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65. 생각보다 심각한
창식의 어린아이 같은 투정에 황당함이 몰려왔지만 리모컨을 쥐고 있는 쪽은 창식이었다. 유빈이 속으로 전기 자극을 꺼달라고 소리치며 눈물 젖은 얼굴로 창식을 바라보았다.
다시 링크에 음악이 틀어지고 유빈의 공연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한 번 연습을 거쳤기 때문이었을까, 이전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창식이 딜도를 켰던 동작을 지나 더블 액셀을 해야 하는 구간에 도달했다.
유빈이 숨을 들이쉬고 뛰어올랐다. 공중에서 회전하는 유빈의 꼬리가 엉덩이를 두르는 커다란 원을 그렸다. 창식이 가장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애널 플러그의 진동을 켰다.
예상치 못한 자극에 유빈이 착지에 실패했다. 얼음판 위에 맨몸으로 엉덩방아를 찧은 유빈에게 창식의 고함과 함께 딜도의 전기 자극이 가해졌다.
전기 자극의 강도는 높았다. 다시 기절할 것 같았다. 유빈이 딜도 팬티를 벗어버리려고 허리에 손을 올렸을 때 전기 자극의 강도가 하나 더 올라갔다. 체념한 유빈이 무릎을 꿇고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창식을 향해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딜도와 플러그가 꺼졌다 켜지길 반복하며, 유빈이 영상 속의 공연을 완벽하게 수행할 때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도 높은 훈련이 계속되었다.
* * *
감옥에서 나온 캐빈이 집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방이 아닌 유빈이 머물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유빈의 향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유빈이 베고 자던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벼 보았다. 뺨을 부드럽게 쓸던 베개가 눈을 지그시 눌렀다. 형형색색의 무늬들이 떠올랐다 제멋대로 모양을 바꾸더니 사라졌다.
무늬들 너머 저 멀리로 유빈의 얼굴이 보였다. 유빈의 얼굴이 점점 흐릿해지며 멀어졌다. 더 가까이에서 선명하게 보고 싶었다. 베개에서 얼굴을 떼고 눈을 떴다. 유빈이 사라졌다.
캐빈은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유빈과 같이 있었던 짧은 시간 동안 잘해주지 못한 게 후회됐다. 그때는 이렇게 빨리 헤어지게 될 줄 몰랐었다.
‘어디로 가야 유빈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답을 떠올리는 데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프로텍이었다. 그곳에 구해 와야 할 자신의 여자도, 이제는 동생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없애야 할 적도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프로텍으로 달려가 창식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신중해야 했다.
이미 디도스 공격이라는 갖고 있던 가장 강력한 카드도 써버렸다. 하지만 프로텍에만 심대한 타격을 주었을 뿐 창식은 여전히 건재했고, 유빈은 여전히 창식의 손에 있었다.
밀환과 나누었던 대화처럼 창식을 한 번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캐빈이 스르륵 침대에서 일어났다. 침대에 누워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뚜벅뚜벅 걸어 유빈의 방을 나갔다. 다음에 이 방에 들어올 땐 꼭 유빈과 같이 들어오겠다고 다짐하며 문을 닫았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노트북을 켰다. 세 번째 손과 같았던 마우스를 잡고 부팅되는 컴퓨터를 보자 자신감이 차올랐다. 창식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부팅이 완료되자 수십 개의 이메일과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하나하나 확인하던 중 눈에 띄는 메시지가 있었다. 해커들의 지하 인터넷 토르를 통해 전송된 메시지였다. 발신인은 메이페어, 이태식이었다.
캐빈은 편의점 앞에서 만났던 태식과의 짧은 기억을 떠올리며 메시지를 열어보았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물어볼 것도, 말해야 할 것도 많으니 저번에 받아 간 자신의 번호로 빨리 연락 달라고 했다. 캐빈이 답장하지 못해 답답했는지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한 통 더 와 있었다.
캐빈은 메이페어가 자신에게 할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휴대폰에서 태식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세 번쯤 울렸을 때 태식이 전화를 받았다.
“메이페어? 나 하이데스. 전화 달라고?”
“지금 업무 중입니다.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캐빈이 황당해하며 전화가 끊어진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태식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하이데스님? 죄송합니다. 조금 전엔 회사 내에 있어서 통화하기가 곤란했습니다. 제가 메이페어인 거 회사에 알려지면 안 되잖아요.”
