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49. 그 자가 스토커, 맞죠?
이마를 감싸 쥐고 생각에 잠겼다. 이제 와서 유빈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창식도, 지밀환도 유빈을 노리고 있었다. 창식을 제압하기 위해 프로텍에 디도스 공격을 가했지만, 프로텍이 입은 심대한 타격에도 창식은 케빈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십 년 만에 만난 동생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오늘 유빈을 납치하는 데에 실패한 덕기와 지밀환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위협이나 납치보다 훨씬 치밀한 방식으로 유빈을 옭아매 이용하려고 들 것이었다.
창문으로 드리워지는 햇빛의 색깔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때 유빈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케빈은 걱정스러운 손길로 유빈의 체온과 맥박, 호흡을 확인해보았다. 다행히 특별한 이상 징후는 없었다. 체온은 자신과 비슷했고 맥박과 호흡도 안정적이었다.
화장실로 가 수건을 물에 적혀 와 유빈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고 땀에 젖어 얼굴 여기저기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유빈의 입술이 움찔했다. 놀란 케빈이 유빈의 입가를 바라보았다.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더워.”
케빈이 안도하며 참았던 숨을 내쉬고 유빈이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주었다. 유빈은 이리저리 뒤척이다 케빈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옆으로 누웠다. 케빈이 자신도 모르게 유빈의 몸이 그리는 선을 눈으로 따라갔다.
허벅지까지 내려갔던 케빈의 시선이 다시 올라와 유빈의 얼굴에 도착했을 때 유빈이 눈을 뜨고 있었다. 케빈과 유빈의 눈이 마주쳤다. 케빈은 허둥지둥 변명을 시작했다.
“어깨에 손만 올렸는데 기절할 줄은 몰랐어. 내 손이 많이 차가웠나? 위치 추적을 하긴 했는데 이번엔 정말 어쩔 수 없었어. 진짜야. 내가…….”
몽롱한 상태의 유빈은 케빈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시야 탓에 케빈의 얼굴도 희미하게 보였다.
그래도 유빈은 케빈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평소답지 않게 수다스럽게 움직이던 케빈의 입술이 닫혔다. 유빈이 눈을 깜박여 시야를 회복했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케빈의 모습이 보였다.
“스토커 아니죠?”
케빈이 지체 없이 대답했다.
“아니라니까.”
“왕창식 부회장이 스토커 맞죠?”
“맞다니까.”
잠시 후 둘은 서로를 보고 이유 없이 웃어버렸다. 케빈의 말투에 조금 전 수다스럽던 모습과 평소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섞였다.
“너 저번에 내가 말할 때는 뭘 듣고, 믿지도 않고 나보고 스토커라고 하고 막 그러더니 이제 알았어? 그래, 내가 말할 때는 못 믿다가, 어떻게 알게 됐는지나 물어보자. 나 말고 누가 말해줬길래 믿는 건데?”
“누가 말해준 건 아니에요.”
유빈이 며칠 동안 프로텍 펜트하우스에 머물렀던 이야기를 케빈의 집에 살 때와 비교하며 털어놓았다. 통금이 있었고, 통금을 어기자 방에 감금되었다. 통금이나 감금 모두 케빈의 집에 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왕창식 부회장이 유빈을 대하는 태도도 이상했다. 때가 되면 먹을 것을 가져다줬지만 같이 식사를 한 적도, 감정을 나누며 대화한 적도 없었다. 스토커가 원격으로 유빈에게 지시를 내릴 때의 태도 그대로였다. 마치 애완동물 혹은 가축을 대하는 것 같았다.
정확히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왕창식 부회장을 볼 때마다 느껴졌던 음험한 분위기도 있었다. 유빈의 말을 들은 케빈은, 다행히 프로텍에서 유빈이 험한 일은 당하지 않았다는 데에 안심하며 유빈을 안아주었다.
유빈은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했지만 밀쳐내지는 않았다. 포옹이 길어졌다. 유빈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케빈의 어깨에 기대었다. 유빈이 안긴 채로 유빈이 물었다.
“김덕기 상무님은 어떻게 되셨어요?”
케빈이 유빈의 등을 토닥이며 답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이제 네 앞에 안 나타날 거야.”
유빈의 팔이 케빈의 어깨를 감쌌다.
유빈의 손길을 느끼며 케빈이 오래된 질문을 다시 물었다.
“나 아직 짝사랑 중이야?”
*
프로텍 사옥 꼭대기 층 던젼. 성인 남성 키보다 큰 ‘X’자 모양의 틀에 알몸의 백보연 비서가 퉁퉁 부은 얼굴에 안대까지 착용한 채로 묶여있었다. 몸 곳곳에 멍도 보였다. 쫙 벌어진 다리 끝의 양쪽 발목은 틀의 아래쪽에 단단히 동여매어져 있었고, 양팔은 등 뒤로 젖혀져 손목에 채워진 수갑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허리는 90°로 굽혀져 있었는데, 몇 시간째 펴지도 굽히지도 못하고 있었다.
