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48. 탈출, 그리고 총성
백 비서가 나간 뒤 유빈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만 들렸고 잠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젯밤 왕창식 부회장이 밖에서 문을 잠갔을 때 났던 가슴 내려앉는 소리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심호흡하고 손잡이를 돌렸다. 돌아갔다. 백 비서가 유빈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었을까? 유빈은 연달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쉬면서 침착을 유지했다. 문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놓았다.
혹시나 누가 들을까, 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다시 펜트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짐을 챙겼다. 신발을 단단히 신고 다시 손잡이를 돌렸다. 손잡이가 완전히 돌아갔다. 몸으로 힘껏 문을 밀어젖혔다. 문이 열렸다.
당장이라도 이 건물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굳은 얼굴의 근육들을 억지로 펴 누군가를 마주칠 때를 대비해서 미소를 짓는 연습도 했다. 도망가는 게 아니라 외출하는 것처럼 엘리베이터를 탔다.
펜트하우스에서 로비층으로 직행하게 설계돼 있는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내려갔다. 로비층에 도착하고문이 열렸다. 달음박질치려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연습한대로 얼굴엔 미소를 띠고 자연스럽게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건물 출구에 가까워질수록 심장박동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지난밤에 한숨도 못 자 악화된 몸 상태 때문이었을까, 재채기가 나오려고 했다. 참으려고 했지만 코를 비집고 나오는 재채기를 나올 방법은 없었다. 잠시 막혔던 재채기가 평소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터져 나왔다.
“넷취!”
유빈은 자신의 재채기 소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로비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재채기 소리를 듣고 자신을 쳐다볼 것 같았다.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처음 보는 오피스룩의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유빈이 열심히 연습했던 미소는 지어지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볼 근육에 꽉 붙들린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여자는 유빈을 그대로 지나쳐갔고 의도치 않게 유빈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굳은 표정의 종종걸음. 누가 봐도 도망치는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을 때 유빈이 프로텍 건물을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없었다. 오로지 프로텍에서, 왕창식 부회장에게서 멀어져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가 스토커였다.
달리는 유빈의 눈에 마주 오는 택시가 보였다. 택시에 좋지 않은 기억이 남아있었지만 그것보다 프로텍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멀어지는 게 우선이었다.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았다. 유빈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택시 기사가 유빈에게 물었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떠오르는 목적지는 없었다. 택시 기사가 한 번 더 물었다.
“손님? 어디 가세요?”
그때 가방에서 유빈의 휴대폰이 울렸다. 자동차 보험회사에서 온 문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자동차 수리가 완료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차량은 팬텀 유통 지하 주차장으로 이송해 두었다고 했다.
유빈은 행운이 따라준다고 생각했다. 계속 택시를 타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비용 문제뿐만 아니라, 왕창식 부회장이 보낸 사람이 택시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유빈의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었다. 자신의 차가 필요했다.
메시지를 다시 읽으며 누가 자신의 차를 수리해 두었는지, 왜 수리된 차가 팬텀 유통에 있는지 잠깐 궁금해졌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수리는 차를 놓아둔 마트에서 의뢰했을 수도 있고, 보험회사에서 훼손된 차를 발견하고 수리해 두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 자신의 차가 팬텀 유통에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팬텀 유통에서 지급받은 차였으니까.
유빈은 가방에서 자동차 열쇠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 택시 기사의 물음에 대답했다.
“팬텀 유통 본사로 가주세요.”
자신의 입에서 나온 팬텀 유통이라는 말에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입사 동기 미정이, 재무팀 박 대리님, 영업1팀 팀장님, 황 대리님, 케빈, 김덕기 상무까지. 각각의 얼굴 뒤에 복잡한 감정이 따라붙었다.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의 홍수 속에서 유빈은 그들 중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지하주차장에서 자신의 차를 갖고 나오는 것이 유빈의 목표였다. 제발 아무도 나타나지 않길 간절히 기도했다.
