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35. 교수의 야망
유빈이 눈을 떴을 때 태식은 살수가 휘두른 사시미를 피하고 있었다. 회심의 일격이 빗나가자 살수는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고 태식의 구둣발이 남자의 손에 꽂혔다. 살수는 사시미를 놓쳤고 사시미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태식의 반격이 이어졌다.
팔꿈치가 살수의 아가리에 꽂혔다.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태식의 무릎이 살수의 명치 꽂혔고 허리가 집힌 남자의 등 위로 태식의 발이 떨어졌다. 주저앉은 살수의 턱에 태식의 구둣발이 작렬해 들어갔다. 완벽한 승리였다. 괴성을 지르며 쓰러져 있는 살수를 밟고 선 태식이 유빈에게 물었다.
“많이 놀라셨죠? 어렸을 때부터 무에타이 배웠거든요. 지금은 아마추어 이종격투기 선수로 활동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 누굽니까? 혹시 아는 분입니까? 위험해 보여서 일단 처리했습니다.”
유빈은 안도해야 할지 계속 공포에 떨어야 할지, 태식이 듬직하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무섭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살수의 괴성이 점점 커졌다. 유빈은 주춤주춤 물러서다 이내 태식과 살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태식이 유빈을 쫓아왔다. 그사이 살수는 몸을 벌떡 일으켜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
골목길 끝에서 유빈이 달리기를 멈췄고 태식이 유빈의 손목을 잡았다. 돌아서서 태식을 본 유빈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눈은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태식이 유빈을 근처 벤치로 데려가 앉히고 자신도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유빈에게 건넸다.
“괜찮으세요?”
유빈은 대답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식은 조용히 한 쪽 팔을 들어 유빈의 어깨를 감쌌다. 잠시 후 유빈은 벤치에서 일어났다. 태식이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토요일에 시간 괜찮으시면…….”
유빈이 태식의 말을 잘랐다.
“죄송해요. 제가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태식이 유빈한테서 받은 손수건으로 유빈의 이마에 남아있는 땀을 찍어 닦아주고 다시 손수건을 건넸다.
“안전하게 들어가세요. 손수건은 지금은 저보다 유빈 씨한테 더 필요할 것 같아요. 다음에 다시 뵐 때 돌려주세요.”
유빈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돌아서서 걸었다.
*
살수가 유빈을 습격할 때 유빈이 살던 아파트 위층 901호에서 지밀환 교수와 왕창식 부회장이 마주 선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리저리 컴퓨터 기계가 나뒹구는 집안을 보며 지밀환 교수가 말했다.
“여긴 이제 철수해야겠군. 민유빈도 이제 아래층에 살지 않는 것 같지?”
왕창식 부회장이 대답했다.
“케빈이 왜 이런 짓을한 겁니까? 누구보다 충실했던 검은 십자가 단원 아니었습니까?”
“자네랑 같은 이유겠지. 여자에 눈이 멀어서.”
수연을 연상시키는 지밀환 교수의 직설적이고 무례한 말에 왕창식 부회장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어쩌면 부녀 사이인 둘이 닮은 건 당연할지도 몰랐다. 왕창식 부회장이 속마음을 감추며 말했다.
“유빈 양은 확실히 저한테 주시는 거 맞습니까?”
“그 아이의 휴대폰 위치 추적은 자네도 하고 있지 않나? 케빈이랑은 확실히 멀어졌어. 그럼 이제 그 아이가 갈 곳이 어디 있겠나? 마지막으로 끝까지 몰아넣을 테니까 그때 잘 데려가라고. 이번엔 케빈도 어쩔 수 없을 거야. 도청하다 보니 중간에 파리 한 마리가 낀 것 같아서 처리하라고 사람을 보내놨네. 그 와중에 소개팅이라니. 그 아이도 참. 곧 여기로 올 거야.”
케빈도 모자라 또 다른 남자가 유빈에게 들러붙었다는 사실에 왕창식 부회장이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지밀환 교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고 살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살수의 입가에 엉겨있는 피딱지를 보며 지밀환 교수가 물었다.
“어떻게 됐나? 자네 얼굴은 대체 …….”
살수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목표물이 생각보다 강했습니다. 방심한 틈에 이렇게 됐습니다. 목표물 제거는 실패했습니다.”
지밀환 교수는 한숨을 쉬며 살수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주머니 속에서 왕창식 부회장의 주먹이 떨렸다. 참고 참던 화가 입으로 새어 나왔다.
“교수님 대체! 계속 이런 식으로 제대로 처리 안된다면 저희 거래는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지밀환 교수가 곁눈질로 왕창식 부회장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 급한 성격 고치라고 자네 학생일 때부터 내가 늘 일러두지 않았나?기다리게. 그 아이가 자네 손에 들어가면 그깟 파리 한 마리쯤 무슨 상관인가? 저번에 달라고 했던 파일들이나 빨리 넘겨.”
