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56. 첫 번째 임무 받아가
그 끔찍한 상황을 더욱 절망적으로 만들었던 건 같이 갇혀있던 다른 죄수였다. 그녀는 유빈의 몸 여기저기를 쿡쿡 찌르며 반반하게생겼다느니, 가슴이 크다느니, 엉덩이를 그만 씰룩거리라느니 하는 온갖 성적 폭언과 조롱을 내뱉었다.
같은 여자에게 듣는 악의에 찬 성희롱은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
유빈이 반응하지 않자 조롱의 수위는 더욱 높아졌다. 유빈에게 유치장에 갇히게 된 죄명을 물었다. 유빈이 대답하지 않자, 유빈이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꽃뱀 짓을 하다가 들어온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 여자가 꽃뱀이라고 불러대는 통에 유빈은 잠에 들수조차 없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것도 모자라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부당한 대우까지 당하자 유빈의 서러움이 폭발했다.
그녀가 무릎을 모으고 앉아 얼굴을 파묻고 있는 유빈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유빈이 얼굴을 스윽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빈의 퉁퉁 부은 눈을 보아서일까, 그 여자의 희롱이 잠깐 멈췄다.
유빈이 잠겨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 죄명이 그렇게 궁금하세요?”
그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인이래요.”
말을 마친 유빈이 펑펑 소리 내어 울었다. 그 뒤로 그녀는 조용히 유치장 구석진 곳으로 가 자리를 잡고 유빈에게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유빈이 막 잠들려고 하던 순간 유치장을 감시하던 경찰이 유빈을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유빈은 잠깐이라도 이 끔찍한 곳에서 나갈 수 있다는 기쁨에 자다 깨워진 짜증도 잊고 경찰을 따라갔다.
경찰과 함께 도착한 곳은 경찰서 뒤편에 마련된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터였다. 그곳에 서 한형석 형사가 유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빈은 한형석 형사가 자신을 체포하고 수갑을 채웠던 것이 생각났다.
한형석 형사에게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딱히 갈 곳도 없어 어색하게 서 있는 유빈에게 한형석 형사가 다가왔다. 유빈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유빈의 옆에 주차돼 있던 경찰차에 몸을 기댄 한형석형사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고 유빈에게 물었다.
“하나 드릴까요?”
유빈이 고개를 가로젓자 담뱃갑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유빈에게 물었다.
“억울하죠?”
이번엔 유빈의 고개가 세로로 움직였다. 이미 너무 많이 울어서 더 나올 눈물도 없을 것 같았지만 경찰서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에다시 눈 밑이 아려왔다. 한형석 형사가 말했다.
“나가게 해드릴게요. 내일 다시 봅시다.”
형석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훌쩍이고 있는 유빈을 다시 유치장으로 들여보내고 경찰서 밖으로 나와 담배 하나를 빼 물고 불을 붙였다. 조금 전 유빈이 흘렸던 눈물이 떠올랐다.
흔히 쓰이는 수사 기법이었다. 한 사람은 나쁜 역할, 다른 한 사람은 착한 역할을 맡아 마음을 흔들고, 수사 대상이 착한 역할을 맡은 사람에게 협조적이도록 유도하는 방법이었다. 유빈을 수사에서는 강경태 형사가 나쁜 역할을 자신이 착한 역할을 맡았다.
성공적이었다.
유빈은 어느 정도 형석에게 마음을 연 것 같았다. 하지만 형석의 목적은 수사의 원활한 진행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 유빈을 쥐고 밀환과 창식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번 해볼 요량이었다. 윗선을 압박해서 유빈을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밀환이었고, 유빈을 원하는 사람은 창식이었다.
자신은 그 둘 사이에 아주 좋은 위치에 놓여있었다. 이 상황을 잘 이용한다면 한 몫 단단히 챙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다음 날 아침 형석은 경찰서로 출근하는 대신, 어젯밤 수사가 길어져 늦게 출근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프로텍 본사로 향했다. 꼭 왕창식 부회장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며 경비원에게 쪽지를 건네고 로비에서 기다렸다.
시침(時針)의 움직임이 눈에 띨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형석은 쪽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까 봐 걱정하며 다시 경비원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경비원은 부회장 비서실에전달했다고만 대답했다. 이미 기다린 만큼의 시간이 더 흘렀다.
