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3화 〉53. 달달한 저녁 (53/70)



〈 53화 〉53. 달달한 저녁

덕기가 차를 미끼로 유빈을 팬텀 유통 지하 주차장으로 유인했던 일, 그곳에서 유빈을 납치하려다 갑자기 나타난 케빈에게 총을 맞고 쓰러졌던 일을 차례로 털어놓았다. 꼼꼼히 메모하며 듣던 한형석 형사가 물었다.

“지하 주차장에 CCTV가 설치돼 있나요? 아니면 혹시  상황을 목격한 사람이 있습니까?”

덕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새벽에 가까운 이른 아침이라 오가는 사람은 없었다. CCTV가 설치돼 있긴 하지만 팬텀 유통 내의 모든 CCTV 기록은 케빈이 직접 관리하는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기 때문에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지밀환 교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케빈을 감옥에 집어넣는 게 가능하겠나?”

한형석형사가 대답했다.

“피해자가 증언한 살인 사건 용의자이니 긴급체포는 가능할  같습니다.  이후에 검찰로 넘어가서 구속영장 청구나 최종 유죄 판결까지는 범행 도구 같은 증거가  필요할 겁니다.”

지밀환 교수가 의자에서 일어나 덕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푹 쉬고. 내 또 옴세. 케빈은 우리가  잡아넣겠네. 한 형사는 잠깐 밖에서 나 좀 보세.”

덕기를 눕히고 병실을 나온 밀환과 한형석 형사는 병원에 마련된 카페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오가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밀환이 물었다.

“저번에 송금한 돈은  받았고?”

한형석 형사의 얼굴이 야비한 웃음이 톡톡 튀었다.

“네. 교수님. 요긴하게 쓰고 있습니다.”

지밀환 교수가 본론을 꺼냈다.

“택시 살인 사건 조사에 내가 준 정보가 도움이 되던가? 송금할 때 메일로 같이 보냈었는데 말이야.”

한형석 형사도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조심하며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 안 그래도 그 이야기 드리려고 했습니다. 오기 직전에 현장 감식반이랑 같이 수사해보니, 민유빈 양이 살던 아파트 곳곳에서 루미놀 반응,  네. 그러니까 피가 묻어있었던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안 구석구석 다 뒤져서 약간의 혈액 샘플들 확보해서 국과수에 감정 의뢰해 놨습니다. 택시 살인 사건 피해자의 혈액이랑 일치한다면 민유빈 양이 유력한 용의자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 정보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밀환 교수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대답하기 곤란한 한형서 형사의 마지막 질문을 적당히 회피하며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물었다.

“내 정보력이야 국내에서 따라올 사람이 있겠나. 그건 그렇고, 아까랑 같은 질문이네만, 민유빈도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겠나?”
“민유빈 양을요? 케빈이랑 비슷합니다. 혈액 샘플이 일치하면 긴급 체포는 가능하겠지만 그 뒤로 어떻게 진행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그 두 연놈 체포해주게나. 국과수 쪽은 빨리 처리되도록 내가 손을 써 놓겠네.”

한형석형사가 오랫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저 교수님, 그런데 택시 살인 사건 진짜 범인은 누굽니까? 알고 계신가요?”

밀환이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을 주저했다. 창식과 자신이 사주하고 살수가 저지른 사건이었다. 밀환 자신이 살인 사건에 연루돼 있다는 사실을 한형석 형사에게 말해도 되는지 확신할  없었다. 앞뒤 정황이 드러나지 않게 짧게 대답했다.

“프로테크놀로지 왕창식 부회장.”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대답에 한형석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밀환이 NBS 방송국 해킹 사건에 왕창식 부회장이 개입되어 있다고 제보했던 것과, 해킹 당시 송출됐던 영상에 유빈이 나왔다는 것, 지밀환 교수의 지시로 왕창식 부회장을 찾아갔을 때 유빈의 소재를 묻는 질문을 받았다는 것이 차례로 떠올랐다.

밀환과 창식이 유빈을 사이에 놓고 힘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한형석 형사는 지금은 단지 경찰의 지위를 이용해 밀환을 돕고 있지만, 왕창식 부회장이 연관되어 있다면 지밀환 교수가 주는 푼돈보다 보다 훨씬 더  걸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밀환을 떠보았다.

“왕창식 부회장이 범인이라면 왜 민유빈 양을 잡으라고 하시는 겁니까?”

밀환이 허리를 젖혀 한형석 형사와의 거리를 벌리며 대답했다.

“큰 고기를 잡으려면 미끼로 쓸 작은 고기부터 잡아야 하는 법일세. 그렇게만 알고 있게.”

