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45. 형의 공격
유빈이 왕창식 부회장의 시선을 피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스토커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뒤를 돌아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 모습을 본 왕창식 부회장이 벌떡 일어나 유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턱.
그냥 손을 올렸다. 때리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빈은 어깨에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왕창식 부회장이 유빈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들어와서 쉬십시오.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나가보겠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리고 열쇠는 이제 필요 없으실 테니 도로 가져가겠습니다.”
왕창식 부회장이 유빈의 손에들려 있던 열쇠를 채갔다.그리고 유빈을 남겨두고 펜트하우스를 나갔다. 밖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유빈은 문을 열어보고 싶었지만 왕창식 부회장이 소리를 들을까 봐 두려워 앞으로 뻗어 나가려는 떨리는 손을 반대 손으로 부여잡았다. 한참 뒤에 용기를 낸 유빈이 문을 열어보았다. 밖에서 잠긴 문은 안에서 열리지 않았다. 유빈은 감금당했다는 생각에 털썩 주저앉았다.
*
프로텍 직원들이 퇴근했을 시간, 케빈의 디도스 공격이 시작되었다. 미리 프로그램된 대로 수십만 대의 좀비 컴퓨터가 동시에 프로텍 서버에 초당 수백 회의 접속을 반복하고 대용량 파일들을 전송했다. 프로텍 서버는 폭증한 트래픽을 감당하지 못하며 마비되고 있었다.
디도스 프로그램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방어 방법은 잠시 서버를 닫는 것이지만 케빈은 항시 가동되어야 하는 백신 프로그램 회사의 서버 폐쇄를 결정하는 게 얼마나 내리기 어려운 결정인지 알고 있었다. 분노한 케빈이 입력하는 명령어에 따라 좀비 컴퓨터들이 초당 접속 속도를 높여갔다.
프로텍의 모든 방어 시스템과 인력이 디도스 공격을 막는 차선의 방법에 집중되었다. 좀비 컴퓨터들의 IP를 일시적으로 차단하려고 했다. 하지만 케빈이 이미 여러 번 우회해 놓은 좀비 컴퓨터들의 IP를 추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케빈이 다음 작업에 착수했다. 프로텍 백신의 업데이트 서버를 공략했다. 디도스 공격을 막는 데에 집중되어 있던 프로텍 방어 시스템은 업데이트 서버까지 지킬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텍 백신 업데이트 서버 관리 권한이 케빈의 손에 들어왔다. 케빈은 차기 프로텍 백신 업데이트 파일에 악성코드를 심고 전국의 모든 컴퓨터에서 강제 업데이트를 시작했다.
프로텍 백신이 설치된 전원이 켜져 있는 모든 컴퓨터와 휴대폰에서 프로텍 백신이 업데이트되며 케빈이 심어놓은 악성 코드가 같이 전송되었다. 업데이트를 마친 프로텍 백신이 탑재된 컴퓨터와 휴대폰은 케빈의 좀비 PC 관리 프로그램에 즉각적으로 편입되었다. 프로텍 서버에 접속하는 좀비 PC의 숫자가 수십만 대에서 수백만 대로 순식간에 불어났다.
그때 케빈의 눈에 심상치 않은 장면이 포착되었다. 초당 수백 개의 좀비 컴퓨터 IP가 차단되고 있었다. 자동으로 우회된 IP를 추적해서 차단하는 프로그램이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케빈의 공격을 이 정도로 여유롭게 방어할 수 있는 사람의 목록은 길지 않았다. 케빈은 해커들끼리 이용하는 지하 인터넷 공간 소르에 접속해 그 목록 중 첫 번째 인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메이페어. 하이데스다. 프로텍에서 일한다는 말 진짜였나? 네 실력에 왜? 막지 마. 지금 프로텍이 정상이 아니라는 거 너도 알고 있을 텐데?
해커명 메이페어(MayFair)로 불린 사람은 프로텍에서 디도스 공격을 방어하고 있던 이태식 대리였다. 하이데스라는 해커명을 보고 바쁘게 움직이던 이태식 대리의 손이 멈칫했다. 하이데스는 그 이름처럼 해커들 사이에서 신처럼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이태식 대리도 하이데스를 만난 적은 없었지만, 미국 국가보안국을 해킹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해커들 사이에서 위명(偉名)을 떨치던 하이데스를 알고 있었다.
