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63. 해묵은 불만
유빈이 던전에서 고통받는 동안 캐빈은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며칠째 깎지 않은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라나 있었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뺨은 움푹 패어 있었다.
캐빈이 감옥 창살을 붙잡고 절규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했던 유빈을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또 지키지 못했다. 사랑하는 여자가 눈앞에서 경찰들에게 체포되어 가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다.
수갑을 차고 형사들에게 끌려가면서 애처롭게 자신을 쳐다보았던 유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취조를 받으면서도 형사들에게 몇 번이나 유빈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수없이반복했지만 괴로움에 지쳐 그만두었던 생각이 다시 올라왔다.
‘유빈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유빈은 감옥에 있지 않길 바랐다. 캐빈이 아는 한 유빈은 이런 곳에 갇혀 있어야 할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유빈이 택시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니, 황당한 누명이었다.
언론을 통해서 보도된 택시 살인 사건의 살해 방법이나 범행 은폐 수법은 캐빈도 알고 있는 검은 십자가 소속 살인 청부업자의 방식과 일치했다. 지밀환 교수의 명령을 받는 그자가 살인을 저지르고 모종의 계략에 의해 유빈에게 죄가 덮어씌워진 것이 분명했다.
언젠가 자신이 무심결에 유빈에게 택시 살인 사건의 범인이냐고 물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 말에 상처받았을 유빈을 생각하며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유빈이 감옥 바깥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괴로웠다. 왕창식과 지밀환, 김덕기까지 유빈을 노리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들에게 시달림을 당하느니 어쩌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감옥에서 보호받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특히 유빈이 창식과 같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쳐지고 심장이 저리듯 아파왔다.
캐빈이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바닥에 유빈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가 서린 눈물이 떨어졌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창식과 밀환이 유빈을 스토킹하기 전으로 돌아가 그들을 저지하고 유빈이 그런 끔찍한 일을 겪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돌릴 수 없다면 프로텍에 디도스 공격을 감행했던 그때로라도 돌아가고 싶었다. 적당한 선에서 멈추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창식을 확실히 파멸시켜야 했다.
하지만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흘렀고, 그동안 사태는 계속해서 악화되었다. 그리고 지금 최악으로 치닫는 이 상황에서 캐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컴퓨터도, 휴대폰도 사용할 수 없었다. 유빈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았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스스로가 무력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창살을 붙잡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캐빈에게 한 경찰이 다가왔다.
“왕창명, 조용히 하라고 했지? 나와. 면회다.”
캐빈이 얼굴을 들었다. 자신에게 면회를 올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보았다. 혹시 석방된 유빈이 찾아온 것일까 하는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면회실에서 캐빈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캐빈의 기대와는 달리 지밀환 교수였다. 밀환의 얼굴을 본 캐빈이 곧장 몸을 돌렸다.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 온,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면회실에서 나가려는 캐빈에게 밀환이 소리쳤다.
“민유빈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나?”
캐빈이 동작을 멈추고 밀환을 돌아봤다. 밀환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일단 앉게. 할 말이 많으니.”
캐빈이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투명한 벽 너머로 밀환을 노려보았다. 밀환이 캐빈을 달래기라도 하듯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굴을 보니 건강이 많이 상한 것 같네. 잘 챙기게나. 내일 구속영장 적부 심사가 있다고 들었네. 이대로 평생 감옥소에서 썩을 건가?”
대답하지 않는 캐빈에게 밀환이 한 장의 종이를 꺼내 보여주었다. 밀환이 벽에 갖다 댄 서류를 읽어 내려가던 캐빈의 눈이 번쩍 뜨였다.
캐빈의 석방을 요청하는 덕기의 탄원서였다. 피해자로서 캐빈의 처벌을 원하지 않으며, 사실은 총격을 가한 범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적혀있었다.
총격과 수술 직후에 머리가 맑지 않은 상태에서 과거에 정직 처분을 내려 원한을 갖고 있던 캐빈을 범인으로 지목했다는 설명도 덧붙어 있었다.
캐빈의 반응을 살핀 밀환이 종이를 거둬들이고 캐빈에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것 같아 다행이네. 거기서 나오게 해주겠네. 지금 경찰은 자네 사건에서 아무런 증거도 잡지 못했다고 들었네. 자네는 계속 묵비권 행사 중이고, 총기도 못 찾았다면서. 잘 숨겼나 보더군.”
캐빈이 팔짱을 풀고 밀환의 말에 집중했다.
