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47. 가학의 공간
태식이 유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는 동안 케빈이 태식에게 스피커폰을 켜라고 타박했다. 신호음이 멈추고 유빈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유빈 씨?”
케빈이 태식의 휴대폰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 댔다. 유빈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흐느끼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태식이 다시 유빈을 불러보았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케빈이 무어라 말하려고 했지만 목젖에 턱 걸린 것처럼 단어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유빈 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 케빈이 다시 태식을 채근했다.
“술 마시면서 무슨 일 있었어?”
“그냥……, 저희 학교 무너져 가는 도서관에서 목숨 걸고 공부하던 이야기했어요.”
케빈이 괴로운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태식의 휴대폰이 울렸다. 당장 회사로 들어오라는 팀장님의 문자메시지였다. 태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케빈에게 인사했다.
“하이데스님 만나서 영광이었습니다. 다음에 덜 바쁠 때 다시 봬요. 지금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네요.”
케빈이 대답 대신 자신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태식을 향해 툭 던졌다.
“네 번호 찍어 놔. 연락할 테니까.”
태식이 케빈에게 번호를 주고 회사로 돌아갔다. 케빈은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맥주 한 병을 더 샀다. 뚜껑을 잡고 힘껏 돌렸지만 열리지 않았다. 병따개가 필요한 제품이었다. 손가락에 찍힌 뚜껑 자국을 보며 병을 탁 소리 나게 올려놓았다.
유빈이 프로텍에 있다고 했다. 유빈과 창식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휴대폰 너머의 유빈이 울고 있었다.
프로텍으로 돌아가 창식의 멱살이라도 잡아볼까 생각했지만 무의미한 일이었다. 디도스 공격을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지만 괜히 창식을 자극하는 일이 될 것 같았다.
휴대폰을 화면을 이리저리 넘겨보았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 프로텍에 디도스 공격을 감행하고 창식을 찾아갔던 게 유빈을 데리고 있는 창식을 화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뾰족한 병뚜껑에 찍힌 손이 쓰라려 왔다. 맥주병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쳐 박고 다시 편의점으로 들어가 캔 맥주 하나를 사서 들이켰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유빈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주라는 왕창식 부회장이 지시를 받은 백 비서가 펜트하우스 초인종을 눌렀다. 대답은 없었다. 아직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유빈이 잘 있는지 확인하라는 지시도 같이 받았기에 백 비서는 왕창식 부회장에게서 받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제일 먼저 침대를 확인했다. 유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백 비서가 이불을 들쳐보았다. 유빈이 침대 위에 없었다. 유빈을 찾기 위해 황급히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던 백 비서가 침대 뒤에 얼굴만 내놓고 숨어있던 유빈과 눈이 마주쳤다. 놀란 백 비서가 손에 들고 있던 이불을 떨어뜨렸다.
유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백 비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울었는지 눈 주변이 부어있었고 눈가에는 하얀 눈물 자국도 나 있었다. 백 비서는 유빈을 부축해 침대 위에 앉히고 자신도 그 옆에 앉았다.
유빈은 불안한 듯 허벅지 밑에 손을 깔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로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두 여인 사이에 약간의 어색함과 긴장이 흘렀다. 백 비서가 고개를 돌려 유빈을 바라보았다.
턱선에서 멈춘 단발머리의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난번에 느꼈던 질투보다는 같은 여자로서 측은함이 앞섰다. 한쪽 팔을 들어 유빈의 어깨를 감쌌다. 유빈은 저항하는 대신 백 비서에게 자신의 어깨를 기대었다.
유빈의 어깨에서 전해지는 떨림을 느끼며 백 비서는 펜트하우스의 한쪽 벽을 응시했다.
벽 너머에는 던젼이라 불리는, 자신과 몇몇 성 노예들이 왕창식 부회장을 모시는 공간이 있었다. 오로지 왕창식 부회장 개인의 욕정을 채우기 위해 온갖 도구들을 갖고 벌어지는 상상할 수 없는 가학(加虐)적 행위들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백 비서가 던젼에 처음 들어갔던 날, 벌거벗은 채로 뒷짐을 지고 있는 백 비서에게 왕창식 부회장이 물었다. 지금까지 몇 명의 남자와 잤냐고. 난데없는 과거 추궁에 백 비서는 머뭇거렸고, 왕창식 부회장은 가차 없이 백 비서의 따귀를 때렸다.
