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3화 〉43. 떠난 자, 남은 자 (43/70)



〈 43화 〉43. 떠난 자, 남은 자


지밀환 교수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사색에서 빠져나왔다. 신이 되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했지만, 정보를 수집하고 그 정보로 포섭한 사람들이 지밀환 교수에게 다시 정보를 가져다주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지밀환 교수의 파워는 상당했다. 창식이 그렇게 쉽게 무시할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사용하기에 따라 창식의 힘을 넘어설 수도 있다고 믿었다.

이제 축적해놓은  힘을 사용해야 할 시간이었다. 민유빈을 이용해 프로텍으로 복귀하고 자신의 백신 프로그램을 되찾으려던 계획은 창식이 마지막 순간에 배신하면서 실패했다.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도 발생했다.

케빈이 검은 십자가를 떠나면서 심각한 타격이 발생했다. 케빈이 팬텀 유통을 이용해 제공하던 자금과 해킹 실력을 통해 수행하던 수많은 업무들이 공백 상태에 놓여있었다.

게다가 케빈은 교단을 떠나면서 지밀환 교수가 오랫동안 준비해놓은 무기를 가지고 나가버렸다. 유사시에 디도스(DDos) 공격을 통해 전산망을 마비시키고 그 혼란 속에서 이익을 취하기 위해 검은 십자가 교단은 수십만 대의 좀비 PC를 준비해두었다. 그런데 케빈이 그 관리 프로그램을 갖고 떠나버렸다.

창식이 배신하고 케빈이 떠나버린 지금 지밀환 교수는 그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수십만 대의 PC를 악성 코드에 감염시키기 위해 했던 노력, 그것을 통해 전국 단위의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 너무나 아쉽게 느껴졌다. 간단한 조작만으로도 프로텍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괘씸한 창식을 혼내줄 수 있는 힘은 지금 지밀환 교수의 손을 떠나있었다. 지밀환 교수가 눈을 지긋이 감고 생각에 잠겼다.

‘좀비 PC 관리 프로그램만 갖고 있었어도…….’

자신의 디도스 명령을 받은 수십만 대의 좀비 PC들이 초당 수백 혹은 수천 번 프로텍 서버에 접속을 시도할 것이다. 아무리 프로텍 서버라고 할지라도 초당 몇 억 회의 접속량을 버텨낼 수 있을 리 없다. 모든 프로텍 직원들은 좀비 PC의 접속을 차단하는 데에 몰두할 것이고,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며칠 동안 프로텍 전체의 업무는 마비될 것이다.

국내 최대의 백신 회사가 디도스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프로텍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주가는 폭락할 것이고, 프로텍 백신 이용자 수는 줄어들 것이다. 그 때 창식에게 디도스 공격을 시행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밝히면 창식은 어떻게 반응할까? 용서를 구할까? 여전히 버릇없이 나올까?

지밀환 교수가 눈을 떴다. 즐거웠지만 허무한 상상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지었던 달콤한 웃음의 맛이 씁쓸하게 바뀌었다. 창식의 버릇을 고쳐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역시 방법은 민유빈이었다. 창식은 민유빈을 완전히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유빈 스토킹 프로젝트를 처음 기획한 건 지밀환 교수였다. 민유빈을 다시 자신의 손에 넣을 방법 정도는 찾을  있었다.

민유빈을 되찾아 온다면 좋은 점은 또 있었다. 케빈 역시 민유빈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민유빈은 창식과 케빈 모두에게 먹힐 만한 협상 카드였다. 다시 데이터베이스를 열어 민유빈에 대해 올라온 최신 보고 사항들을 확인했다. 눈이 띄는 보고가 업데이트돼 있었다.


*


오랜 꿈이었던 교수직이 좌절된 덕기는 무기력하게 집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을 보고 당황해 전화를 받을지 말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전화를  쪽은 지밀환 교수였다. 그동안 지밀환 교수 몰래 창식의 명령을 따랐다는 것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덕기가 휴대폰 화면에 손가락을 댔다 뗐다 하며 망설이는 동안 전화는 끊어졌다.
덕기는 한숨을 쉬며 지밀환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교주님. 잠깐 화장실에 있어서 전화 못 받았습니다.”

[지금 할  없지? 내 사무실로 와봐.]

덕기는 창식에게 배신당하고 힘없이 늘어져 있는 것을 들킨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창식에게 배신당하고 팬텀 유통에서도 정직당한 상태에서 덕기가 비빌 언덕이라곤 지밀환 교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지밀환 교수의 사무실에 도착해 문 앞에서 한참을 쭈뼛거리다가 노크를 했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지밀환 교수가 나타났다. 덕기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지밀환 교수가 당황하며 덕기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덕기는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당황한 지밀환 교수가 덕기를 일으켜 사무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덕기는 지밀환 교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그동안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창식이 자신에게 접근했던 일, 자신이 창식의 명령을 따라 지밀환 교수가 모르게 별도로 민유빈을 스토킹했던 일, 결국 창식에게 배신당한 일을 하나하나 들은 지밀환 교수의 표정이 굳었다.

