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8화 〉58. 인신교환 (58/70)



〈 58화 〉58. 인신교환


유빈을 만나고 연구실과 검은 십자가 사무실에 들렀다 집에 돌아온 밀환은 수연이 차려놓은 밥상과 남겨놓은 쪽지를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동안 일어났던 바쁜 일들 때문에 수연에게 소홀했던 게 못내 미안해지기도 했다.

수연이 식탁 위에 엎어 놓은 밥그릇과 국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가 밥과 찌개를 담아 식탁으로 돌아왔다. 먼저 먹을까 고민하다가, 수연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오랜만에 딸이 차려준 식사인데 혼자 먹기에 미안했다.

신호음이 가고 부재중이라는 음성이 나올 때까지 수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   걸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지간해선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아이였다. 한 번 더 걸어보려고 할 때 밀환의 휴대폰으로 동영상 하나가 전송됐다.

1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영상 속에는 수연이 찍혀있었다. 겉옷이 모두 벗겨진 상태로 ‘X’자 모양 틀에 묶여져 있는 수연에게 가위를 든 살수가 다가왔다. 수연은 정신을 잃었는지 고개를 떨어뜨린 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살수는 먼저 밀환에게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수연의 얼굴을 카메라에 비췄다. 그다음 손에 든 가위로 수연의 브래지어 가운데를 잘랐다. 브래지어가 벌어지고 수연의 가슴이 드러났다. 살수의 가위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수연의 팬티였다. 가위의 한쪽 날이 수연의 몸과 팬티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가위 날이 오므려지려는 순간 동영상이 끝났다.

밀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동영상을    재생해 보았다. 살수가 수연의 얼굴을 든 장면에서 멈췄다. 눈을 부릅뜨고 확인해보았다. 자신의 딸 수연이 맞았다. 그 장면을 확인하고 나니 그 뒤의 장면은 차마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아 휴대폰 화면을 껐다.

화면은 꺼졌지만 영상은 밀환의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수연이 묶여있는 그 틀, 그 공간. 익숙했다. 자신이 백보연 비서를 만났던 프로텍 사옥 꼭대기 층의 흉물스러운 공간이었다. 창식이 저지른 일이 틀림없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자신이 유빈의 스토킹을 기획하지만 않았어도, 창식과 대립각을 세우지만 않았어도 수연이 저렇게 험한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같은 공간에서 죽어갔을 백 비서에 대한 미안함도 느껴졌다.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떠나 창식에게 붙어 자신의 딸에게 가위를 들이밀고 있는 살수에 대한 분노도 솟구쳤다.

밀환이 꺼버렸던 화면이 다시 켜지고 휴대폰이 진동했다.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밀환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억지로 휴대폰을 쥐고 발신자를 확인해보았다. 창식이었다. 전화를 받았다.

“야 이 개자식아!”

흥분한 밀환을 조롱이라도 하듯 창식이 즐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이런, 교수님 많이 화나셨군요. 민유빈 양을 감옥에 집어넣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결자해지(結者解之)합시다. 민유빈 양 제게 넘겨주시면 따님 무사히 돌려 보내드리겠습니다.]

밀환은 대답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제가 성격이 급합니다. 너무 오래 끌지는 마십시오. 동영상에 나온 그 친구한테  선물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아참, 따님이랑 같은 자리에 있던 제 비서 교수님께서 죽이신  같던데, 맞죠? 그럼 알아들으신 걸로 생각하고 전화 끊습니다.]

밀환이 놓친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주우려고 했지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휴대폰이 계속해서 손끝에서 미끄러졌다. 밀환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로 범벅이  얼굴을 닦았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휴대폰을 주워 오늘 아침 만났던 이 총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총경, 급하니까  듣게. 내가 오늘 아침 만났던 민유빈 지금 석방하게. 아니, 그냥 석방하지 말고 우리 저번에 만났던 자네 경찰서 뒤편에 있는 뒷산 공터에서 나한테 넘기게.”

휴대폰 너머로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수님, 살인 사건 용의자를 제가 어떻게 마음대로 석방합니까? 여러모로 감사하지만 이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밀환이 속사포처럼 쏘아붙였다.

