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52. 계략, 실패, 다음 계략
지밀환 교수는 검은 십자가 사무실에서 우울한 표정으로 발목에 감긴 붕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계획했던 것들이 하나같이 틀어지고 있었다. 덕기는 유빈을 데려오는 데 실패했고, 창식을 독살하기로 돼 있는 백보연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오늘 아침 숨이 멎어가는 목소리로 덕기가 전화를 걸어왔다. 유빈을 납치하는 데 성공하기 직전, 케빈이 나타났다고 했다. 덕기는 케빈이 쏜 총에 맞았고, 케빈은그 길로 유빈을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덕기를 병원으로 이송할 사람을 보냈다. 유빈을 손에 넣고 창식과 거래하려던 계획이 성공 직전에 무산되었다. 사사건건 일을 방해하는 케빈도,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덕기도 못마땅했다.
다음 계획은 직접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두 번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창식의 오피스 와이프, 백보연을 이용해 창식을 암살하고 경영권자의 부재와 케빈의 디도스 공격으로 휘청거리는 프로텍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두 번째 계획을 진행하기 위해 해킹으로 알아낸 보연의 번호에 인사차 문자 메시지를 남겨보았다. 그런데 의외의 답장이 도착했다. 프로텍 건물 꼭대기 층, 그것도 콕 집어서 펜트하우스가 아닌 그 옆 공간으로 와달라고 했다.
만날 시간은 ‘오늘’이라고만 적혀있었다. 무슨 사정일까 고민하다가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보연 쪽도 무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래전에 자신이 직접 무택과 함께 설계했던 프로텍 사옥 꼭대기 층의 구조를 떠올려보았다. 지금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밀환이 프로텍에서 일하던 그때는 반은 직원들이 일하다가 지치면 잘 수 있는 공간, 나머지 반은 일을 마치고 놀 수 있는 공간이었다.
보연이 말한 펜트하우스는 밀환이 컴퓨터 앞에서 졸고 있는 직원들을 자고 오라고 올려보냈던 그곳, 보연이 와 달라고 한 펜트하우스 옆 공간은 프로텍 백신이 출시된 날, 그리고 프로텍이 상장된 날 무택과 함께 밤새워 술 마시던 그곳을 말하는 것 같았다.
옛 추억에 지밀환 교수의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지어졌다. 밀환은 프로텍 꼭대기 층에 어떻게 잠입할지 고민했다. 보연이 전화도 못 받을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 처해있다면 만나기로 한 장소의 문도 잠겨 있을 게 분명했다.
보연을 만나야 할 그 공간의 천장에 커다란 채광창(採光窓)이 설치돼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지난 날 친구와 나란히 누워 별을 보던 창문이었지만, 오늘은 그 친구가 빼앗아 간 자신의 것을 되찾기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채광창을 통해 바닥으로 떨어질 때 충격을 완화해줄 에어 메트리스를 준비했다. 서랍에서 창식에게 먹일 독이든 병을 꺼내 가방에 넣었다. 독을 어떻게 사용하게 될지 알 수 없었기에 가능한 모든 상황을 가정하며 면봉과 종이컵, 물도 챙겨 넣었다.
무엇을 더 준비해야 할지 고민하다 자신이 프로텍에 있는 동안 창식을 잡아 놓기 위해 한형석 형사에게 연락했다. 지난번 NBS 방송국 해킹 당시 프로텍 백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정보를 흘리며, 지금 출동해서 창식을 붙잡고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한형석 형사는 프로텍 경영자를 직접 상대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밀환이 약속한 성공 보수에 임무를 수락했다. 프로텍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밀환에게 한형석 형사가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곧 창식을 대면할 것 같다고 했다.
밀환은 조심스럽게 에어 메트리스가 들어있는 가방을 챙겨 들고 프로텍 건물 안으로 들어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비상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잠시 숨을 고르고 옥상 바닥을 살펴보았다. 찾고 있던 채광창을 밖에서 열 수 있는 손잡이가 보였다.
있는 힘껏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오랫동안 열지 않았는지 끼이익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채광창이 열리자 가방에서 에어 매트리스를 꺼내 바닥에 던지고 채광창을 통해 방 안으로 떨어졌다.
처참한 모습으로 결박당해 있는 보연이 보였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창식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보연이 창식의 오피스 와이프라는 것을 상기하며 가방에서 독과 면봉을 꺼내 보연의 입술에 꼼꼼히 바르고, 창식에게 키스하라고 했다. 창식이 죽어야 보연이 해독제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주지시켰다.
