼬리는 그대로 착용한 상태였다.

창식이 잠들어 있는 유빈을 바라보았다. 유빈과 함께하는 나날들이 행복했다. 십 년도 넘게 혼자 끌어안고 괴로워하던 욕망이 하나씩 하나씩 해소되고 있었다.

하지만창식에게는 욕망 총량의 법칙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해소된 욕망의 자리에 다른 욕망이 차올랐다.

유빈을 스토킹하기 시작했을 때 유빈이 자신의 명령을 거절했던 것이 떠올랐다. 꼬리를 달고 홍대 주차장 골목으로 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라고 했지만 유빈은 끝까지 그 명령을 거부했다. 더 강하게 밀어붙이려고 했지만 하필 그때 캐빈이 개입하면서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또 다른 불쾌한 기억도 떠올랐다. 유빈이 클럽에 갔을 때 창식도 그 클럽 안에 있었다. 지근거리에서 유빈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유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창식을 무시했다.

사람들 사이를 해치고 유빈의 어깨에 손을 올렸지만 유빈은 마치 파리라도 앉은  몸을 살짝 비틀어 가볍게 털어내고 스테이지로 올라가 버렸다.

자신이 소유한 이 아름다운 여자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유빈이 자신에게 상처 주었던 바로  클럽에서. 자신의 것이라는 표식을 달고 자신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며, 자신에게 봉사하는 유빈을 보며 사람들은 찬사를 보낼 것이었다.

벽장으로 가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유빈의 집으로 보냈던 것과 같은 하이힐  켤레가 들어있었다. 축 늘어져 있는 유빈의 발을 보며 그 하이힐을 신길 상상을 해보았다. 바지 앞섶이 부풀어 오르며 상상에 상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유빈은 스테이지에 올라간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긴 코트를 벗자 보라색 유두와 딜도 팬티, 꼬리가 드라나고 사람들이 소리 지른다.

클럽 음악이 바뀌고 유빈이 연습한 대로 창식이 좋아하는 트월킹 (Twerking)을 추기 시작한다.

다리를 벌리고 무릎에 손을 얹은 유빈이 격정적으로 상체와 하체를 번갈아 튕긴다. 역동적으로 모핑 (Morphing)을 만들어 내며움직이는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에 사람들이 탄사를 보낸다. 클럽 조명을 받은 꼬리가 화려하게 스테이지를 수놓는다.

클럽 안 사람들의 환호에 맞춰 DJ가 음악의 템포를 올리고 유빈이 박자를 쪼개면서  동작이 점점 빨라진다. 몇몇 사람들의 시선은 유빈의 보라색 유두에 고정되고, 다른 몇몇은 꼬리가 어디에 달려 있는 것인지 토론한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창식이 스테이지 위로 올라간다.

주인님을 발견한 유빈이 창식 앞으로 다가와 공손하게 무릎 꿇고 바지를 벗긴다. 튕겨져 나온 창식의 페니스를 입으로 조심스럽게 애무하기 시작한다.

딜도 팬티의 전기 자극이 켜진다. 하지만 유빈은 오로지 창식의 페니스에만 집중한다. 창식이 유빈의 입에 사정할 때까지 전기 자극이 꺼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빈은 창식의 페니스를 입 안 가득 물고 최선을 다해 애무하지만 전기 자극의 강도가 끝까지 올라갈 때까지 창식은 사정하지 않는다. 시끄러운 클럽 음악 소리에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창식의 귀에 또렷이 들려온다.

“저 사람 봐. 아직도  싸고 있어. 나 같으면 저렇게 예쁜 애가 입술만 갖다 대도 바로 쌀 것 같은데.”

상상을 마친 창식이 딜도 팬티의 전기자극과 애널 플러그의 진동을 최고치로 켜서 유빈을 깨웠다. 자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트월킹을 연습시키고, 딥 스롯 펠리치오 (Deep Throat Fellatio)도 제대로 가르쳐야 했다.

* * *

자정이 넘은 시각, 캐빈의 집에 한 사람이  찾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탁한 공기에 밀환이 투덜댔다.

“캐빈 자네 담배 끊었다고 하지 않았나? 우리 교단 수칙 잊었나?”

캐빈이 정색하고 대답했다.

“교수님. 앉으시죠. 그런 말씀하시려고 온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저 검은 십자가 교단 탈퇴했습니다. 지금 교수님과 협력하는 건 제가 교단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밀환은 자존심을 세우려는 듯 창문을 열고 나서야 태식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캐빈이 태식과 밀환을 각자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메이페어. 교수님도 아실 겁니다. 이분은 지금은 해커 활동은 안 하시고, 한국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서 학생들 가르치시는 지밀환 교수님.”

태식과 밀환이 서로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편하게 메이페어라고 부르십시오. 본명은 이태식이고 부끄럽지만 프로텍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냥 교수님이라고 부르게.”

호칭이 정리되자 캐빈이 상황을 이끌어갔다.

“메이페어. 교수님한테도 그 자료 보여드려도 되지?”

태식이 고개를 끄덕하고 태블릿 PC를  밀환에게 건네주었다. 한때 자신의 제자였던 창식이 저지른 끔찍한 짓에 밀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밀환이 태블릿 PC를 내려놓자 캐빈이 물었다.

“이 정도면 왕창식 현상 수배 가능하겠습니까?”

밀환이 한 발 빼려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 자료들 어떻게 구했나? 해킹으로 찾은 것 같은데, 불법적으로 수집된 증거는 인정이…….”

캐빈이 밀환의 말을 끊었다.

“교수님! 그런 복잡한 문제들 처리해 달라고 지금 여기에 모신  아닙니까? 왕창식 안 잡으실 겁니까?”

밀환이 주춤했다가 대답했다.

“알겠네. 노력해 보겠네.”

“서둘러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저대로 두면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캐빈과 밀환, 태식은 각각 자신의 노트북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창식을 잡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태식은 확보한 자료들을 증거로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해 밀환에게 넘겼고, 밀환은 검찰을 동원해 창식을 옭아맬 계획을 수립했다.

캐빈은 지금 창식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작업은 길어졌고 늦은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자료를 넘기고 밀환이 검토하는 동안 잠깐 쉬고 있던 태식이 급하게 캐빈을 불렀다.

“하이데스님, 잠깐 이거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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