창식이 처음부터 자신을 스토킹 계획에서 은근히 배제하면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믿었던 덕기의 외도 때문에 민유빈을 완벽하게 자신의 통제망에 집어넣는 데에 실패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생각 같아선 머리를  숙이고 있는 덕기의 뒤통수라도 한  후려치고 싶었지만 지금 그에게는 덕기가 필요했다. 민유빈과 왕창식, 케빈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지밀환 교수가 덕기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괜찮아. 나도 방금 왕창식한테 배신당하고 오는 길이네. 민유빈을 데려가더니 우리에게 약속했던 프로텍 백신 관리 권한을 못 주겠다더군. 우리한테 지금 자네가  있어야 돼.”

예상치 못했던 지밀환 교수의 따뜻한 반응에 덕기가 고개를 들었다. 덕기와 눈을 마주친 지밀환 교수가 어깨를 다독이며 덕기를 컴퓨터 앞으로 데리고 가 방금 자신이 보던 자료를 보여주었다.

유빈이 연관된 사건들을 맡아 수사하던 한형석 형사가 올린 자료들을 보며 덕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잘 활용한다면 유빈은 물론 케빈을 다시 데려오고,  둘을 이용해 창식에게 복수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밀환 교수가 자료를 프린트해 덕기에게 넘겨주며 명령했다.

“민유빈 꼭 다시 데려오게.”

지밀환 교수의 상세한 지시 사항들을 듣고 자료를 받아든 덕기는 팬텀 유통으로 향했다. 혹시 회사에 있을지도 모르는 케빈과 마주치지 않으려 조심하며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책상에 쌓인 먼지를 걷어냈다. 업무용 노트북 컴퓨터와 넘겨받은 자료를 올려놓고 유빈을 데려오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오랜만에 다시 앉은 의자가 마음에 들었다.

덕기가 넘겨받은 자료는 유빈을 쫓던 검은 십자가 교인들에 대한 수사 자료였다. 한형석 형사는 검은 십자가 교인들이 사건에 연루된 것을 보고 조심하라는 뜻으로 자료를 보냈지만 지밀환 교수와 덕기가 주목한 것은 유빈의 자동차였다.

창식이 마트 지하 주차장에서 유빈을 데리고 나간 뒤 도착한 검은 십자가 교인들은 남아있던 유빈의 차에 유빈을 놓친 분풀이를 해놓았다. 한형석 형사가 첨부한 사진에서 유빈의 자동차는 계란 범벅이 된 채로 타이어가 찢겨 있었고, 창문에는 금이 가 있었다. 마트에서는 주차장에 그 차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 견인 조치했다고 적혀 있었다.

덕기가 휴대폰을 들었다. 자료에 적혀 있는 견인 업체에 전화해 유빈의 차를 보관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유빈의 자동차 보험회사에 전화해 유빈의 차를 인수해서 수리해줄 것을 요청했다.

보험회사에서는 덕기가 실제 보험 가입자인지 확인해 달라고 했지만, 덕기는 유빈의 차가 팬텀 유통에서 지급된 회사 차고, 자신은 팬텀 유통 임원이라고 설득했다. 비용 부분은 자신이 지불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자동차 등록과 관련된 여러 서류들을 받은 끝에 보험회사에서는 덕기의 요청을 수락했다.

일이 순조롭게 풀려간다는 생각에 덕기가 미소를 띠며 유빈을 잡을 함정을 완성해 갔다. 수리가 완료된 후에 차를 유빈이 살던 아파트 주차장으로 갖다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송이 완료되면 자신과 차량을 실제로 운전했던 유빈과 모두에게 문자메시지를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보험회사 직원은 그러겠노라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덕기가 가방에 손을 넣어 방금 검은 십자가 사무실을 나오면서 지밀환 교수에게 받은 물건을 꺼냈다.

권총이었다. 보험회사의 연락을 받은 유빈은 의심 없이 차를 가지러 아파트 주차장에 나타날 것이다. 그때 유빈을 총으로 유빈을 위협해서 지밀환 교수 앞으로 데려간다는 것이 지밀환 교수의 계획이었다. 총기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덕기가 걱정을 표했지만, 지밀환 교수는  일은 빨리 처리돼야 하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맞는 말이었다.

지밀환 교수는 그에 더해 필요하다면 실제로 총을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총기 사용 후 발생할지도 모르는 경찰이나 검찰 쪽 문제는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했다. 덕기가 오른손을 꽉 쥐었다. 오랜만에 잡아본 권총의 차갑고 묵직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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