*



유빈과 케빈의 포옹이 길어졌다. 케빈이 다시 물었다.

“나 아직도 짝사랑 중이냐고.”

유빈이 대답했다.

“나 배고파요.”

케빈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부엌에 빵 있어. 갖다 먹어.”
“저번에 먹었던 파스타  먹고 싶어요.”
“빵 먹어.”
“나 사랑한다면서요.”
“짝사랑이라며.”
“이제부터 그냥 사랑해요.”
“……”
“파스타. 사랑해요.”

파스타를 사랑한다는 건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지 아리송한 유빈의 말에 케빈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부엌으로 갔다. 케빈이 나가고 불을 켜자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옷장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유빈은 땀에 젖은 옷을 벗고 좋아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케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유. 소스 뭘로 할까? 크림? 토마토? 로제? 볼로냐?”

유빈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저번에 먹었던 거요.”

다시 케빈이 말했다.

“면은 뭘로 할까? 스파게티? 링귀네? 페투치네?”
“저번에 먹었던 거요.”

케빈의 목소리가 커졌다.

“야 민유. 나와 봐.”

유빈이 새로 입은 옷을 단정히 하고 침대 밑에 놓인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 부엌으로 나갔다. 케빈은 크림소스에 넣을 양파와 베이컨을 볶고 있었다. 케빈이 냄비 옆에 놓인 파스타 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스는 크림이었는데 면은 뭐였지? 저 중에 골라봐. 나 기억이 잘 안 나. 그때 나 술 너무 많이 마셨었나 봐.”

사실 유빈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적당히 중간 굵기의 면을 집어 케빈에게 내밀었다.

“아 링귀네였어? 거기 다시 내려놔.”

양파 향과 베이컨 향이 어우러진 배고픈 냄새가 나자 케빈이 팬에 크림을 부었다. 유빈이 케빈 옆을 기웃거렸다.

“이 잎은 뭐예요?”
“바질. 먹어봐. 맛있어.”
“그냥 이렇게 먹어요?”

유빈이 바질을 들고 입술로 앙 무는 시늉을 해 보였다.
케빈이 유빈을 보더니 크림소스를 젓던 스패튤라(Spatula)를 놓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깐!”
“왜요? 먹어보라면서요. 이렇게 먹는  아니에요?”
“아니 그거 말고. 휴대폰.”

유빈이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이거 왜요?”
“그거 켰어?”

유빈이 휴대폰  버튼을 눌러보더니 대답했다.

“어 꺼졌네요. 배터리 없나?”

케빈이 다시 급하게 외쳤다.

“켜지 마!”
“왜요?”
“너 데리고 오면서 내가 일부러 껐어. 위치추적은 나만   있는 게 아니야. 왕창식이랑 지밀환이  찾으려고 돌아다니고 있어. 따라와봐.”

케빈이 유빈을 데리고 간 곳은 창고로 쓰는 방이었다. 불을 켜자 넓은  이곳저곳에 쌓여있는 수많은 상자들이 보였다. 케빈은 방 안으로 들어가 한참 동안 상자들을 뒤적거렸다. 유빈은 문 옆 벽에 기대고 서서 지루한 듯이 케빈을 쳐다보고 있었다.

“배고파요. 파스타 먹고 찾아요. 휴대폰 안 켤게요.”

케빈이 들고 있던 상자를 열며 대답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박스에는 분명히 있을 거야.”

케빈의 말은 틀렸다. 그 뒤로도 몇 개의 상자를 더 열었다 닫았다. 유빈의 배에서 ‘꼬르륵꼭’하는 소리가 났다.

“뭐 찾는데요? 저녁 먹고 나가서  오면 안 돼요?”
“쉽게  사는 물건이야. 찾았다!”

유빈은 케빈한테서 건네받은 투박한 검은색 물체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관찰했다. 어렸을 때 TV에서만 봤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신기해하는 유빈에게 케빈이 어떻게 쓰는 물건인지 설명해주었다.

“페이저(Pager). 한국어로 삐삐. 이거 갖고 다녀. 위치 추적절대 안 돼. 거기 붙어 있는 종이는 네 삐삐 번호고, 이 번호로 내가 전화를 하면 이렇게 내 번호가 떠. 그러면 네가 옆에 있는 전화기로 나한테 전화를  수도 있고, 네 삐삐 번호로 전화를 걸면 내가 남긴 음성 메시지를 들을 수도 있어. 이 빨간 버튼이 전원, 이 화살표들로 시계랑 신호음 설정할 수 있어. 신기하지?”

신기하진 않았지만 위치추적은 안 된다니 안심은 되었다.

“고마워요. 잘 쓸게요. 그런데 타는 냄새 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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