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44. 그의 안광
펜트하우스에서 초밥 접시를 비운 유빈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진한 핑크색 천장을 보다 식곤증에 눈이 스르르 감겨왔다. 시각에 남은 잔상에 헝클어진 기억이 더해져 꿈이 되려고 할 때 휴대폰이 울렸다. 한 손으로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고 다른 손으로 침대를 더듬어 휴대폰을 집었다. 필문이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졸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 필문아.”
[민유 어디야?]
“나? 너네 회사.”
[아직도? 한턱 쏠게 가자. 나 지금 퇴근해. 너 일 끝나는 대로 1층 로비 콜? 아 저번에 소개팅했던 태식 선배도 같이. 콜? 오랜만에 고연대 뭉치자.]
“그래. 지금 갈게.”
유빈이 1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1층 로비에 도착하자 필문이가 손을 흔들어 반겼다. 필문이의 옆에는 태식이 서 있었다. 유빈이 다가가 필문이에게 인사했다.
“안녕.”
“안녕.”
그리고 유빈과 태식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필문이는 이 어색한 상황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정리를 시작했다.
“에이 에이 이러면 안 되지. 민유, 너 저번에 소개팅 끝나고 태식 선배랑 어색하고 그런 거 아니지? 고연대 족보가 언제부터 이렇게 개족보였어. 자자. 명문 고연대 족보 정리합시다. 체통을 지켜야지. 민유 너 10학번 나랑 동기.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과 동기. 그리고 이태식 선배님은 과는 다르지만 우리 학교 06학번 선배님. 너랑 나는 다 선배한테 존댓말 쓰고 선배는 우리 둘 다한테 반말하시고, 너랑 나는 하던 대로 반말하고. 오케이? 선배님도 오케이?”
필문이의 너스레에 유빈과 태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셋은 필문이의 진두지휘에 따라 고연대 앞 술집으로 향했다. 필문이는 오랜만에 대학 엠티라도 가는 듯 신이 났고, 유빈도 최근에 겪은 나쁜 일들을 잊어버리고 옛날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찬성했다. 태식도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다. 술집에 도착하자 필문이의 입방정이 다시 시작됐다.
“낮에 민유빈 구출 파티에서 우리 부회장님만 쏙 빠졌네. 이래도 되나? 태식 선배. 부회장님은 학교 어디 나오셨대요? 혹시 고연대 아니에요?”
태식이 대답했다.
“부회장님 학부만 고연대 나오시고 석사, 박사는 한국대에서 하셨을걸?”
필문이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떠벌렸다.
“아이고 우리선배님이셨네. 석사, 박사 그런 거 다 필요 없어요. 학부 선후배가 진짜 선후배지. 가만 보자. 부회장님 번호가……, 아, 없네. 태식 선배 부회장님 번호 있어요?”
태식은 벙찐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문이가 유빈을 바라보았다. 왕창식 부회장의 휴대폰 번호는 유빈의 핸드폰에 저장돼 있었지만 여기에서 필문이한테 말해줄 수 있을 리 없었다. 유빈은 화를 내는 척하며 화제를 돌렸다.
“야! 한턱 쏜다며. 안 시켜?”
술은 소주. 안주는 골뱅이 소면과 계란말이를 주문했다. 먼저 소주 2병이 나왔다. 아직 안주도 나오지 않은 상태로 필문이가 첫 잔은 원샷을 외치며 각자의 잔에 술을 따랐다. 태식과 필문이가 먼저 술잔을 털어 넣었다.
오랜만에 대학생으로 돌아온 것 같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유빈도 원샷했다. 기본 안주로 나온 뻥튀기를 몇 개 집어먹었지만 소주 원샷은 역시 속이 쓰렸다. 뻥튀기 몇 개를 더 집는 유빈을 보며 필문이가 말했다.
“민유. 너 언제부터 뻥튀기를 이렇게 좋아했어?”
그러더니 벨을 누르고 뻥튀기 한 접시를 더 달라고 했다.
“난 역시 좋은 친구야. 아 물론 민유 너도. 동기사랑 나라사랑. 선배님은 좋은 선배님이시고요.”
계란말이와 골뱅이 소면이 나오고 유빈과 필문이, 태식이 학교 이야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을 때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들어와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중 몇몇은 학교 로고와 학과 이름이 새겨진 야구 점퍼를 입고 있었다. 필문이가 슬쩍 곁눈질하더니 말했다.
“고연대 후배님들이시네. 과는 어디 보자. 다양하게도 모였네. 쟤는 국문과. 쟤는 역사교육과. 쟤는 화학공학과. 경영학과 후배님도 계시네. 동아리 모임인가?”