“영장 없이 구류할 수 있는 기간 최장 3일인 거 모르나? 영장칠만큼 결정적인 증거 잡았나? 피의자 자백이라도 받았나? 아니잖은가! 오늘 이틀째이니 하루 정도는 자네 재량으로 조절할 수 있지 않은가?  정도도  하나? 변호사 보내서 정식으로 항의해야겠나? 피해자 혈흔이 민유빈 집에서 발견된  구류할 만한 사유가 되는지 나는 잘 모르겠네. 살인 사건 해결해서 공 세우려고 무고한 시민을 구류 중인 경찰 뉴스 내일 조간신문에 실려야 정신 차리겠나?”
[교수님!]

밀환은 멈추지 않았다.

“자네가  봐주던 성매매 업소 장부에 자네 이름 없을 것 같나? 자네가 폭력배들한테 상납받는 계좌 정보 나한테 있네. 세탁도 제대로 안 된 돈인  알고 있었나? 지난번 승진에서 내 입김 들어간 거 경찰청에 고발 들어가야겠나? 경찰이, 그것도 총경 신분이, 내사  번이라도 받으면 다음 승진  건너가지 않나?”

잠깐 동안 밀환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씩씩댔고  총경은 침묵했다. 이 총경이 조심스럽게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민유빈 석방하고 넘겨드리겠습니다. 당장은 어렵고요, 내일 말씀하신 곳에서 뵙겠습니다. 저한테도 일을 처리할 시간을 주세요.]

밀환이 끓어오르는 속을 달래며 대답했다.

“알겠네.”

밀환은 이 총경과의 전화를 끊고 창식에게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전화를 할까 생각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 하루만 시간을 주게.

휴대폰을 움켜쥐고 기다렸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십 분, 이십 분, 한 시간이 지났다. 수연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자존심이 무너져 내렸다. 창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밀환이 인사말을 꺼내기도 전에 창식이 툭 내뱉었다.

[알겠습니다. 내일까지입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밀환이 숟가락을 들었다 놓았다. 도저히 밥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

다음 날, 유빈은 석방이라는 말을 듣고 환호성을 내질렀다가 다른 죄수들과 간수의 눈총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유치장 밖으로 나온 유빈에게 간수가 수갑을 채웠다. 유빈은 석방되는데, 왜 수갑을 차야 하는지 의아했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아직 경찰서 안이라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뒷문을 통해 경찰서 밖으로 나왔을 때도 수갑은 풀리지 않았다.

경찰서에서 나오자마자 유빈이 만난 사람은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였다. 남자는 유빈을 데리고 나온 경찰에게 수갑 열쇠를 받고, 유빈의 뒷덜미를 잡아 주차되어 있던 승합차 문을 열었다. 유빈이 소리 지르려는 순간 남자가 손으로 유빈의 입을 틀어막았다. 남자는 물건을 다루듯 유빈을 승합차에 욱여넣고 문을 닫았다. 유빈이 안에서 열려고 해보았지만 이미 잠겨있었다.

남자가 운전석에 탑승하고 승합차는 빠르게 경찰서에서 멀어졌다. 유빈이 양손을 모아 남자에게 휘둘렀다. 차가 잠깐 휘청하더니 남자의 주먹이 유빈의 관자놀이로 날아왔다. 유빈이 축 늘어지고 차는 다시 차선 안으로 들어와 안정되게 주행했다. 차가 산길로 접어들더니 한 공터에서 멈췄다.

공터에는 이미 두 대의 차가 주차돼 있었다. 한 대에는 밀환이, 다른 한 대에는 창식이 기대어 서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유빈을 데려온 남자가 유빈을 깨워 승합차에서 끌고 나왔다. 유빈은 이 기가 막힌 상황에 아무런 행동도 말도 하지 못하고 밀환과 창식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경찰서에서 유빈을 데리고  남자가 유빈이 차고 있는 수갑 열쇠를 흔들었다. 밀환이 턱으로 창식을 가리켰고 창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유빈을 끌고 창식 쪽으로 다가가 열쇠를 넘기고 승합차로 돌아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창식이 유빈의 손을 낚아채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기고 손을 뒤로 뻗어 차 문을 열었다.

살수가 손발이 묶여있는 수연을 데리고 나왔다. 수연을 보자 밀환이 참지 못하고 창식 쪽으로 달려왔다. 살수가 수연의 등을 툭 밀쳤다.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수연을 밀환이 안아서 부축했다. 자신을 노려보는 밀환을 향해 창식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밀환과 창식이 아무 대화 없이 각자 자기 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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