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4화 〉54. 달달한 밤 (54/70)



〈 54화 〉54. 달달한 밤

케빈이 코끝을 몇 번 찡긋하더니 부엌으로 달려갔다. 애써 만들어 놓은 파스타 소스가 타고 있었다. 케빈이 급히 가스레인지를 끄고 팬을 싱크대에 넣었다. 환풍기를 켜고 창문을 열었지만 아직 부엌을 가득 메우고 있는 진득하게 눌은 진한 크림 냄새가 유빈의 식욕을 자극했다.

“저 진짜 배고파요.”

케빈이 겸연쩍은 듯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나가서 사 먹자. 근처에 파스타 맛있는 레스토랑 있어.”

레스토랑에 도착한 케빈은 파스타를 주문했다. 부분조명과 바닥조명까지 있는 데다 라이브 바이올린 연주자도 있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메뉴에서 가격을 본 유빈이 케빈을 말리려고 했지만 케빈은 손사래 치며 와인  병까지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고 가벼운 이야기가 오가던 중 바이올린 연주가 한 템포 빨라졌을 때 케빈이 불쑥 물었다.

“그런데 너 메이페어랑은 무슨 사이야?”

유빈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게 누구예요?”

케빈이 채근하듯 다시 물었다.

“얼마 전에 네 친구랑 너랑 셋이서 같이 술 마셨다며. 덩치 완전 좋고 창식이 밑에서 일하는 애 있잖아.”

유빈은 입안에 있던 파스타를 씹으며 케빈의 설명을 정리해 보았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아 태식 씨요?”

메이페어 이야기를 꺼낸 뒤부터 파스타는 한 입도 먹고 있지 않던 케빈이 또 닦달하듯 물었다.

“메이페어 본명이 태식이야? 아무튼 무슨 사인데?”

점점 빨라지는 케빈의 말에 유빈이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냥 소개팅했던 학교 선배예요. 질투해요?”

빠른 템포의 바이올린 연주가 클라이맥스에 접어들었다. 케빈이 와인을 들이켰다. 메이페어와 유빈이 소개팅을 했다고 했다. 태식에게 유빈과의 관계를 물었을 때는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런 케빈을 보며 유빈이 타이르듯 말했다.

“질투하지 마요. 그냥 좋은 선배에요. 소개팅하고 에프터 신청도 못 받아줬어요. 그런데 태식 씨는 어떻게 아세요?”

특별한 사이가 아니라는 말에 안심이 된 케빈이 파스타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 대답했다.

“유명한 해커야. 나보다는 아니지만.”

오랜만에 듣는 케빈의 잘난 척에유빈은 다시 피식 웃어버렸다. 바이올린 연주가 다시 느린 템포의 곡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레스토랑에서 나온 케빈과 유빈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거리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케빈이 유빈 쪽으로 슬쩍 다가왔다. 유빈의 고운 목선이 보였다. 등받이에 걸치고 있는 팔을 올렸다. 유빈의 어깨를 감싸려는 동작이었다. 케빈의 손이 내려와 유빈 어깨에 닿기 직전 유빈이 케빈의 발목을 툭 찼다. 케빈의 손이 멋쩍은 듯 다시 올라갔다.
유빈이 물었다.

“왜 스토커 아니라고 확실히 안 말했어요?”

황당해진 케빈이 눈을 깜빡였다.

“말했잖아. 여러 번. 네가 안 믿었지.”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더 강력하게 안 말했냐고요.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게 하면 어떻게 알아요.”
“어떻게 그것보다 더 강력하게 말해?”

화난 목소리로 대답한 케빈이 벤치에서 일어섰다. 유빈이 팔을 뻗어 케빈의 손을 잡았다. 잠깐 시간이 멈춘 듯 둘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케빈의 등을 보고 있던 유빈에게 언젠가 패스트푸드점에서 있었던 일이 데자뷰처럼 떠올랐다.

그때는 케빈이 유빈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그때 자신이 케빈의 손을 뿌리 치고 달아났던 것이 생각났다. 정반대의 상황에서 케빈이 자신의 손을 뿌리쳐 버릴까  무서웠다. 먼저 손을 놓았다.

손을 놓은 유빈의 가슴이 손을 잡을 때보다  세게 뛰었다. 그때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대로 케빈이 떠나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삐삐를 꼭 쥐었다. 케빈이여전히 등을 보인 채 말했다.

