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50. 핏기를 머금은 줄
무슨 의미였을까? 평소에 왕창식 부회장이 자주 하던 말은 아니었다. 유빈에 대한 왕창식 부회장의 광적인 집착을 생각해보면 말 그대로 오늘 백 비서를 죽이겠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백 비서는 유빈처럼 도망쳐버릴까 생각했지만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았다. 어디로 도망가든 왕창식 부회장은 자신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백 비서가 공포에 떨고 있을 때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다.
왕창식 부회장이 보낸 문자인가 싶어 서둘러 확인했지만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문자의 첫머리에서 발신인지 자신을 소개했다.
- 지밀환 교수입니다. 긴히 드릴 부탁이 있는데 잠깐 뵐 수 있을까요?
백 비서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도움을 청해야 했다. 왕창식 부회장의 지도교수, 왕무택 회장의 친구, 프로텍 초기 설립자 중 한 명. 이 사람이라면 자신을 구해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답장 탭을 누르고 메시지를 입력했다.
- 오늘 프로테크놀로지 사옥 맨 위층 펜트하우스 옆에 있는 공간으로 와주세요.
펜트하우스 옆에 있는 공간, 던젼. 왕창식 부회장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면 오늘 백 비서가 갇힐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 어쩌면 왕창식 부회장의 말처럼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다시 백 비서의 휴대폰이 울렸다. 기대와는 달리 지밀환 교수가 아니라 왕창식 부회장이 보낸 문자였다.
- 5분 준다. 그 안에 내 앞에 낯짝 내밀어.
백 비서의 얼굴이 굳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회사로 돌아갔다. 부회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백 비서는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죄송합…….”
하지만 백 비서의 첫 사과가 끝나기도 전에 왕창식 부회장이 백 비서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 뒤로 왕창식 부회장은 주먹질과 발길질까지 해 가며 한참동안 백 비서를 구타했다.
무릎을 꿇고 있던 백 비서가 옆으로 쓰러졌다. 장발인 그녀의 머리가 얼굴을 뒤덮었다. 왕창식 부회장은 그러고도 분이 덜 풀렸는지 백 비서의 머리채를 잡고 던젼으로 끌고 올라갔다.
백 비서가 옷을 벗고 모시겠다고 애원했지만 왕창식 부회장은 그대로 백 비서를 틀에 결박했다. 그리고 단도(短刀)를 가져와 백 비서의 옷을 북북 찢어발겼다.
옷이 하나씩 찢겨 나갈 때마다 공포에 사로잡힌 백 비서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옷이 하나씩 찢겨 나가고 살갗에 칼날이 스칠 때마다 왕창식 부회장이 자신을 죽이겠다는 말은 농담도, 과장도, 비유도 아닌 말 그대로의 의미라는 것이 느껴졌다.
옷이 모두 찢겨 나간 뒤 백 비서가 왕창식 부회장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초식 동물의 숨통을 어떻게 끊어놓을지 고민하는 맹수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으로 왕창식 부회장은 백 비서의 눈에 안대를 씌우고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 유두를 낚싯줄로 묶었다.
음핵에도 낚싯줄을 감으려고 했지만 긴장과 공포에 음핵이 쪼그라들어 낚싯줄이 잘 묶이지 않자 음핵에 진공컵을 씌우고 공기를 빨아들였다. 백 비서의 음핵이 강제로 팽창했다. 왕창식 부회장은 만족스러운 맹수의 표정으로 백 비서의 가장 예민한 부위에 낚싯줄을 감았다.
왕창식 부회장이 다음 작업에 착수하려고 할 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하려는 일을 방해받은 왕창식 부회장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잠시 후, 눈이 가려져 잔뜩 민감해진 백 비서의 귀에 던젼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백 비서는 몇 시간째 허리를 펴지도 못하는 상태로 유두와 음핵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 속에 방치돼 있었다.
*
끼이익-.
털썩-. 턱-.
터걱터걱-.
끼이익-.
백 비서의 귀에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잘 열리지 않는 문을 열고 무언가를 던지고 그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몇 걸음 걸어갔다. 열렸던 문이 다시 닫혔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안대가 씌워진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왕창식 부회장이었을까?
“주인님?”
“부회장님?”
대답 대신 귀 바로 옆에서 쉿-. 하는 소리가 들렸다. 왕창식 부회장이 아닌 것 같았다. 백 비서는긴장감에 마른 침을 삼켰다. 입술에 촉촉한 무언가가 닿았다. 침입자는 꼼꼼하게 백 비서의 입술에 알 수 없는 액체를 발랐다. 백 비서는 누군지 알고 싶었다. 안대를 벗겨달라고 말하려고 입술을 벌렸다.