“유일한 구속영장 청구 사유였던 피해자의 증언이 번복된다면 영장은 증거 불충분으로 당연히 기각될테고 자네는 내일 여기에서 나올 수 있겠지. 최종적으로는 무죄 판결까지 노려볼 수 있지 않겠나?”
캐빈이 되물었다.
“조건이 뭡니까?”
뜻대로 일이 진행되자 밀환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돌았다.
“왕창식을 잡을 방법, 갖고 있나?”
캐빈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교수님도 아실 텐데요. 지금 그걸 가장 원하는 사람이 저라는 걸. 솔직히 말씀드리죠. 지금 당장은 생각나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나가는 순간 왕창식은 제 손으로 잡습니다.”
밀환이 고개를 끄덕이고 쐐기를 박 듯 말했다.
“좋네. 이 탄원서는 자네 변호사한테 넘기기로 하지. 내일 재판 건투를 비네. 한 가지 더, 민유빈은 자네보다 먼저 석방 됐어. 그리고 석방되자마자 왕창식이 데려갔네.”
캐빈이 주먹으로 앞에 놓인 선반을 내리쳤다. 가장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유빈을 데리고 간 창식이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생각해 보려다 멈칫했다. 지나치게 괴로운 상상이었다.
밀환이 선반 위에서 떨리고 있는 캐빈의 주먹을 보며 말했다.
“몸 잘 챙기게. 나오면 할 일이 많지 않은가. 거래는 성립된 걸로 알겠네. 왕창식이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 하나만 물어봄세. 자네가 사랑하는 사람, 왜 우리 수연이가 아니라 민유빈이었나?”
“수연이는 저한테 여동생 같은 아이입니다. 저보다 좋은 남자만날 겁니다.”
밀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리를 뜨려는 밀환에게 캐빈이 물었다.
“교수님은 갑자기 왜 왕창식을 잡으시려고 하십니까? 동업 관계 아니었습니까?”
의자에서 일어선 밀환이 캐빈을 응시하며 말했다.
“자네한테 여동생 같은 그 아이가 왕창식한테 너무 많이 다쳤어.”
캐빈은 자신이 감옥에 있는 며칠 동안 창식이무슨 일을 벌인 것인지 궁금해졌지만, 자세히 물어볼 시간은 없었다. 뒤에 앉아있던 경찰이 면회 시간이 끝나간다는 통보를 해왔다. 마지막으로 밀환의 진심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던졌다.
“창식이 잡고 나서, 프로테크놀로지 복귀, 백신 프로그램 관리 권한, 필요 없으십니까? 그것 때문에 왕창식이랑손잡지 않으셨습니까?”
“필요 없네.”
* * *
바깥에서 창식을 잡기 위해 밀환과 캐빈이 협력을 다짐하는 동안, 창식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유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긴 기다림이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 조교를 생각하며 창식은 한껏 들떠 있었다.
귀찮게 울리던 휴대폰을 비행기 탑승 모드로 전환하고 그 안에 저장돼 있던 유빈의 동영상을 재생했다.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활동하던 시절의 어린 유빈이 등장했다.
스케이트 날 위에서 화려하게 질주하던 유빈이 얼음판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유빈의 스케이트 날 아래에서 얼음 가루가 비산(飛散)했다. 아름다운 몸으로 허공을 장식한 유빈이 우아하게 얼음판으로 내려왔다. 부드러운 착지 뒤에 자연스럽게 다음 동작이 이어졌다.
창식이 이미 수백 번 반복해서 재생해 본 가장 좋아하는 동영상이었다. 몇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점도 있었다. 동영상 속 유빈이 입고 있는 옷이 거슬렸다.
가슴과 허벅지, 엉덩이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안쪽엔 살색 속옷을 입고 있었다. 자신을 놀리는 것 같은 그 옷을 찢어 벗기고 싶었다.
화면 속 유빈이 자유로워 보이는 것도 못마땅했다. 자신의 소유였어야 할 유빈이 어떤 구속 장치도, 자신의 것이라는 표식도 없이 빙판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소유물 주제에 지나치게 자신과 대등한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다음 조교를 위해 준비해 둔 꼬리와 화면을 번갈아 보았다. 역시 저게 필요했다.
창식의 시선이 유빈에게로 옮겨갔다. 화면 속 유빈과 비교해 보았다. 성숙해진 유빈의 몸은 완연한 여체의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옷 따위는 입고 있지 않았다. 손은 묶여 있었고 유빈을 완벽하게 구속할 전기 딜도 팬티도 입혀져 있었다. 더 이상 유빈에게 자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