유빈은 팬텀 유통에 도착한 택시에서 내려 프로텍에서 나올 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지하로 내려갔다. 주차장에 도착해 고개를 휙휙 저어 자신의 차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안쪽으로 들어가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저 멀리 주차장 구석에 자신의 차 범퍼가 보였다. 바로 옆 칸에 주차된 커다란 검은색 승합차에 가려져 있었다. 유빈은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리모컨으로 문을 열었다. 운전석 쪽 문손잡이를 당기자 익숙한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덜컥―.
바로 뒤이어 유빈의 차가 아닌 다른 차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그리고 유빈이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뒤따랐다.
“민유빈. 거기까지.”
고개를 든 유빈이 차를 사이에 두고 검은색 승합차에서 내린 덕기와 마주했다. 팔에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덕기가 유빈에게 권총을 겨눴다. 유빈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호흡은 목구멍에서 턱턱 막혀왔고, 단어는 혀끝에서 뭉개졌다.
덕기가 눈짓으로 총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랑 같이 가줘야겠어.”
유빈이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물었다.
“왕창식 부회장님이 보내셨나요?”
덕기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이번엔 진짜 아니야.“
탕―
갑자기 들려온 총소리에 유빈은 양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주저앉았다. 공포에 질려 눈을 뜨지도 못한 채 감각을 곤두세웠다. 무의식적으로 가장 아픈 곳이 총에 맞은 자리일 거라고 생각하며 온몸의 신경을 하나하나 더듬었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눈을 감고 한껏 예민해져 있는 유빈의 귀에 굵직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유빈은 그 소리가 자신의 목에서 나는 거라고 생각하며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입을 막았는데도 신음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다.
마치 강박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손바닥으로 입술을 짓뭉갰다. 치아에 찍힌 입술 안쪽에서 피가 새어 나오며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자동차와 벽 사이에서 웅크리고 있는 유빈의 뒤에서 한 남자가 다가와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유빈이 소스라치며 벌떡 일어서 뒤를 돌아봤다. 아직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시야가 흐려졌다. 벽이 유빈을 향해 성큼 다가오더니 바닥이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유빈의 눈이 감았다. 다시 뜨려고 했지만 오랜 긴장에 억눌린 눈꺼풀은 다시 올라가지 않았다.
유빈의 뒤에 서 있던 케빈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쓰러진 유빈과 덕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신이 쏜 덕기가 쓰러질 것은 예상했지만 손만 닿은 유빈이 정신을 잃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유빈을 안아 들고 자신의 차 뒷좌석에 태웠다.
아직 의식을 잃지 않은 덕기에게 다가갔다. 총알이 박힌 덕기의 어깨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덕기가 굵직한 신음을 흘리며 고통에 찬 눈으로 자신을 쏜 케빈을 쳐다보았다.
“살려줘.”
케빈이 아직 채 분노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덕기를 마주했다.
“죽을 자리에 쏘진 않았어. 지밀환한테 가서 똑바로 전해. 한 번 더 유빈한테 해코지하면 너도 지밀환도 끝이야.”
덕기는 대답하려고 했지만 입에서는 말 대신 격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케빈은 유빈을 태운 차로 돌아가 팬텀 유통 주차장을 나갔다. 가까운 병원으로 가 유빈의 상태를 물었다. 간단한 검사를 시행한 의사는 과도한 스트레스로 잠시 기절한 것 같다고 했다. 추가적인 검사와 환자의 안정을 위해서 입원을 권했지만 케빈은 병원에 오래 머무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창식도, 지밀환도 유빈을 노리고 있었다. 총기까지 등장했다. 케빈은 퇴원하겠다고 말하고 유빈을 다시 차에 태워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케빈이 침대에 유빈을 눕힐 때까지 유빈은 깨어나지 않았다. 케빈은 유빈의 머리 밑에 베개를 고여 주고 이불을 덮어준 뒤 의자 하나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았다.
의식 없는 유빈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죄책감이 느껴졌다. 일이 너무 커져버렸다. 단순한 장난처럼 시작했던 스토킹은 유빈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지밀환이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막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