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55. 달달 종료, 체포
살수가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내쉬더니 창식에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기형적인 외모 탓이었을까, 부모님의 얼굴도 이름도 모른 채 교회와 절, 때로는 고아원을 전전하며 자랐다.
주민등록번호도, 국적도 없이 아무런 보호도 혜택도 받지 못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학교라는 곳에 간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살수는 왜 자신은 그곳에 가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같이 놀던 친구들을 데려가는 엄마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왜 엄마라는 사람이 나타나면 친구들이 자신과 거리를 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이가 들고 그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했을 때, 자신에게도 엄마와 아빠가 있다는 사실을 같이 깨달았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부모님은 어디에 계시냐고 물어봤지만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 더 크고 철이 들 무렵에는 왜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녀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흉측한 외모의 살수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을 표했다.
한편으로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에 대한 무력감을 축적하며 사춘기 소년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고아원에서 쫓겨나 3일을 굶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밥을 사주며 부탁했다. 마무리되면 먹고 싶은 걸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는 돈을 주겠다고 했다. 죄책감이나 두려움보다는 당장의 한 끼가 절실했다.
그렇게 살기 위해 살인 청부업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자신의 이름을 지밀환이라고 밝힌 그 남자를 따라 살수는 검은 십자가 교단에 들어갔다. 복잡한 교리에는 관심 없었지만 밀환은 살수에게 꾸준히 사건을 의뢰하고 성공할 때마다 보수를 지불했다.
더 이상 스스로를 의탁할 곳을 찾아 비굴하게 굽신거리지 않아도 됐다. 내일 무언가를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그 삶에 만족했다.
그때부터 누군가 이름을 물으면 살수(殺手)라고 대답했다. 어릴 적 절에서 받은 태인(泰仁)이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아무도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 그 이름 대신 자신의 끼니를 해결해주는 일을 이름으로 쓰기로 했다.
그렇게 검은 십자가 소속의 살인청부업자로 몇 년을 살아왔다. 살육의 나날이었지만 살수의 삶 중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그러던 중 얼마 전부터 밀환이 살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민유빈 스토킹과 관련해 계속 일을 처리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돈은 주지 않았다.
그 동안 밀환과 쌓아온 신뢰를 생각하며 살수는 차분히 기다렸지만 밀환은 살수가 지금껏 모아놓은 돈을 가져갔다. 빌려간다고 했고, 신의 이름으로 약속한다고 했다. 밀환이 말하는 신 따위 관심도 없고 믿지도 않았지만 자신을 거둬 준 밀환을 한 번 더 믿기로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밀환은 무슨 일이 그렇게 바쁜지 만날 수도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결국 살수는 밀환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새롭게 의탁할 사람을 물색했다. 민유빈 스토킹의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알게 된 좋은 사람이 있었다. 프로테크놀로지 왕창식 부회장이었다. 살수는 창식이 원하는 일을 할 자신이 있었고, 창식은 살수에게 필요한 돈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눌한 말솜씨로 긴 이야기를 끝낸 살수가 힘들었는지 잠시 숨을 고르고 창식에게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부탁해요…….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창식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지밀환 교수가 살수를 부리는 것을 처음 봤을 때부터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자가 직접 찾아와 거둬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곧 전화하겠네. 할 일이 많을 거야. 어디로 연락하면 되지?”
살수가 탁자 구석에 놓인 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창식은 펜과 메모지를 집어 살수에게 건넸다. 살수가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적어 창식에게 주었다.
“대포폰이라 언제 끊길지 몰라요. 번호 바뀌면 다시 찾아올게요. 그리고…….”
창식이 말끝을 흐리는 살수의 표정을 살폈다. 두려움의 징후가 역력했다. 달래는 어조로 살수에게 물었다.
“괜찮아. 편하게 말해도 돼.”
우물쭈물하던 살수가 겨우 입을 뗐다.
