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2화 〉42. 펜트하우스의 취향 (42/70)



〈 42화 〉42. 펜트하우스의 취향

펜트하우스에 들어온 유빈은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가 깨어났다. 휴대폰을  얼마나 잤는지 확인했다. 굉장히 오래  느낌이었지만 시간은 거의 흘러있지 않았다. 의아해하며 다시 휴대폰을 확인해보았다. 날짜가 바뀌어 있었다. 하루를 꼬박 잤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깨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이불을 걷고 눈을 비비고 일어나 앉았다.

휴대폰엔 많은 연락이 와 있었다. 이틀째 팬텀 유통에 출근하지 않은 유빈을 걱정하는 또는 질책하는 문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전화를 걸어 이제 출근하지 않을 거라고 말씀드릴까 고민했지만, 전화로 사직 의사를 밝히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케빈이 있을 팬텀 유통으로 찾아가 사직서를 제출하기도 껄끄러웠다. 어떻게 할지 조금  생각해 보기로 했다.

유빈이 자는 동안 걸려왔던 전화들 중엔 케빈의 개인 번호도 있었다. 케빈과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왜 전화했는지는 궁금했다. 문자메시지함과 음성메시지함, 카카오톡까지 확인해 케빈이 남긴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했지만, 부재중 전화 한 통 외에는 아무 메시지도 남기지 않았다. 펜트하우스로 들어오기 전 왕창식 부회장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케빈이 어제 그토록 자신을 괴롭힌 검은 십자가 교인이라고 했다.

‘사실일까? 그럼 뱀파이어 소동도 케빈이 벌인 걸까?’

해묵은 고민이었지만 여전히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마지막 부재중 전화는 필문이한테 걸려온 전화였다. 어젯밤 유빈이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을 때 세 번이나 전화를 걸었었다. 카카오톡 메시지도 남겨놓았다.

민유. 어디야? 나 이제 겨우 퇴근해. 가자. 한턱 쏠게.

휴대폰에 남아있던 수십 통의 연락 중에 가장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메시지였다. 유빈은 필문이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유빈은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서 내려와 펜트하우스를 살펴보았다. 어제는 미쳐 못 봤던 정신 나간  같은, 계속 보고 있으면 정신이 나갈  같은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프로텍 사옥 꼭대기 층의 절반을 차지하는 넓은 공간에 바닥과 벽은 보라색으로, 천장은 핑크색으로 덮여있었다.

생활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잘 갖춰져 있는 집기들도 대부분 보라색이나 핑크색으로 맞춰져 있었다. 유빈이 방금 일어났던 침대도 보라색 커버에 핑크색 이불과 베개가 놓여있었다. 핑크색 덮개가 있는 보라색 변기에 앉아 용변을 볼 때는 섬뜩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구 취향일까? 왕창식 부회장일까?’

유빈의 시선이 문 반대쪽 벽으로 향했다. 벽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꼭대기 층의 나머지 반이 있는 곳이었다.  너머도 이렇게 보라색으로 디자인돼 있을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곳으로 통하는 문은 찾을  없었다.

갑작스럽게 허기가 느껴졌다. 하루 넘게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게 생각났다. 냉장고를 열어보았지만 물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침대 옆에 놓아두었던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어제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다준 왕창식 부회장의 비서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하며 주고 간 명함이었다. 휴대폰에 명함에 적힌 번호를 찍고 망설였다. 전화해서 배고프다고 말하기가 민망했고, 호텔 룸서비스를 주문하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는  같아 죄송했다.

그때 펜트하우스 초인종이 울렸다. 유빈은 깜짝 놀라 명함과 휴대폰을 내려놓고 문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자 백 비서가 서 있었다. 유빈이 민망한 듯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백 비서가 유빈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멈춘 곳은 유빈의 단발머리였다. 백 비서가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셨군요. 부회장님께서 걱정 많이 하셨습니다. 드시고 싶은 거 있는지, 생활하시는 데 불편하신  없는지 여쭤보라고 하셨습니다.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드디어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유빈이 함박웃음을 띠고 대답했다.

“저 뭐든지 잘 먹어요!”

백 비서는 유빈의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왕창식 부회장 앞에서도 저렇게 웃으며 꼬리 쳤을지 궁금해졌다. 다시 딱딱한 사무적인 어투로 물었다.

“부회장님께서  드시고 싶은 음식으로 준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유빈이 잠깐 망설이다 대답했다.

