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1화 〉41. 공모자들, 분열(2) (41/70)



〈 41화 〉41. 공모자들, 분열(2)


자존심을 건드는 창식의 폭언에 지밀환 교수는 입을 다물었다. 대화에서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는 쪽이 지밀환 교수에서 창식으로 바뀌었다.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프로텍은 아버지 것도, 교수님 것도 아니라 제 겁니다. 제가 갖고 있는 걸 뺏으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는 교수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교수님 때문에 죽어야 했던  사람 곁에서 서로 명복을 빌어주고 싶으십니까?”

제자에게 들을 거라고 생각해 본적조차 없는 폭언에 지밀환 교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런 대답도  하는 지밀환 교수에게 창식의  선 말이 계속되었다.

“하나 더. 민유빈양도 제 겁니다. 손대지 마십시오. 유빈 양을 데려오는 일, 교수님이 아니었어도  혼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잡일 처리해주신 데에 대해선 감사하다는 말씀은 드리겠습니다.”

지밀환 교수가 탁자를 내리쳤다.

“이제 와서 말이 다르지 않은가!”
“이만 나가주십시오. 말씀드렸듯이 바쁩니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무례하게 찾아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제자의 배신에 이은 모욕에 가까운 언사에 지밀환 교수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제자에 대한 마지막 애정으로 조언하지. 자네가 말한 케빈, 검은 십자가를 완전히 배신했어. 그냥 배신만 한 게 아니라 나한테도 자네한테도아주 위험한  들고 떠났어. 조심하게. 그리고 방금 자네가 조심해야  사람이 한 명 더 늘었네. 나, 자네가 그렇게 무시해도 좋을 만큼 만만한 사람은 아닐세.이만 가네.”

지밀환 교수가 부술 듯 거세게 문을 닫으며 부회장실을 나왔다. 창식 앞에서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감정이 치밀어 오르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창식이 내뱉은 말들이 창이 되어 폐부를 찔러왔다. 1세대 해커였지만 요즘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해커들과 비교해 자신의 실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부족한 실력을 메우고자 케빈을 이용하려 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케빈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면서 프로텍 백신의 관리 권한이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해졌다. 이미 전국의 거의 모든 컴퓨터에 완전한 권한을 부여받은 상태로 설치되어 있는 프로텍 백신만 자유롭게 활용할 있다면 자신의 부족한 해킹 실력으로도 그토록 열망하던 신의 경지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러던  자신을 프로텍에서 몰아냈던 왕무택 회장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병문안을 핑계로 병원을 찾아 조용히 담당 의사를 만났다. 왕무택 회장의 오랜 친구라고 밝히며 회복 가능성을 물었다. 의사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사실상 소생 가능성은 없다고 대답했다. 겉으로는 수십 년 동안 사귀어 온 친구의 안타까운 소식에 슬퍼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자신이 개발한 프로텍 백신을 되찾을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프로텍 경영권을 승계받은 창식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창식이 자신의 밑에서 공부할 때 마음에 두고 있었던 민유빈 이야기를 슬쩍 흘려보았다. 민유빈이 어렸을 때부터  창식의 경쟁 상대였던 케빈의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양념 삼아 덧붙였다. 창식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호의적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민유빈을 갖겠다고 했다.  뒤로 지금까지 자신이 민유빈을 취하는 것을 반대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이어졌다.

그 자리에서 거래가 성사되었다. 밀환은 검은 십자가 조직을 동원해 민유빈을 창식에게 넘겨주기로 했고, 창식은 밀환에게 프로텍 이사직으로의 복귀와 백신 프로그램 관리 권한을 약속했다. 그렇게 의기투합한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스토킹 계획이 수립되고 점점 구체화되었다.

중간 중간에 케빈의 방해가 있었지만 계획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그 결과 지금 민유빈은 프로텍 사옥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은 창식이 밀환에게는 약속한 것을  수 없다고, 조롱과 경멸을 잔뜩 얹어 선언하고는 스승님을 내쫓았다. 배신감에 밀환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화장실에서 돌아오던 백 비서의 눈에 문에 기대어 식식거리고 있는 지밀환 교수가 보였다.

“괜찮으세요?”

백 비서와 눈을 마주친 지밀환 교수의 머릿속에서 전구가 번쩍였다. 자신이 방문했음을 알리러 백 비서가 부회장실에 들어간  급하게 문이 잠기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직접 찾아온 스승을 밖에 앉혀두고 사무실에서 정사를 나눌 정도로 깊은 관계의 오피스 와이프.’

백 비서를 이용한다면 방금 창식에게 당한모욕을 되갚아 줄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을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비서에게 지밀환 교수가 되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백보연 비서입니다.”
“댁내 두루 평안하고? 다음에  보세.”

