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7화 〉37. 추적, 뱀파이어 (37/70)



〈 37화 〉37. 추적, 뱀파이어


어린날을 회상하던 케빈의 의식이 현재로 돌아왔다.

‘유빈이 돌아올 수도 있다. 창식이가 유빈을 데려가서는 안 된다.’

가슴을 쥐어뜯을 듯이 움켜쥐고 있던 케빈이 고개를 번쩍 들고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옆에 놓여있던 술병 뚜껑을 닫았다. 취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유빈은 자신에게 돌아와야 했다.

창식이 유빈을 손에 넣는다면 창식을 거절했던 유빈은 어린 날의 강아지처럼 될 게 분명했다. 창식과 지밀환 교수로부터 유빈을 구해 와야 했다. 자신이 스토커가 아니라는 것을 유빈에게 증명해야 했다. 유빈에게 선한 신이 되기 위해 케빈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김덕기, 왕창식, 지수연, 지말환. 스토킹과 관련된 사람들의 휴대폰에 차례로 실시간 위치추적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설치했다.

그리고…….




*


소개팅 다음  유빈은 모텔에서 월요일 아침을 알리는 알람 소리를 들으며 일어났다. 하지만 출근은 하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일을 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회사에서 케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진짜로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반려되더라도 더 이상 팬텀 유통에 출근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했다. 마음속으로 회사를 정리하고 나니 후련해졌다. 섭섭함은 없었다. 휴대폰을 켜 출근 시간에 맞춰 둔 알람들을 삭제했다.

기지개를 켜고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상쾌한 아침이었다. 스토커도, 살수도 오늘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출근하지 않는 멋진 월요일에 뭘 하면 좋을지 상상해보았다. 오랜만에 서점에 가서 읽고 싶었던 책도 사고, 텅 빈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도 보고 싶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샤워를 했다. 어제 사 온 것들 중에 편한 옷을 골라 입고 옅게 화장도 했다. 모텔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를 타고 즐거운 마음으로 보신각 옆 대형 서점 밀집가로 향했다.

서점 근처 공용 주차장에 차를 대고 대로로 나와 서점으로 걸어갔다. 점심시간 직장인들의 행렬 속에서 경쾌하게 발걸음을 뗐다. 그런데 사람들이 유빈을 쳐다보는 눈빛이 이상했다. 평소에도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그녀였지만, 지금은 성비도 느낌도 미묘하게 달랐다. 주로 남성들이었지만 매력적인 여자에게 던지는 끈적한 시선이 아니었다.

오히려 건조하고 차가웠다. 몇몇 사람들은 유빈을 쳐다보면서도 유빈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유빈은 옷매무새와 머리를 정돈했지만 특별히 잘못된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수상한 점은 또 있었다. 유빈에게 고정되어 있지 않고 먼 곳과 유빈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유빈은 의아해하면서도 서점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사람들의 행동이 점점 이상해졌다. 마주 오던 몇몇 사람들은 유빈에게서 멀어지려고 뒷걸음질 치거나 차도 쪽으로 붙어서 걸었다. 유빈의 뒤에서 그리고 멀리 떨어진 앞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휴대폰을 들어 유빈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한 여자아이가 팔을  뻗고 유빈을 향해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댔다. 지하철역에서 사진이 찍혀 곤경에 처할 뻔했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상한 유빈은 여자아이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유빈은 한 발 더 성큼 다가서며 말했다.

“뭐하는 짓이야! 학교  가?”

그 아이가 먼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개교기념일이에요. 그런데 저기…….”

아이의 손끝을따라간 유빈의 시선이 보신각 옆 대형 스크린에 닿았다. 스크린  자신의 모습에 유빈은 아연실색했다. 화면 속 유빈은 벌거벗고 피를 뒤집어쓴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택시 살인 사건 후에 샤워기에서 쏟아져 나온 피를 뒤집어쓰고 기절했을 때의 모습이었다. 자막으로 ‘뱀파이어여 회개하라’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사람들은 유빈을 중심으로 두고 원을 그리듯 모여 웅성대기 시작했다.

“저 여자야?”
“맞는 것 같은데?”
“뱀파이어?”
“뱀파이어가 낮에도 돌아다녀?”

웅성거리는 소리는 점점 커졌고 유빈에게는 그 소리가 동굴안에서 사방으로 울리는 메아리처럼 들렸다.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다음 화면으로 넘어갈 준비를 했다. 유빈의 귀에 이명(耳鳴)도 들리는 것 같았다. 화면이 돌아왔고 이번엔 유빈의 얼굴 사진이 나왔다. 자막으로는 유빈이 나이,졸업한 대학, 근무하는 직장 등을 포함한 상세한 프로필이 롤업(Roll-up)되었다.

“저 여자 맞네.”
“어머!”