백 비서는 끊어질 듯한 허리 통증에 상체를 조금 비틀어 보았지만 곧 후회했다. 백 비서의 양쪽 유두와 음핵에는 낚싯줄이 단단한 매듭으로 감겨져 있었다. 백 비서의 몸에서 시작된 낚싯줄은 팽팽하게 당겨져 반대쪽 벽에 튀어나온 갈고리에 걸려있었다.
백 비서가 허리를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할 때마다 낚싯줄은 보연의 유두와 음핵을 사정없이 잡아당기며 파고들었다. 여성의 가장 예민한 부위들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은 허리의 통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백 비서의의 유두와 음핵이 푸르스름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백 배서는 자신이 피학성향을 갖고 있다는 걸 상기하며 오르가즘을 느끼려고 시도해보았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쾌락은 느껴지지 않았다. 몸은 오로지 고통에 지배당하고 있었고, 마음은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침에 유빈을 만나고 나서 울적해진 기분 탓에 혼자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던 백 비서는 왕창식 부회장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걸려왔다. 백 비서가 전화를 받자마자 왕창식 부회장은 실성한 사람처럼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백 비서는 샌드위치가 얹혀버린 것 같은 기분 속에 왕창식 부회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았다. 펜트하우스 문이 열려 있었고, 그 안에 있던 유빈이 사라졌다고 했다. 왕창식 부회장은 당장 회사로 들어오라고 윽박질렀다.
휴대폰을 내려놓은 백 비서는 입안의 샌드위치를 삼키지도 못한 채 아침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유빈을 만나고 펜트하우스에서 나왔을 때까지의 기억은 선명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순간의 기억이 희미했다. 문을 잠갔는지 아닌지 기억나지 않았다. 열쇠를 꽂았던 기억은 있었지만 문을 열 때의 기억인지 문을 닫을 때의 기억인지 혼란스러웠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정말로 잠그지않았다면, 왜? 단순한 실수였을까?’
유빈이 펜트하우스에 들어오고 난 후, 백 비서의 심정은 복잡했다. 처음에 느꼈던 감정은 자신이 모시는 왕창식 부회장의 마음을 가져간 유빈에 대한 질투였지만, 그 뒤에 보게 된 왕창식 부회장의 유빈을 향한 비인간적인 욕망에 대해서 서서히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뒤로 자신이 갖다 주는 음식을 먹으며 펜트하우스에 감금된 유빈에 대한 동정심이 따라왔다.
그리고 곧 지금 자신이 있는 이곳, 던젼으로 끌려와 성향에 맞지 않는 행위들을 당하며 고통에 몸부림 칠 유빈의 모습을 떠올리며 연민을 느꼈다. 질투, 연민, 동정. 문을 잠그지 않은 게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면 어떤 감정 때문이었을지 고민해보았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였든, 의식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 백 비서가 유빈에게 베푼 친절은 화살이 되어 백 비서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전화를 끊기 전 왕창식 부회장이 경고했다.
“넌 오늘 죽어.”
무슨 의미였을까? 평소에 왕창식 부회장이 자주 하던 말은 아니었다. 유빈에 대한 왕창식 부회장의 광적인 집착을 생각해보면 말 그대로 오늘 백 비서를 죽이겠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백 비서는 유빈처럼 도망쳐버릴까 생각했지만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았다. 어디로 도망가든 왕창식 부회장은 자신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백 비서가 공포에 떨고 있을 때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다.
왕창식 부회장이 보낸 문자인가 싶어 서둘러 확인했지만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문자의 첫머리에서 발신인지 자신을 소개했다.
- 지밀환 교수입니다. 긴히 드릴 부탁이 있는데 잠깐 뵐 수 있을까요?
백 비서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도움을 청해야 했다. 왕창식 부회장의 지도교수, 왕무택 회장의 친구, 프로텍 초기 설립자 중 한 명. 이 사람이라면 자신을 구해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답장 탭을 누르고 메시지를 입력했다.
- 오늘 프로테크놀로지 사옥 맨 위층 펜트하우스 옆에 있는 공간으로 와주세요.
펜트하우스 옆에 있는 공간, 던젼. 왕창식 부회장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면 오늘 백 비서가 갇힐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 어쩌면 왕창식 부회장의 말처럼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다시 백 비서의 휴대폰이 울렸다. 기대와는 달리 지밀환 교수가 아니라 왕창식 부회장이 보낸 문자였다.
- 5분 준다. 그 안에 내 앞에 낯짝 내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