로비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창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석이 후다닥 달려가 창식을 불러보았다.
“부회장님!”
로비에서 형석을 마주한 창식이 형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꾹 눌렀다.
“기다려.”
창식은 그대로 회사 밖으로 나갔다. 형석은 창식의 손이 닿았던 어깨에 손을 올려보았다. 예상치 못한 제스쳐가 무슨 의미였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갑자기 창식이 자신에게 반말을 쓰는 것 역시 의아했지만, 쪽지가 제대로 전달됐다는 생각에 일단 창식의 말대로 기다리기로 했다.
시침이 크게 한 발을 떼고, 경찰서에서 출근하지 않는 형석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현장으로 바로 출동해 수사 중이라고 둘러대고 전화를 끊을 때까지도 창식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고 프로텍 직원들이 로비층으로 몰려나올 때쯤이 돼서야 창식이 형석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따라와.”
형석은 여전히 갑자기 너무나도 달라져 버린 창식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냥 돌아가기에는 지금까지 기다린 시간이 아까웠다. 크게 한 몫 쥘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창식을 따라 부회장실로 들어갔다. 창식이 마주 앉은 형석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민유빈이 어디 있는지 말하겠다고?”
형석은 끌려다니는 듯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서 뜸을 들여보았다.
“그 전에 부회장님.”
창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나가! 너한테 볼 일 없어.”
형석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빈의 소재를 미끼로 시간을 끌고, 대화를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가려는 시도는 이미 한 번 사용했던, 더 이상 먹히지 않을 전략이었다. 형석이 급하게 뒤돌아선 창식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
“광무 경찰서 유치장에 있습니다!”
창식이 돌아서더니 불쑥 형석의 멱살을 잡았다.
“경찰서? 유치장? 네가 그랬나?”
“부회장님.”
“말해! 누구야!”
형석이 켁켁 거리다 대답했다.
“지밀환 교수님의 지시였습니다.”
대답을 들은 창식은 형석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창식이 팔짱을 끼고 쓰러진 형석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걸 이렇게 찾아오기까지 해서 나한테 알려주는 이유는 뭐지?”
형석은 잠시 숨을 고르는 척하며 말을 아꼈다. 너무 심하게 끌려다녔다. 유빈의 위치와 지밀환 교수의 이야기까지, 자신의 목적을 말하기도 전에 갖고 있는 카드를 너무 많이 써버렸다. 침착해야 했다.
“2억에 거래하시겠습니까? 지금 유치장에 계신 민유빈 양, 제가 프로텍으로 모시겠습니다. 부회장님이 얼마나 민유빈 양을 원하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 금액이면 부회장님께는 큰돈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떠십니까?”
속사포처럼 자신의 할 말을 쏟아낸 형석의 눈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창식이 보였다. 창식이 다시 돌아서서 말했다.
“거기 탁자 위에 계좌번호, 휴대폰 번호 적어놓고 가.”
형석은 거래가 성립됐다는 생각에 자신의 명함에 계좌번호를 적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 프로텍을 나왔다. 형석이 나간 뒤 창식은 남겨진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하룻밤 사이에 찾아온 두 사람은 너무 달랐다.
어젯밤에 찾아온 살수는 분수를 알고 창식에게 굴종했다. 마음에 드는 자세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 찾아온 형석은 버러지 같은 인간 주제에 자신과 대등한 위치에 서서 거래를 하자고 했다. 저번에 찾아왔을 땐 밀환의 앞잡이 노릇까지 하기도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유빈이 어디 있는지는 알아냈다. 다시 데려오는 일은 창식이 얼마든지 혼자 할 수 있었다. 그냥 뒀다간 계속귀찮게 굴 버러지 같은 인간은 이쯤에서 정리하는 편이 나았다.
혼자서도 할 수 있었던 유빈의 스토킹에 밀환과 덕기 같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끼어들어 일을 망쳐놓았던 것이 생각났다. 필요 없는 사람들과 협력하고 협상하는 귀찮은 일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필요한 사람은 협박하고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휴대폰을 들어 어젯밤에 저장한 살수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첫 번째 임무 받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