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4화 〉34. 소개팅 (34/70)



〈 34화 〉34. 소개팅

멀리서 유빈을 도와주는 걸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을 내린 캐빈은 적극적으로 스토킹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스토킹에 사용되는 컴퓨터들을 해킹하고, IP를 추적해 유빈의 집 위층에 설치된 아지트의 해킹 기계들을 무력화했다.

 과정에서 몰래카메라에 찍힌 유빈의 벗은 몸이 찍힌 동영상을 보았다. 캐빈은 그때의 황홀함을 잊을 수 없었다. 단순한 성적 흥분을 넘어선, 미국에 있을  손댔던 마약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전율이 온몸을 감아 돌았다. 유빈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과 미안함이 이성(異姓)에 대한 두근거림으로 바뀌었다.

유빈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다. 스토킹으로부터 유빈을 지켜주던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밝히면 유빈도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빈은 캐빈이 스토커라고 의심하고 있었고, 사실대로 창식이 스토커라고 말했을 때도 유빈의 반응은 냉담했다.

자신이 스토커가 아니라고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처음에 창식과의 관계에 유빈을 끌어들인 것이 자신이었기 때문에, 스토킹이 시작될 때 적극적으로 막아주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유빈을 무작정 탓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캐빈의 가슴앓이가 시작됐다. 느껴본  없었던 자신을 거부하는 여자에 대한 갈망이 돌이 되어 가슴 한켠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자신감에 차서 유빈에게 장난스럽게 짝사랑이라는 말을 던졌던 게 후회됐다.

그 단어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울 줄은 몰랐다. 오늘 유빈이 퇴근하고도 집에 오지 않았을 때 가슴 속의 돌이 요동쳤다. 1분, 1분 시간이 지날 때마다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위치추적을 했다.

유빈이 창식과 같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돌덩어리가 폐를 짓누르는 듯 숨쉬기가 어려웠다. 당장 프로텍으로 달려가려고 차에 시동까지 걸었지만 창식과 자신의 사이에서 유빈이 곤란해질 것 같아 유빈이 프로텍에서 나오길 기다렸다.

유빈이 무사히 나온 걸 확인했을 때 비로소 숨쉬기가 조금 편해졌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떠나버렸다. 캐빈이 스토커라는 잔인한 의심만 남긴 체로. 다시 위치 추적을 할 수도 없었다.


*

캐빈을 남겨놓고 떠난 유빈은 길거리 음식으로 저녁을 때우면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려 하룻밤 재워줄 수 있냐고 물어봤지만 늦은 밤에 선뜻 방을 내줄 수 있는 친구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모텔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와 오늘 겪은 일들로 쉽게 잠들기 어려웠다. 한참을 뒤척거리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겨우 잠들었다.

다음  아침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 알람에 잠을 깼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알람을 끄고 오늘이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토요일이라는 걸 확인하고 다시 잠들었다. 몇 시간 뒤 유빈은 눈가에 아른거리는 햇빛을 느끼며 눈을 떴다.

이불에서 나와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났다.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이 울렸다. 몽땅 지워진 연락처 때문에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긴장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네. 민유빈입니다.”
“야 너 동기끼리 ‘민유빈입니다’가 뭐야.”

익숙한 목소리였다. 대학 동기 필문이었다. 같이 붙어 다니면서 술도 자주 마시고 사귀는  아니냐고 오해도 받을 만큼 친하게 지냈던 친구였다.

“어. 필문아. 미안 전화번호부가 날아갔어.”
“그래? 어쩌다가? 민뉴민뉴 잘 지내?”

대학생 때와 하나도 변하지 않은 필문이의 목소리와 거침없는 말투에 유빈은 웃어버렸다. 필문이는 유빈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자기 말을 계속했다.

“너 졸업할 때 보고 우리 한 번도  봤네. 연애는 하고 있어?
“왜 남자 소개라도 해주게?”
“그렇지. 민유. 우리는 역시 마음이 통해. 척하면 척이야 우리보다 세 살 많고 우리학교 공대 나왔어. 잘생겼어. 진짜로. 콜?”

농담 삼아 던져 본 말에 치고 들어오는 필문이의 말에 당황한 유빈이  발 뺐다.