“저 어제부터 쭉 굶었어요. 돈이 없어서요. 일 시작하기 전에 조금만땡겨 주시면…….”
창식은 살수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궂은일도 도맡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었다.
“계좌번호 불러줘. 지금 쏴줄게.”
“계좌……, 통장 없어요. 은행 못 가요.”
창식이 웃으며 금고에서 돈 봉투를 꺼내 살수에게 내밀었다. 눈치를 보다 슬쩍 봉투를 열어 액수를 가늠해 본 살수는 일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창식이 살수에게 첫 번째 임무를 의뢰했다.
“방금 보여준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 계속 감시해. 지금처럼 사진도 가져오면 더 좋고.”
살수는 연거푸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창식의 집무실을 나갔다.
*
케빈의 집 앞에 차를 대놓고 잠복근무 중이던 한형석 형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케빈이 유빈의 손을 잡고 집에서 나서고 있었다. 케빈을 잡기 위해 시작한 잠복이었지만 유빈까지 한 번에 일망타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유빈과 케빈이 차를 지나쳐 몇 걸음 더 걸어갔을 때 한형석 형사가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유빈과 케빈의 대화가 들렸다.
“우리 같이 멀리 가버릴래? 미국 어때?”
“칫. 나 영어 못해요.”
“뻥치지 마. 너 입사 원서에 토익 980이라고쓰여 있는 거 봤어. 그거 미국에서 대학 나온 나도 안 나오는 점수야.”
“아니, 그건 그거고요.”
용의자들의 도주 모의를 들은 한형석 형사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맞은편에서 형사들이 튀어나와 유빈과 케빈을 포위했다. 몇몇 형사들은 총까지 뽑아 들고 있었다. 놀란 유빈이 케빈의 등 뒤에 숨었다. 유빈의 뒤에서 한형석 형사가 다가오며 말했다.
“민유빈 양 그리고 케빈, 한국 이름 왕창명. 각각 살인, 살인미수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유빈은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한형석 형사와 눈이 마주쳤지만 냉정하게 미란다 원칙이 고지되었다.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이후의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으며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습니다.”
한형석 형사가 유빈의 떨리는 손목 수갑을 채웠다. 맞은편에서 다가온 형사들에 의해 케빈에게도 수갑이 채워졌다. 둘은 각각 다른 차에 태워져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조사실에 도착한 유빈은 자신이 택시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있다는 것에 경악했다. 어두운 조사실에서 만난 형사는 지난번 참고인으로 조사받았을 때의 한형석 형사의 태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자신을 강경태 형사라고 소개한 그는, 고압적인 자세로 유빈에게 자백을 강요했다. 국과수 감정서를 들이밀며 유빈의 집에서 피해자의 혈흔이 발견되었다고 했다.사건 당일 유빈이 피해자와 같이 있었던 모습이 찍힌 CCTV 기록도 범행 증거로 제시되었다.
유빈은 어떻게 자신이 건장한 성인 남성을 완력으로 제압하고 살해할 수 있겠느냐고 항변했지만, 강경태 형사는 피해자의 혈액에서 알코올이 검출되었다는 것과 유빈이 운동선수로 활동했던 경력이 있는 것을 들어 간단히 무시했다.
유빈이 집에서 발견된 혈액은 사워기에서 뿜어져 나왔다고 진실을 말했을 때도 강경태 형사는 믿어주지 않았다. 자신이 살던 아파트를 한 번 더 조사해 달라고, 샤워기를 붙였다 뗀 흔적이 있을 거라고 하소연했지만 들을 가치가 없는 변명으로 취급되었다.
조사를 마치고 유빈은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구속영장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강경태 형사는 강력 범죄자의 긴급 체포에 구속은 영장이 필요 없다고 비웃으며 대답했다. 유치장에서의 첫날밤은 끔찍했다.
속옷은 흉기나 자살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이유로 강제 탈의 되었고, 식사나 화장실 무엇 하나 자유롭지 않았다. 항상 담당 경찰이 동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