유빈은 빼앗은 휴대폰을 돌려주고 안간힘을 다해 사람들 사이를 해치고 나와 자신의 차로 달려갔다. 웅성대던 군중 속에서 커다란 카메라를 든 남자가 튀어나와 유빈을 쫓아 뛰기 시작했다. 유빈은 자신을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고 유빈이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의 당황한 모습이 그대로 카메라에 담겼다.

유빈이 도망간 뒤로도 스크린에서는 유빈의 모습이 계속 송출되었다.프로필 사진에서 옷 갈아입는 동영상, 샤워하는 동영상으로 수위가 점점 높아져 갔다. 급기야 유빈이 자신의 항문에 질경을 넣어 벌리는 장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악의적으로 편집된 동영상은 유빈의 엉덩이와 질경이 꽂힌 채 점점 벌어지고 있는 항문을 줌인(Zoom-in) 했다. 화면이 다시 줌아웃 되고 유빈이 딜도를 세워 항문을 대고  위에 주저앉는 장면, 꼬리가 달린 애널 플러그를 삽입하는 장면으로 넘어갔다. 좌우로 흔들리는 빨간색 글씨의 자막이 나타났다.

‘뒤로 하는 게 좋아요. 뒤로. 무슨 말인지 알죠?’

몇몇 사람들은 대놓고 스크린을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하기도 했고, 자녀를 데리고 나온 부모님들은 황급히 아이들의 시선을 스크린에서 돌리려고 애썼다. 몇몇 남자들은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크린에서 시선을 고정했다.

장면이 바뀌고 스크린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남자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화면 속 유빈은 꼬리가 달린 애널 플러그를 삽입하고 한 마리의 애완동물처럼 거울을 향해 네 발로 기어가고 있었다. 화면이 다시 유빈의 엉덩이가 줌인 되며 꼬리의 끝이 질이 아니라 항문에 삽입되었다는 것을 보여줬다.

화면이 처음으로 돌아갔다. 온몸이 피범벅인 유빈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고 ‘뱀파이어여 회개하라’라는 붉은 글씨의 자막은 점점 커지면서 진동했다. 자막이 화면 전체를 뒤덮고 나서 스크린이 꺼졌다. 잠시 후 다시 켜진 스크린에서는 뉴스 속보가 방영되었다.

“점심 식사 중에 TV 켜신 분들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오늘 오후 12시 30분경 공중파 방송 NBS가 해킹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

자신의 차로 돌아온 유빈은 안에서 잠금장치를 걸고, 달리느라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내몰아 쉬었다. 위급한 상황이었지만누구한테 도움을 청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케빈이었지만, 전화번호부에서 케빈의 번호를 눌렀다가 급하게 휴대폰 화면을 껐다. 이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 케빈일지도 몰랐다.

쓰러지듯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자동차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 얼굴에 눌려 경적이 울렸다. 유빈은 황급히 핸들에서 얼굴을 뗐다. 자동차 안에 있었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 사태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태식을 소개해준 친구 필문이가 보낸 카톡이었다.

- 민유. 너 괜찮아? 지금 포털사이트마다 네 기사로 도배됐어. 무슨 일이야?

놀란 유빈은 답장할 새도 없이 메이버 앱을 켰다. 필문이의 말처럼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유빈이 방금 겪은 일에 관한 기사로 가득 차 있었다.

‘보신각 뱀파이어.’
‘뒤로 하는  좋은 여자.’
’뒤로 하는  좋은 뱀파이어 신상 공개.‘

익명 게시판 수준의 자극적인 제목들 사이에서 기사 하나를 눌러 보았다. 조금 전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에게서 도망치던 유빈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당황한 유빈은 황급히 뒤로 가기를 누르고 다른 기사를 열어보았다. 더 충격적인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유빈이 알몸으로 꼬리를 달고 네 발로 기어가는 모습이었다.

사진 속의 여자가 자신이라는 걸 부정하고 싶었다. 스토커의 요구에 굴복해서 저런 행위를 하고 사진까지 찍혔다는 게 수치스러웠다. 게다가 이 사진은 메이버 메인 화면에 노출되어 있었다. 지인들 심지어 가족들이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유빈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휴대폰을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기사를 열람했다.

’신의 저주를 받은 뱀파이어.‘

검은 십자가라는 한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신문에 실린 사설이었다. 그 기사에서 유빈은 신의 저주를 받아 피를 뒤집어쓰고 쓰러진 뱀파이어로 묘사되어 있었다.  뱀파이어를 사냥해야 한다고 적혀있었다. 기사의 끝에는 유빈을 잡아오면 현상금을 주겠다는 말까지 쓰여 있었다. 유빈은 조수석에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손이 심하게 떨려와 더 이상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눈을 붙이고 싶었다. 의자를 뒤로 젖히려는데 창밖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이 창문을 두드렸다. 똑똑.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