“나 사랑해?”

유빈이 대답하려는 순간 케빈이 돌아봤다. 유빈과 케빈의 눈이 마주쳤다. 유빈이 입안 어딘가로 숨어버린 것 같은 대답을 찾아내 다시 말하려고 했을 때 케빈의입술이 유빈의 살짝 벌어진 입술을 덮었다. 유빈의 눈이 스르르 감기고 소리 없는 대답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찰칵―.

갑자기 들려온 카메라 소리에 유빈이 눈을 뜨고 입술을 떼었다. 케빈의 입술이 다시 유빈을 향해 다가왔지만 유빈이 케빈의 가슴을 살짝 밀어 제지했다.

“사진 찍는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그래? 난 종소리밖에  들었는데?”
“여기 이상해요. 집으로 가요.”

케빈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집에 가서 뭐하게?”
“진짜 우리 키스할  카메라 소리가 났어요.”
“사진 찍는 거 봤어?”

유빈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눈 감고 있었어요.”

케빈이 잔뜩 신난 목소리로 외쳤다.

“가자. 집에!”

집으로 돌아온 유빈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케빈은 따라 들어오려다 유빈의 울적한 표정을 보고 머쓱하게 문 앞에 서있었다. 유빈이 고개를 돌려 케빈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뭐 해요?”

케빈이 민망한   바깥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응. 그냥. 예뻐서 보고 있었어. 잘래? 피곤하지?”
유빈의 시선이 바닥으로 옮겨졌다.
“들어와서 나 안아줘요.”

케빈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케빈을 좇던 유빈의 눈이 옆에 앉은 케빈의 눈과 마주쳤다. 케빈이 팔을 벌렸고 유빈이 케빈의  안으로 들어갔다. 양 팔로 케빈의 등을 감았다. 케빈의 팔이 내려와 유빈의 어깨와 등을 토닥였다. 유빈이 케빈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물었다.

“우리 진짜 사진 찍혔으면 어떡해요? 왕창식 부회장이었을 수도 있잖아요.”

케빈이 토닥임을 멈추고 유빈을 꼭 끌어안았다.

“괜찮아. 나랑 같이 있잖아.”

유빈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케빈의 가슴팍이 젖어들었다.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미안해. 지켜준다고 말만 하고 그런 일 겪게 해서.”

케빈이 유빈의 어깨를 쥐고 눈을 마주쳤다. 엄지손가락으로 유빈의 눈물을 닦고 뺨을 어루만졌다.

“이제 헤어지지 말자.”

유빈의 눈이 감기고 입술 위에 입술이 포개졌다. 케빈이 유빈을 살짝 밀어 한 팔로 받쳤다. 유빈의 손이 케빈의 옷 안으로 들어갔다. 유빈의 입술에서 떨어진 케빈의 입술이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턱 아래 고운 목선에 키스했다. 살짝 드러난 쇄골에 혀끝이 닿았다.

유빈과 케빈이 서로의 상의를 벗겼다.
다시 입술, 목, 쇄골, 쇄골,가슴.




*




늦은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은 프로텍 부회장 집무실 앞에  남자가 서 있었다. 창식의 지시를 받은 경비원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남자의 몸수색을 했다. 무기가 없는 것을 확인받은 살수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창식과 마주 앉았다.

창식을 찾아온 남자는 땅딸막한 키에 세로로 찢어진 눈, 우둘투둘한 피부. 호감을 갖기 어려운 외모의 살수였다. 살수의 직업이 살인 청부업자라는 것까지 떠올린 창식은 돋아나려는 소름을 억지로 눕히고 침착하려 애쓰며 물었다.

“지밀환 교수한테 충성하던 사람 아니었나? 여기엔 무슨 일로?”

살수는 대답 없이 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창식에게 내밀었다. 사진을 본 창식의 팔에 조금 전과는 다른 이유로소름이 돋아났다. 사진 속에는 유빈과 케빈이 키스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사진을 집어 든 창식의 손이 떨렸다. 창식이 움켜쥔 사진의 귀퉁이가 일그러졌다.

‘또 형한테 갖고 싶은  뺏겼다.’

창식이 시선을 올려 살수의 눈을 보며 말했다.

“원하는 게 뭔가?”

살수가 짧게 대답했다.

“구직 중이에요. 이 중에 처리하고 싶은 사람 있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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