“저 초밥 먹고 싶어요. 그리고요.”
“네.”
“휴대폰 충전기도 필요하고 갈아입을 옷도 필요한데 나갔다 와도 될까요? 초밥도 제가 나가서 사 먹을게요. 비서님 편하게 일 보세요.”
“아니요. 부회장님께서 드시고 싶으신 음식 꼭 제가 준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나가셔도 되는지는 초밥 사 오는 길에 부회장님께 여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잠시  돌아온 백 비서가 유빈에게 모둠 초밥 플래터와 휴대폰 충전기가 든 봉투를 내밀었다.

“초밥은 종류별로 다 담았습니다. 충전기는 어떤 기종 쓰시는지 몰라 안드로이드용이랑 IOS용 다 샀습니다. 부회장님께서 외출하셔도 되지만 밤 10시 안에는 꼭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검은 십자가가 아직 날뛸지도 모르니 당분간은 외출하실 때 조심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백 비서의 딱딱한 태도에 민망해진 유빈은 감사하다고만 인사드렸다.

백 비서가 돌아간 후 초밥을 먹던 유빈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금 밤 10시.’ 스토커가 요구했던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초밥이 목에 걸려 기침이 나왔다. 기침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케빈의 집에 살 때도 통금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케빈 그런 요구를  적은 없었다.



*



창식에게 모욕당하고 사무실로 돌아온 지밀환 교수가 컴퓨터를 켜고 오랫동안 검은 십자가 교단을 통해 모아 온 데이터베이스 파일을 열었다. 정계, 재계, 법조계 등 사회 각처의 유력 인사들부터 공무원, 경찰,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수만 명의 이름과 사진, 연락처가 수록돼 있었다.

각각의 인물들은 지밀환 교수에게 호의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돈으로 매수할  있는 사람과 권력으로 압박할  있는 사람 등으로 세세하게 분류되어 있었고, 그들을 회유 또는 협박하기 위한 자료들이 각각의 인물 파일마다 상세하게 저장되어 있었다.

그중 몇 개의 파일을 열어보았다.  번째 파일은 프로테크놀로지 왕무택 회장의 파일이었다. 지밀환 교수가 프로텍에서 쫓겨난 직후부터 약점을 잡기 위해 치밀하게 해킹했지만 특별한 징후를 발견할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신념에 따라 정직하게 사업했고,  결과 국내 굴지의 IT 기업을 설립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자신의 친구였지만 때로는 부럽기도, 때로는 두렵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최근에 왕무택 회장의 파일에 흥미로운 정보가 업데이트됐었다. 지밀환 교수는 이미 몇 번이고 읽었던 그 페이지를 다시 열어보았다. 왕무택 회장이 의식을 잃기 전 남긴 유서가 있다는 보고가 올라와 있었다. 유서는 왕무택 회장 사망 시에 공개되도록 설정되어 변호사에게 위탁되어 있다고 덧붙여져 있었다. 유서의 내용을 알기 위해 왕무택 회장이 만났을 법한 변호사들을 수소문해 보았지만 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

지밀환 교수는 의식 없이 병원에 누워있는 오랜 친구 왕무택 회장을 떠올려 보았다. 자신과의 길고  인연, 어쩌면 악연을 가진  친구가 유서에 무엇을 적어 놓았을지 추측해보았다. 짚이는 부분은 많았지만 확신할  있는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으로 한형석 형사의 파일을 열어보았다. 민유빈을 스토킹하기 시작하면서 새로 포섭한 인물이었다. 강력계 형사로 활동하면서 지역 도박장의 사정을 봐주다 발각되어 감봉 처분된 그는 지밀환 교수가 제시하는 약간의 돈에 쉽게 회유되었다. 민유빈이 신고한 사건의 수사 기록을 넘겨주는 것으로 시작한 그들의 거래 관계는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점점 발전했다. 한형석 형사는 이제 경찰 내부의 정보를 지밀환 교수에게 보고하는 충실한 검은 십자가 교인이 되어 있었다.

지밀환 교수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한형석 형사의 파일을 닫았다. 그리고 키보드를 끌어당겨 명령어를 입력해 직접 파일 하나를 추가했다.

- 백보연: 왕창식의 오피스 와이프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을 닫으며 웃음을 흘렸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끌어 모아 신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왔다. 스스로에게 정말로 신이 될 수 있을지 물어보았다. 자신이 없었다. 아니, 시간이 없었다. 지밀환 교수는 자신이 오랜 동갑내기 친구 무택처럼 병상에, 혹은 무덤에 누울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20년, 아니 10년만 더 있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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