“괜찮아. 괜찮은데, 할 말이 뭐야? 물어봐야 될 것도 있다며?”
태식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전화 통화로 말씀드릴 건 아닌 것 같고요, 이따 잠시 뵐 수 있을까요?”
“그래. 내 집 주소 문자 메시지로 보내줄 테니까 거기로 와. 비밀스러운 이야기면 보안은 여기가 제일 좋아.”
“네. 알겠습니다. 퇴근하고 바로 가겠습니다.”
저녁 시간 즈음, 태식이 캐빈의 집에 찾아왔다. 캐빈이 약간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식탁에 앉은 태식에게말을 걸었다.
“술 마실래? 프로텍은 요즘 어떻게 돌아가?”
“아뇨. 술은 괜찮습니다. 술 마시면서 드리기엔 너무 무거운 이야기들이 많아서요. 프로텍 사정은 요즘 말도 마십시오. 하이데스님이 디도스 공격 성공하신 이후로 회사가 거의 망할 지경이에요. 프로텍 백신은 거의 무력화됐고, 혹시 토르 가보셨으면 아시겠지만, 해커들 사이에서는 프로텍 백신 공격하는 게 스포츠처럼 되어버렸어요.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캐빈이 가져온 술잔을 채우며 물었다.
“무슨 문젠데?”
“왕창식부회장님이세요. 회사가 그렇게 어려운데 며칠째 행방불명 되셨어요. 구심점이 없으니까 직원들도 중구난방 전혀 단합이 안 돼요.”
캐빈이 채운 술잔을 비웠다. 그 모습을 본 태식이 은근슬쩍 식탁에 놓인 여분의 술잔을 곁눈질했다. 태식의 생각을 눈치 챈 캐빈이 술잔을 건네고 채워주었다.
“마시고 싶었으면서 왜 빼?”
술잔을 단숨에 비운 태식이 한층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하이데스님은 왕창식 부회장님이랑 대체 무슨 사이이십니까?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단지 유빈 양을 사이에 둔 연적(戀敵)이십니까?”
캐빈도 술잔을 비우며 대답했다.
“그것도 맞고, 형제 사이야.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는 달라. 나는 호적에도 없는 사생아, 창식이는 호적에 등록된 정실부인한테서 나온 자식. 그래서 창식이는 프로테크놀로지 후계자고, 나는 이러고 있고. 너무 그렇게 미안한 표정 짓지 마. 이제 와서 상처받을 일 아니니까.”
태식이 이해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술을 한 잔 더 청해 받았다.
“그럼 이건 꼭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이데스님 동생 분 완전히 미쳐있어요.”
술잔을 비운 태식이 가방에서 태블릿 PC를 꺼내 캐빈에게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태식은 내부 백도어를 통해 프로텍 백신의 메인 소스 코드를 해킹하고, 창식이 프로텍 백신을 이용해 유빈을 스토킹 한 증거들을 확보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메인 소스 코드와 보안이 연동되어 있던 창식의 개인 컴퓨터를 해킹했다. 열지 말았어야 할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창식의 개인 노트북에는 살인일지가 저장되어 있었다. 창식은 자신과 몸을 섞었던 여자들을 SM 플레이를 넘어선 고문으로 죽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구타로, 누군가는 장기 파열로, 누군가는 중독으로, 누군가는 전기 쇼크로, 누군가는 자살로, 또는 그 외의 여러 가지 이유로, 열 명 가까운 사람들이 던젼에서 죽어나갔다. 창식은 자신이 죽인 그녀들의 프로필과 사망 원인, 시체 유기 장소 등을 꼼꼼하게 일지에 기록해 두었다.
태식이 보여준 살인 일지를 내려 보던 캐빈이 술잔을 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에서는 핏기가 사라지고 술잔이 깨질 듯 진동했다. 감옥에서 나간 유빈을 창식이 데려갔다고 했다.
그리고 창식이 행방불명 상태라고 했다. 이 일지에 기록될 다음 사람이 유빈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절대로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캐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태식이 캐빈의 빈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조금 더 들어주세요. 하이데스님이 왕무택 회장님의 아들이라면 꼭 아셔야 할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