백 비서를 뒤로하고 복도를 걸어나가는 지밀환 교수의 얼굴에서 붉은 기운이 내려가고 숨소리가 편안해졌다. 얼굴 가득히 웃음이 번졌다.



*

지밀환 교수가 돌아가고 집무실에 혼자 남은 창식은 문을 잠갔다.  비서를 다시 부를까 생각했지만 유빈이 보고 싶었다. 개인 노트북 컴퓨터를 꺼내 유빈의 사진과 동영상이 저장된 폴더를 열었다. 동영상 파일 하나를 열어 엉덩이가 두드러지게 찍힌 부분을 찾아 빠르게 재생했다. 배속이 2배, 4배로 점점 높아졌다. 8배속에 이르고 유빈의 엉덩이가 나타났다.

창식이 숨을 멈추며 재생을 멈췄다. 컴퓨터 화면에 눈을 고정하고 바지를 내리기 위해 의자에서 엉거주춤하게 일어서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오른손으로 바지 단추를 풀고 왼손으로 마우스를 잡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유빈의 엉덩이가 화면 중앙으로 떠오르며 팽팽해진 바지는 한 손으로 잘 벗겨지지 않았다. 감질난 창식은 왼손까지 동원해 허리춤의 단추를 풀었다.

바지가 엉덩이에 걸리고 창식이 침을 꿀꺽 삼켰을 때 컴퓨터 옆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확 깨진 분위기에 창식이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집었다. 화면에 나타난 발신자를 보며 창식의 얼굴이 구겨졌다. 거절 버튼에 엄지손가락을 얹고 신경질적으로 왼쪽으로 밀었다.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보느라 지나간 영상을 되감았다. 한 프레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목을 화면을 향해 쭉 빼고 집중하는데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같은 발신자였다.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김덕기 상무입니다.]

“나중에 전화해.”

창식의 제지에도 덕기는 물러서지 않고 용건을 말했다.

[약속 지켜주십시오. 지금까지 부회장님이 시키시는 대로 충실하게 따랐습니다. 마진대학교 컴퓨터교육과 다음 학기 교수 임용 지원하겠습니다. 통과시켜 주십시오.]

창식은 지밀환 교수와 계획을 진행하는 동시에, 검은 십자가 단원으로서, 유빈이 다니는 회사 상무로서 스토킹 업무의 실무를 맡고 있던 덕기에게 접근했다. 지밀환 교수와의 일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한 보험이었다. 지밀환 교수가 유빈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일을 처리했던 반면, 같은 회사 내의 덕기는 보다 직접적으로 유빈을 감시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덕기는 창식이 미끼로 던진 프로텍 산하 마진대학교 교수직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사범대학 컴퓨터교육과 교수직을 맡고 싶다고 구체적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때 양아치로 낙인 찍혀 교사들에게 받았던 설움을 털어놓으며 교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창식은 속으로 덕기를 비웃으며, 좋다고 대답했다. 원하는 것이 분명한 다루기 쉬운 사람이었다.

 뒤로덕기는 창식의 명령에 따라 지밀환 교수를 통하지 않고 스토킹 계획 진행 상황을 창식에게 수시로 보고했다. 창식의 명령에 따라 유빈을 미행하거나 창식이 보낸 팬티와 꼬리를 잘 착용하고 있는지 검사하는 일도 수행했다. 이 일을 처음으로 시작했던 지밀환 교수를 따돌리는 것 같은 죄송함도 있었지만, 열망해 왔던 교사를 가르치는 교수가 될  있다는 희망으로 묵묵히 창식이 요구하는 것들을 따랐다.

하지만 창식은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케빈이 스토킹 게획에 개입한 뒤에 창식이 보여준 일 처리는 깔끔하지 않았고, 덕기가 자신의 허락 없이 유빈의 몸에 손댄 것이 무척이나 못마땅했다. 무엇보다 유빈은 이미 자신의 손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상 밀환이나덕기에게 공들여 무언가를 해 줄 이유가 없었다. 전화를 끊으려던 창식이 휴대폰을 다시 귀에 대고 뻣뻣하게 말했다.

“교수? 박사학위는 있어?”

[컴퓨터공학 석사 학위 취득했습니다. 박사학위가 필요하면 마진대학교에서 따게 해주신다고…….]

“닥쳐. 다시 전화하지 마!”

창식은 전화를 끊고 덕기의 번호를 수신 거부 목록에 추가했다. 지밀환 교수의 번호도 같이 차단했다. 이제 갖고 있을 이유가 없는 쓸모 없어진 사람들이었다.

동영상을 되감고 하려던 일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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