그러고 나서 검은 십자가 사무실로 돌아온 지 반나절이 지났다. 아직까지 보연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밀환은 사무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보연의 입술에 독을 발랐던 시간과 그 독이 체내에 흡수되어 작용하는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보연이 해독제를 먹지 않는다면 곧 중독되어 사망할 시각이었다.
‘먹이지 않고 입술에만 발랐으니 괜찮으려나?’
대답은 회의적이었다. 입술에 바른 독이 입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보연에게 사용한 독은 소량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는 맹독이었다. 일말의 희망을 갖고 보연에게 다시 전화해 보았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초조해진 밀환은 창식에게도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이 끝날 때까지 답은 없었다. 강박증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전화번호 목록을 뒤져 프로텍 부회장 비서실로 전화했다. 보연이 받길 간절히 소망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창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당황한 밀환의 입에서 어색한 인사말이 튀어나왔다.
“지밀환일세. 잘 지내나?”
대답은 없었다. 그대로 전화가 끊어졌다. 두 번째 카드도 실패로 돌아갔다. 창식은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채광창에서 떨어질 때 매트리스가 아닌 바닥에 찧었던 한쪽 발목이 쿡쿡 쑤셔왔다. 오랜만에 들어가 본 추억이 어린 공간이 창식에 의해 흉물스럽게 바뀌어 있었다는 것도 화가 났다.
한형석 형사가 창식을 붙잡아 놓는 데 성공했으니 약속한 보수를 달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케빈이 떠나고 팬텀 유통의 자금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급격하게 악화된 교단의 재정 상태가 생각났다. 왜 그렇게 많은 보수를 약속했는지 후회됐다.
밀환은 한숨을 쉬면서도 한형석 형사가 요구한 금액을 송금했다. 밀환에게는 세 번째 카드를 꺼내기 위해 아직 한형석 형사가 필요했다.
‘유빈과 케빈, 이 건방진 연놈들을 감옥에 집어넣는다. 유빈을 미끼로 창식과 다시 협상한다. 케빈은 영원히 감옥에서 썩게 내버려 둔다.’
한형석 형사에게 한 통의 이메일을 보냈다.
- 택시 살인사건 관련 증거
*
덕기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 밀환이 찾아왔다. 케빈이 쏜 총에 한쪽 어깨가 완전히 으스러져 팔 전체에 깁스를 하고 있는 덕기가 반대 손으로 침대를 짚으며일어났다.
“교주님 오셨습니까.”
“그래. 몸은 괜찮나?”
“수술은 잘 끝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보시다시피 많이 안 좋습니다.”
밀환을 따라 한 명이 더 들어왔다. 한형석 형사였다. 덕기와 한형석 형사가 서로 목례했다. 덕기가 침상에 걸터앉았고 밀환과 한형석 형사는 맞은편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밀환이 화제를 꺼냈다.
“자네를 그렇게 만든 게 케빈이었다고?”
덕기의 눈이 이글거렸다.
“네. 그렇습니다. 형사님. 꼭 좀 잡아주십시오.”
한형석 형사가 반사적으로 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들었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와 시간, 자세한 경위를 말씀해 주십시오.”
덕기가 지밀환 교수의 눈치를 살폈다. 사건의 발단이었던 지밀환 교수의 지시로 유빈을 납치하려고 했던 일을 말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덕기의 마음을 읽은 지밀환 교수가 말했다.
“괜찮아. 처음부터 말씀드리게.”
덕기가 차를 미끼로 유빈을 팬텀 유통 지하 주차장으로 유인했던 일, 그곳에서 유빈을 납치하려다 갑자기 나타난 케빈에게 총을 맞고 쓰러졌던 일을 차례로 털어놓았다. 꼼꼼히 메모하며 듣던 한형석 형사가 물었다.
“지하 주차장에 CCTV가 설치돼 있나요? 아니면 혹시 그 상황을 목격한 사람이있습니까?”
덕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새벽에 가까운 이른 아침이라 오가는 사람은 없었다. CCTV가 설치돼 있긴 하지만 팬텀 유통 내의 모든 CCTV 기록은 케빈이 직접 관리하는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기 때문에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지밀환 교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케빈, 감옥에 집어넣는 게 가능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