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1화 〉51. 유빈은 어디에 (51/70)



〈 51화 〉51. 유빈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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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식이 벌떡 일어서 의자를 걷어찼다. 의자 따위가 자신에게 해코지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의자한테 분풀이를 하고 의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지도 않은 채 집무실 소파로 가서 누웠다.

눈을 감고 오늘 일어난 사건들을 정리해보았다.

던젼에서 유빈을 멋대로 풀어준  비서를 결박해놓고 어떻게 고문할지 상상하고 있을 때 한 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었다. 회사 경비팀에게서  문자였다.

경찰이 프로텍을 찾아와 지난번 NBS 방송국 해킹 건과 관련해 수사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고 적혀있었다. 창식을 직접 만나길 원하며, 거부할 경우 압수 수색도 감행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는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케빈의 디도스 공격 이후에 뒤숭숭한 회사 분위기에 경찰의 압수 수색까지 당할 수는 없었다. 경찰이 NBS 해킹을 자신이 도왔다는  알고 있다면 그 문제 역시 복잡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한편으로는 경찰이 그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던젼에서 내려가 집무실에서 경찰들을 만났다. 찾아온 경찰은 둘이었다. 각각 자신을 한형석 형사와 강유리 경위라고 소개했다. 먼저 대화를 이끌어 나간 쪽은 사이버 수사대 소속이라고 밝힌 강유리 경위였다.
NBS 해킹 사건 당시 프로텍 백신이 오작동했다는 제보를 받았다고 말하며, 백신 프로그램 관리 기록을 내어 달라고 요청했다.

창식은 회사 기밀 자료를 내어달라는 요청에 속으로 코웃음 쳤다. 거절 의사를 표하고 돌아가 달라고 했다.

한형석 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창식의 손목을 잡아서 앉혔다. 무례한 손놀림에 창식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지만 한형석 형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협박을 늘어놓았다.

협조를 거부할 경우 사건을 검찰에 넘기고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하겠다고 했다. 프로텍 백신의 오작동에 고의성이 있었다면 관계자들이 형사 처벌될 수 있다고도 했다.

익숙지 않은 협박에 마음속으로 분노하면서도 창식은 상대가 경찰이라는 것을 되뇌며 자리에 앉아 다시 한번 자료를 내어줄  없다고 정중히 말했다.  뒤로 창식과 한형석 형사 사이에 같은 대화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한형석 형사는 백신 관리 기록을 달라고 했고 창식은 거부했다. 창식이 백 비서의 표정을 읽던 눈빛으로 한형석 형사의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태연한 척하기 위해 큰 얼굴 근육들에는 힘을 풀고 있지만 작은 눈가와 입 주변, 귀 옆의 작은 근육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긴장감.

 가지 이상한 점이  보였다. 창식이 거절할 때보다 한형석 형사가 자료를 달라고 말할 때 얼굴 근육이 훨씬 심하게 떨렸다.

-다른 목적.

벌써 한 시간 가까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창식이 거절할 때 오히려 긴장 징후가 약화되는 한형석 형사의 목적은 프로텍 백신 관리 기록 데이터를 받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 왜?’

창식은 머릿속으로 복잡한 퍼즐을 맞춰보았다. 한형석 형사는 유빈을 스토킹할 때 지밀환 교수에게 협조하던 사람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백신 오작동을 수사하기 위해 찾아온 경찰이 하필이면 한형석 형사라는 것이 미심쩍었다.

NBS 해킹 당시 프로텍 백신을 작동 중단시킨 사람은 창식 자신이었고, 그 외에 그 일을 아는 사람은 지밀환 교수 한 명이었다. 불쑥 찾아와 구태여 창식을 만나겠다는 이 경찰들의 뒤에 지밀환 교수가 있다는  분명해 보였다. 창식이 돌연 대화 중단을 선언했다.

“됐습니다. 이후의 수사는 저희 회사 법무팀에서 협조해 드리도록 조치해 놓겠습니다. 연락처 남겨 주시면 법무팀에서 전화 드릴 겁니다.”

한형석 형사의 관자놀이에서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가라앉았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창식을 따라 일어나며 집무실을 나가려는 창식을 붙잡았다.

“부회장님. 민유빈양 말입니다.”

창식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거부할  없는 키워드였다.

한형석 형사가 강유리 경위에게 부탁했다.

“강 경위님. 잠깐 저랑 부회장님, 따로 대화 나눠도 될까요?”