이미 다른 곳에서 한잔하고 이곳으로 옮겨온 것인지 후배들 사이에서 취기가 묻어났다. 제법 커진 목소리, 약간 과장된 제스처들, 그중 한 명은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자리를 잡고 앉은 후배들은 술과 안주를 주문하고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유빈은 술보다는 분위기에 취하는 것 같았다. 복잡한 회사 일도, 스토커도 없었던 어린 날로 그때 함께했던 친구와, 그리고 지금 그곳에서 공부하는 후배들과 함께 있는 게 좋았다. 소주 반 잔을 꺾어 마시며 후배들의 이야기에귀 기울여봤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후배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야, 이 뉴스 속보 뭐야? 프로텍이 해킹당했다는데?”
“아 진짜? 백신 회사도 해킹당할 수 있어?”
“어디 봐봐. 진짜네? 나 프로텍 백신 쓰는데 이거 지워야 되나?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프로텍 안 쓰면 뭐 써?”
“독점 기업이 이래서 안 되는 거지.”
후배들 입을 통해 들은 회사에 대한 비판이 이제 갓 입사해서 애사심이 넘치는 필문이를 자극했다. 필문이가 술잔을 딱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한마디 했다.
“야 너희 몇 학번이야?”
한 당돌해 보이는 후배가 대답했다.
“16학번이요.”
필문이가 자신감을 얻은 듯이 몰아붙였다.
“나는 경영학과 10학번. 얘는 내 동기. 이 분은 06학번 컴퓨터 공학과 선배님.”
후배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필문이를 멀뚱멀뚱 쳐다보았고 그중 16학번이라고 밝힌 후배는 역시 당돌하게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선배라는 말에 필문이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잘 들어. 프로텍이 해킹당했다고 누가 그래? 그럴 리가 있어?”
휴대폰을 들고 있던 후배가 속보 기사를 띄워 필문이이게 보여주었다. 기사에는 실제로 프로텍이 해킹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후배들이 보여준 기사를 보고 머쓱해진 필문이가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너희 술값은 이 선배가 내줄 테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편하게 주문해.”
필문이의 말에 유빈과 태식이 빵 터지고 말았다. 필문이는 참 좋은 선배님이었다. 후배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연신 필문이한테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태식은 웃음을 멈추고 필문이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필문아 06학번 선배님이 말씀하신다. 앉아라. 후배들 기죽겠다.”
“네. 선배님.”
필문이가 자리로 돌아오자 태식이 물었다
“그런데 쟤네 뭐라는 거야? 프로텍이 해킹당했다고?”
필문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런 기사가 났더라고요. 오보겠죠. 저희 프로텍이 해킹당할 리가 있나요?”
그때 필문이와 태식의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가 전송되었다. 문자메시지를 확인한 둘은 동시에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선배님, 진짜 해킹 당했나 본데요?”
“그런가 본데? 전 직원 당장 회사로 들어오라는데?”
“그런데 프로텍을 누가 해킹하죠?”
유빈 일행은 급하게 술집을 나와 프로텍 사옥에 도착했다. 태식이유빈에게 물었다.
“유빈 씨 괜찮으시면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유빈이 우물쭈물하다 대답했다.
“아뇨. 괜찮아요. 저도 여기에서 볼 일이 남아서요.”
필문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민유 너 우리 회사 취직했어? 왜 계속 여기 있어?”
유빈은 대충 얼버무려 대답했다.
“들어가자. 비상이라며.”
건물로 들어와 태식과 필문이는 각자 자리로 돌아갔고 유빈은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문 앞에서 서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밤 11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밤 10시 전에 들어와야 한다는 백 비서의 전언이 생각나 조금 찝찝했다. 왕창식 부회장에게서 받은 열쇠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나올 때 분명히 잠갔는데.’
유빈은 의아해하며 문손잡이를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왕창식 부회장이 무릎에 팔꿈치를 얹은 자세로 앉아있었다. 보라색과 핑크색이 뒤섞인 배경에서 왕창식 부회장의 안광(眼光)이 유빈을 향해 쏘아졌다.
“유빈 양 늦었습니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왕창식 부회장과 눈이 마주쳤다. 힘껏 추어올린 왕창식 부회장의 눈동자 아래에 흰자가 번득이는 것이 보였다. 유빈은 그대로 얼어붙어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왕창식 부회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늦게 들어오신 건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내일은 밖에 나가지 마십시오. 필요한 물품들은 백 비서 통해 말씀해 주시면 구매해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이 시간까지 제가 어떻게 해야 유빈양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해서 말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