지밀환 교수의 고압적인 태도에 왕창식 부회장은 입을 다물었다. 지밀환 교수가 왕창식 부회장의 침묵을 후벼 파듯 말했다.
“그런데 자네 유빈이라는 그 아이한테는 왜 그렇게 집착하는건가? 중학생한테 차이고 돌아와서 연구실에서 훌쩍이던 게 벌써 10년 전 일 아닌가?”
“11년 전입니다. 저는 제가 갖고 싶은데 갖지 못하는 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조하게 대답한 왕창식 부회장은 형식적인 인사만 남기고 그대로 901호를 나갔다. 친구의 아들이자 한때 자신의 제자였던 왕창식 부회장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기는 지밀환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창식이 나간 자리를 보며 지밀환 교수는 왕씨 부자와의 오랜 인연을 회상했다.
케빈과 창식의 아버지인 왕무택 회장과 지밀환 교수는 대학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지밀환 교수가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컴퓨터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아 귀국했을 때 무택은 프로텍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당시 국내 컴퓨터 관련 기술의 기반은 취약했고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던 컴퓨터 보안 분야의 사업을 하던 무택은 기술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오랜만에 대학 동창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던 밀환은 무택에게 자신이 회사의 기술적인 부분을 맡겠다고 제안했다. 무택이 집안에서 받은 자금 지원과 그의 탁월한 사업능력, 거기에 국내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었던 밀환의 컴퓨터 공학 기술이 더해져 프로텍은 빠르게 자리 잡았다. 그런데 회사가 점점 커지면서 무택과 밀환 사이에 의견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밀환은 미국 유학 중에 컴퓨터 기술의 미래를 보았다. 사람들은 정보화 시대가 오고 있다고 환호했지만 밀환은 조금 다른 관점을 갖고 있었다. 정보를 종이에 펜으로 적어 책장에 보관하던 시대가 끝났다. 모든 정보는 디지털화되어 컴퓨터에 저장되고 모든 컴퓨터는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시대가 오고 있었다.
인터넷 라인을 움켜쥐고 그곳을 통해 움직이는 정보를 빼돌릴 수 있다면, 인터넷 라인을 타고 들어가 컴퓨터에 저장된 정보까지도 얻을 수 있다면, 그 정보를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협박하고 조종하고 따르지 않는다면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시대였다. 그것이 밀환의 정보화 시대였고, 밀환은 자신의 의지대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억압할 수 있는 새 시대의 신(神)이 되길 원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정보화 시대를 맞고 있었던 미국에서 신이 되고 싶었지만 미국에는 밀환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탄의 무리들이 너무 많았다. 밀환의 실력으로는 감히 넘을 수 없는 컴퓨터 천재들이 체계적으로 보안 프로그램을 구축하고 있었고 정부도 기업도 개인도 그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밀환은 어쩔 수 없이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오랜만에 찾은 한국에서 밀환은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환호성을 내질렀다. 엄청난 속도로 컴퓨터가 보급되고 정보가 디지털화되고 있었지만 보안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루는 신문에 컴퓨터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날이니 되도록 컴퓨터를 켜지 말고 조심하라는 기사를 보고 밀환은 폭소를 터뜨렸다. 해커가 공격을 명령한 시간에 활동을 시작하는 컴퓨터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날이 정해져 있을 리 없었다. 주요 일간지에 보안이나 해킹의 기본만 알아도 비웃을 만한 기사가 주기적으로 실릴 정도로 그 당시 한국의 컴퓨터 보안에 대한 인식은 열악했다.
그 위에서 밀환은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할 준비를 해 나갔다. 국내 1세대 컴퓨터 공학자로서 한국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돼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밤에는 그에게만 충성할 사람들을 모아 해커로 교육하고 그들을 동원해 모은 정보들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그러던 중 오랜 친구였던 무택이 대규모 자본을 동원해 컴퓨터 보안 회사를 설립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눈이 번쩍 뜨이고 마시던 술이 확 깼다.
밀환은 컴퓨터 바이러스를 잡는 백신 프로그램과 해킹 프로그램은 그 작동 원리가 같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백신 프로그램은 사용자의 컴퓨터를 뒤져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분석을 위해 발견된 위험 요소의 정보를 회사로 전송하지만 해킹 툴은 해커의 명령에 따라 프로그램을 제거하거나 해커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전송한다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백신 프로그램을 해킹 툴로 사용할 경우, 해킹 대상자가 쉽게 접근과 전송을 허가해 준다는 장점까지 있었다. 무택의 백신이 전국적으로 상용화된다면 밀환은 그 프로그램을 해킹 툴로 이용해 새 시대의 신에 한 발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