침입자가 급하게 제지했다.
“안 돼. 입술 움직이지 말게.”
백 비사가 입을 다물었다. 귓불에 침입자의 숨결이 느껴졌다.
“방금 자네 입술에 바른 거 맹독이네. 절대로 삼키지 말고 왕창식이 오면 키스하게. 명심하게. 왕창식이 죽어야 자네도 살고 나도 사네. 자네 꼴을 보아하니 왕창식한테 심하게 당했구먼. 우리 여기서 깔끔하게 끝내는 걸로 하세.”
침입자가 백 비서의 안대를 벗겼다. 백 비서의 눈이 빛에 적응하자 지밀환 교수의 모습이 보였다.
지밀환 교수가 백 비서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점심에 문자 주고받았던 지밀환 교수일세. 성공하면 나한테 전화하게. 해독제를 줌세.”
백 비서는 허리와 유두, 음핵의 통증을 견디며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독이 발라져 있는 입술로 왕창식 부회장에게 키스해서 그를 제거한다. 성공하면 지밀환 교수에게 해독제를 받는다. 실패하면?’
백 비서는 지밀환 교수에게 반문하려고 했지만 독이 발라져 있는 생각에 함부로 입술을 움직일 수 없었다.
지밀환 교수가 다시 백 비서의 눈에 안대를 씌웠다. 시각이 가려지고 청각이 예민해졌다. 터걱터걱-. 덜컥-. 턱-. 걸음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닫혔다. 지밀환 교수가 던젼을 나갔다.
어둠과 고통 속에서 백 비서의 시간 감각이 왜곡되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왕창식 부회장이 던젼으로 돌아와 백 비서에게 폭언을 내뱉었다.
“아직도 버티고 있나? 꼴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건 소중한가 보지?”
백 비서는 침착하려고 애쓰며 왕창식 부회장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주인님, 한 번만 키스해주세요. 부탁드려요.”
창식이 백 비서의 턱을 잡아 올리고 안대를 올렸다. 갑작스럽게 마주친 시선을 당황스러워하며 백 비서가 고개를 돌렸다. 왕창식 부회장이 백 비서의 턱을 잡아당겨 억지로 눈을 맞췄다.
“다시 말해봐.”
백 비서의 눈빛이 흔들렸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키스해 주세요.”
창식의 시선이위에서 아래로 백 비서의 얼굴을 스캔했다. 좁아진 미간, 굳은 눈가, 떨리는 입술 끝, 경직된 턱. -거짓말할 때 또는 숨기는 게 있을 때 나타나는 표정. 얼굴 근육 몇 개도 마음대로 못 움직이는 하등 동물. 창식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우월감.
백 비서가 떨리는 입술을 내밀었다. 창식도 입술을 내밀었다. 이대로 끝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백 비서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다음 순간 턱을 쥐고 있던 창식의 손이 백 비서의 뺨을 올려붙였다.
백 비서의 몸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낚싯줄이 끊어질 듯 당겨졌다. 유두에서 느껴지는 격한 고통에 백 비서가 숨을 헐떡였다. 매듭이 풀어졌길 바라며 가슴을 내려다보았지만 단단하게 묶인 매듭은 오히려 살 안으로 파고들 뿐이었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기울어진 몸을 가운데로 옮겼다. 입에서 제어할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백 비서의 정면에 자신의 몸에 연결된 나온 낚싯줄이 고정된 갈고리가 보였다. 시야가 흐려지며 갈고리의 개수가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두 개, 네 개, 다시 두 개.
그러다 사라졌다.
창식이 도로 안대를 내리고 백 비서를 그대로 방치해둔 채 던젼을 나갔다.
신음 소리가 작아지고 백 비서의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입가에는 입술에서 흘러든 독을 거부하듯 한 줄기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백 비서의 몸이 앞으로 푹고꾸라지며 멍든 얼굴이 바닥에 닿았다. 핏기를 머금은 낚싯줄이 예민한 부위들을 해방시키며 튕겨져 나갔다.
*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창식이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힌 채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허리가 점점 뒤로 넘어가고 발이 책상 위로 올라갔다.늘 앉던 의자였지만 평소보다 뒤로 더 많이 젖혀지는 것 같았다.
의자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고 의자 전체가 뒤로 기울어지다 바닥에 닿아있던 바퀴가 공회전했다.
의자가 창식을 끌어안고 바닥에 나뒹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