같은 질문이 반복되었고 백 비서는 그때까지 두 분의 주인님을 모셨고, 한 번의 평범한 연애를 했다고 털어놓았다. 대답을 들은 왕창식 부회장은 지난 더러운 자국들을 깨끗이 소독해야 한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던 백 비서는 곧 왕창식 부회장의 지시에 따라 저항할 수 없는 자세로 결박당했다. 무릎 꿇고 엎드린 채로 왼쪽 손목은 당겨져 왼쪽 발목에, 오른쪽 손목은 오른쪽 발목에 묶였다. 얼굴은 바닥에 푹 파묻혔고 뒤쪽으로 중요한 구멍들이 훤히 벌려져 드러났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보았지만 정교하게 묶인 로프가 살을 파고들 뿐이었다. 무릎을 굽혀 엉덩이를 내릴 수는 있었지만 그때마다 왕창식 부회장의 매질이 가해졌다. 다리를 벌리고 엉덩이를 치켜든 백 비서의 뒤에서 왕창식 부회장이 다가왔다.
손에는 예리하게 벼려진 면도칼이 들려있었다. 안전장치는 달려있지 않았다. 백 비서의 성기와 항문 주위에 면도 크림을 바르고 경고했다.
“중요한 부위 긁히고 싶지 않으면 움직이지 마.”
왕창식 부회장의 손에 들린 날이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백 비서의 털을 하얗게 면도했다. 왕창식 부회장이 뒤로 물러서면서 자신이 면도해 놓은 곳을 만족스러운 듯이 감상했다. 안도감에 자신도 모르게 백 비서의 엉덩이가 조금 내려갔다.
왕창식 부회장은 지체 없이 백 비서에게 매질을 가했고 엉덩이는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 뒤로 본격적인 ‘소독’이 시작되었다.
왕창식 부회장은 라텍스 장갑을 끼고, 치약을 듬뿍 묻혀 백 비서의 음핵에 문질러 발랐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살갗에 닿은 치약의 느낌은 강렬했다. 살이 타는 것 같았다.
음핵이 하얗게 번들거릴 때까지 치약을 문지른 왕창식 부회장은 손가락에 치약을 발라 백 비서의 질을 유린했다. 무자비한 손가락은 항문 안까지 파고들었다. 손가락이 움직이며 구석구석 치약을 펴 바를 때는 신음도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그저 고통으로 숨이 막혀왔다.
한참 동안 백 비서는 그렇게 움직이지도 못한 채 몸 안쪽부터 쓰라려 오는 고통 속에 방치되었다. 치약이 주는 쓰라림이 조금씩 줄어들고 약간의 쾌감이 느껴질 때 왕창식 부회장은 백 비서의 손과 발을 묶은 로프를 풀고 던젼 안에 마련된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백 비서에게 같은 자세를 취하게 하고 물의 온도를 조정했다. 백 비서는 화장실 바닥 타일에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치약을 씻어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안도했다.
하지만 뜨거운 물이 닿자 치약은 다시격렬하게 반응하며 여린 살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처음 치약이 발라졌을 때보다 훨씬 더 심한 고통에 백 비서는 몸부림쳤다.
‘어떻게 치약을 그렇게 쓸 생각을 했을까?’
백 비서는 자신과 같은 특별한 성향이 아니라면, 보통의 여자가 왕창식 부회장의 상상력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름 강한 성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백 비서조차 그곳에서 적응하는 데에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본인은 아직 모르겠지만 유빈은 곧 그곳으로 들어갈 것이었다. 왕창식 부회장이 유빈에게 피학(被虐)적 성향이 없다는 걸 생각해줄지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회의적이었다.
유빈이 프로텍에 들어온 후 요 며칠 간 왕창식 부회장이 보여준 자기중심적 태도는 오랫동안 그를 모셔온 백 비서마저 경악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유빈한테 피학적 성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러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백 비서의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점이 찍혔다. 유빈의 눈물이었다. 백 비서가 유빈의 어깨를 토닥이며 물었다.
“필요한 물건 있어요? 옷이라든가. 부회장님께서 사다 주라고 하셨어요.”
유빈에게는 옷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젖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 여기 갇힌 건가요?”
백 비서는 왕창식 부회장의 마지막 지시를 떠올렸다. 펜트하우스에 출입할 때 반드시 안에서 열 수 없게 문을 잠그라고 했다. 유빈은 갇혀 있었다.
유빈이 백 비서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나가게 해주세요.”
백 비서는 자신이 들어줄 수 없는 부탁에 긍정도 부정도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유빈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이따가 점심 즈음에 식사 갖고 다시 올게요. 그 때까지 눈 붙이시고요, 필요하신 거 생각해서 말씀해주세요.”
백 비서가 유빈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고 나서 펜트하우스를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