일단 받은 메시지에 답장해 보기로 했다.
- 목적이 뭡니까?
이태식 대리가 예상치 못했던 답장이 돌아왔다.
-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 며칠 전 방송국 해킹 사건 때 송출됐던 영상 너도 봤겠지? 그 여자가 내 여자다. 그 해킹 때 프로텍이 백도어(Back-door) 열어줬던 거 알고 있어. 뒷문 열어놓고 직접 했을지도 모르지. 비켜. 메이페어.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메시지를 받은 이태식 대리는 허리를 젖히고 얼굴 위에 손을 포개어 놓았다. 어지러웠다. NBS 방송국 해킹 당시 방영되었던 괴 영상에 나왔던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과 소개팅했고, 조금 전까지 모교 앞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후배 유빈이었다. 디도스 공격을 막느라 잊고 있었던 취기가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NBS 해킹 당시 프로텍 백신 작동이 잠시 중지됐던 흔적, 왕창식 부회장이 자신을 동원해 유빈을 프로텍으로 데려왔던 일 등이 순차적으로 떠올랐다. 방금 유빈이 자신의 집이 아닌 프로텍 사옥으로 들어온 것도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이태식 대리가 IP 차단 프로그램을 끄고 화장실을 가는 척 자리를 떴다.
이태식 대리의 IP 차단이 중지되자 프로텍 서버의 접속량이 다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프로텍 기술팀 사무실 여기저기에서 고함과 욕설이 터져 나왔다.
“부장님 서버 닫아야 돼요. 더 이상은 못 버텨요.”
“버텨봐! 좀비 PC 원격 조작하는 곳 IP 아직도 못 땄어?”
“모르겠어요. 추정 IP만 100개가 넘어요. 하나하나 다 우회돼 있어요.”
“이태식 이 자식 어디 갔어!”
“부장님 이러다 메인 서버 날아갑니다!”
아수라장 같은 기술팀 사무실에 왕창식 부회장이 굳은 얼굴로 나타났다. 입구에 있던 몇몇만 분위기를 살피며 목례를 건넸을 뿐 자신의 일에 열중해 있는 다른 직원들은 여전히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왕창식 부회장이 소리쳤다.
“그만!서버 닫아!”
왕창식 부회장의 일갈에 사무실의 소란이 정리되었다. 모두가 멍한 얼굴로 왕창식 부회장을 쳐다보았다. 왕창식 부회장은 그대로 몸을 돌려 기술팀 사무실을 나갔다.
프로텍 직원들이 메인 서버 방어에 매달려 있을 때 케빈은 여유롭게 업데이트 서버를 완전히 자기 손에 넣었다. 접근 암호를 새로 설정하고 소스 코드를 다운로드했다. 프로텍 메인 서버가 닫힌 것을 확인하고 승리감을 느끼며 디도스 공격을 멈췄다.
승자의 여유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자신의 힘을 보여줬고 협상 카드를 손에 쥐었다. 창식이 피해를 복구하기 전에 담판을 지어야 했다. 그대로 집을 나서 차를 몰고 프로텍으로 향했다. 프로텍 건물 앞에 차를 대고 내리자 밤인데도 층마다, 칸마다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케빈은 그대로 부회장실로 직행했다.
케빈이 창식의 집무실 문을 열 때까지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불은 꺼져 있었다. 저 멀리 책상에 앉아 있는 창식의 얼굴이 보였다. 컴퓨터 화면에서 나오는 불빛을 반사하는 창식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케빈이 스위치의 위치를 정확히 짚어 불을 켰다. 창식과 눈이 마주쳤다. 오랫동안 만나지 않은 형제 사이에서 정적이 흘렀다.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창식이었다.
“오랜만이네.”
“오랜만.”
“형이 그랬어?”
케빈이 창식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케빈이 가까워지자 의자에 앉아있던 창식이 일어나 눈높이를 맞췄다. 케빈이 창식의 물음에 대답했다.
“응. 나 말고 프로텍 털어먹을 해커가 또 있어?”
케빈의 손이 창식의 어깨 위에 올라갔다. 둘 사이에 약속된 행동이었다. 창식은 자신보다 강한 맹수를 만난 동물처럼 케빈의 시선을 피했다. 케빈의 손이 창식의 어깨를 꽉 쥐었다. 창식은 겁먹은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