강유리 경위가 고개를 끄덕이고 집무실을 나갔다. 창식과 독대한 한형석 형사는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듯이 헛기침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민유빈 양  예쁘죠? 일전에 민유빈 양이 저희 경찰에 접수한 사건을 담당했었습니다.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창식이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늘어놓으며 한없이길어지려는 한형석 형사의 말을 잘랐다.

“요점만 말해.”

갑자기 달라진 창식의 말투에 당황한 한형석 형사가 다시 헛기침하며 말을 이어갔다.

“민유빈 양께서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고…….”

의도적으로 자신이 감질날 만한 단어만을 꺼내며 시간을 끌려는 한형석 형사에게 창식이 버럭 소리 질렀다.

“그래서 지금 민유빈 어디 있어?”
“부회장님 차근차근…….”

창식의 안광이 불타올랐다.

“단답형으로 대답해라. 지금 민유빈 어디 있어?”
“저, 일단 이 말씀을 드려야 민유빈 양 소재를…….”
“부회장님!”

창식이 휴대폰을 꺼내 들어 경호팀을 호출했다. 전화를 끊고 일어나 한형석 형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회사 밖까지 저희 경호 직원들께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형사님.”

한형석 형사는 잠깐 절망적인 표정을 짓더니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창식에게 굳이 경호원을 부를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그렇게 창식이 불쑥 찾아온 경찰들을 쫓아내고 던젼으로 돌아갔을  이상한 흔적들이 있었다. 분명 문을 잠그고 나갔지만 열쇠를 꽂고 돌렸을  잠금장치가 풀리는 느낌 없이 헛돌았다. 누군가 창식이 잠근 문을 열어 놓았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나갈 때는 없었던 먼지 덩어리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희미했지만 신발 자국도 찍혀 있었다. 그리고 가장 이상했던 건 갑자기 키스해 달라는  비서였다.

창식의 머릿속에서 남아있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한형석 형사가 시간을 끄는 동안 지밀환 교수 또는 그의 하수인이 던젼에 침입했다. 그리고 창식에게 위해를 가할 만한 함정을 파 놓았다. 아마도 백 비서의 입술에.

갑자기 키스해 달라고 애원하는 백 비서도 그들에게 협조하고 있었다. 건방진  비서의 따귀를 날리고 그대로 던젼을 나왔다. 음모를 밝혀내고 거기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창식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월감이 차올랐다.

소파에 누운 창식은 그 감정을 얼굴로 표현해보았다. 양쪽 입꼬리를 번갈아가며 씰룩거렸다. 잠시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던 얼굴 근육이제자리로 돌아갔다.

회사 경영을 시작하면서 배운 페이스 시그널(Face signals)을 읽는 기술은 유용했다. 처음에 다른 사람들이 얼굴 근육을 움직여 감정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신기했다.

그러다 그 움직임이 통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땐 우월감이 느껴졌다. 자신과는 다르게 몸에 붙어있는 근육 몇 개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거울 앞에서 시험해보았다. 창식은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든 원하지 않을 때는 얼굴 근육을 움직이지 않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실제로 느끼는 감정과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권의 책을 구입해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느낄 때 어떤 얼굴 근육을 움직이는지 공부하고, 의도적으로 그 표정을 짓는 연습을 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읽으면서 자신의 감정은 숨기거나 거짓된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훌륭한 기술을 터득해 나갔다.

공부했던 표정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표정이었다. 상대에 대한 우월감을 드러내는 표정이라고 책에 쓰여 있었다. 다시 한번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내려 보았다. 만족스러웠다.



*




지밀환 교수는 검은 십자가 사무실에서 우울한 표정으로 발목에 감긴 붕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계획했던 것들이 하나같이 틀어지고 있었다. 덕기는 유빈을 데려오는 데 실패했고, 창식을 독살하기로  있는 백보연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오늘 아침 숨이 멎어가는 목소리로 덕기가 전화를 걸어왔다. 유빈을 납치하는 데 성공하기 직전, 케빈이 나타났다고 했다. 덕기는 케빈이 쏜 총에 맞았고, 케빈은  길로 유빈을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덕기를 병원으로 이송할 사람을 보냈다. 유빈을 손에 넣고 창식과 거래하려던 계획이 성공 직전에 무산되었다. 사사건건 일을 방해하는 케빈도,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덕기도 못마땅했다.

다음 계획은 직접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두 번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창식의 오피스 와이프, 백보연을 이용해 창식을 암살하고 경영권자의 부재와 케빈의 디도스 공격으로 휘청거리는 프로텍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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