“아니야. 나 바빠.”
“야야. 민유. 우리 나이에 그렇게 빼면 연애 못 해.  그러다가 선보고 결혼해야 될 수도 있다? 오늘 내일 쉬잖아. 한 번만 만나 봐. 만나보고 아니면 차면되지 나 이번에 취직한 회사 선배란 말이야. 한  만나보고 아니면 그다음엔 암말 안 할게. 응? 나  도와주라. 사진 보낸다? 동기 사랑?”
“나라 사랑.”

필문이의 막무가내식 부탁에 유빈은 어쩔  없이 승낙했다. 필문이에게 자신이 소개팅에 나갈 수 없는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하기도 곤란했다. 잠시 후 유빈과 필문이는 옛 친구로 돌아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깔깔거리며 나누었다.

유학 가다가 비행기 놓쳐서 인천 공항에서 노숙한 친구 이야기, 이제 곧 은퇴하시는 교수님 이야기, 대학 때 같이  마시다 술값 없었던 이야기, 벌써 결혼하는 친구 이야기 등등. 한참을 그러고 낄낄댔다. 오랜만에 스트레스가  날아간 것 같았다. 각자 사는 이야기들도 오갔다. 필문이는 졸업하고 잠깐 해외에 봉사활동 하러 돌아다니다가 몇 달 전에 취직을 했다고 한다. 취직한 곳은 다름 아닌 프로텍이었다.

필문이와의 전화를 끊은 유빈은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과 가장 친했던 친구가 하필이면 프로텍에 입사했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내일 소개팅하기로 한 남자가 프로텍 직원이라는 것도 석연치 않았다. 소개팅을 취소할까 하고 휴대폰을 들었는데 소개팅남의 사진과 필문이의 카톡이 도착해 있었다.

-우리 이태식 선배야. 내일 잘 부탁해. 완전, 완전 고마워.

유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못 나가겠다고 말하기가 굉장히 곤란해졌다.

방을 둘러보니 어제 자기 전에 불편해서 벗어 둔 옷들이 보였다. 유빈이 좋아하는 늘 입고 자던 잠옷은 캐빈의 집에 있었다. 모텔 리셉션에서 퇴실 시간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왔다. 유빈은 바지와 셔츠를 주섬주섬 챙겨 입고 로비로 내려가 며칠 더 머물겠다고 말하고 숙박료를 냈다.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거울을 보니 어제 출근할 때부터 입고 있었던 오피스룩이 보였다.

이대로 입고 소개팅에 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갈아입을 속옷도 없었다. 하지만 옷을 가지러 캐빈의 집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침대 위에 올려 둔 바지와 셔츠를 다시 주워 입었다. 속옷은 고민하다가 상의만 입기로 했다.

모텔에서 나와 근처 백화점으로 향했다. 속옷 세트 하나와 소개팅에 입고 나갈 원피스를 장만했다. 조금 떨어진 의류 매장에도 들러 편하게 입을  있는 옷가지 몇 벌과 편하게 신을 수 있는 단화 한 켤레를 샀다. 화장품 샵에도 들러 기본 화장품들을 구입해서 다시 모텔로 돌아갔다.

다음 날 유빈은 소개팅에 나가 필문이가 보내준 사진으로만 봤던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자신을 프로텍 기술팀의 이태식 대리라고 소개했다. 유빈도 간단하게 이름과 나이를 소개하고 저녁 먹었다. 태식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유빈은 공대 나왔다는 말에 가졌던 선입견이 사라졌다.

여자 앞에서 한마디도  하고 긴장해서 쭈뼛대는, 납치당하기 직전의 자신을 버리고 퇴근해버린 황 대리 같은 분이 나올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지만 태식은 전혀 달랐다.

유려한 말솜씨와 적절한 맥락에서 터지는 가벼운 유머. 모두 유빈의 마음에 들었다. 사진으로 봤던 것만큼 잘생겼고, 꾸준히 운동하셨는지 셔츠 아래로 엿보이는 몸도 굉장히 좋았다. 저녁 식사도 맛있었고 완벽한 소개팅인  같았다. 뭇 소개팅처럼 식사를 마친 유빈과 태식은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카페에서 나와 대로를 걷다가 인파에 휩쓸려 서로를 잃어버릴 뻔한 유빈과 태식은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태식이 자연스럽게 유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골목을 조금  걸었다. 곧 해가 졌고 유빈과 태식은 달빛을 받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처음 만나는 날 손까지 잡았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스토커만 아니었다면, 이 남자가 프로텍 직원만 아니었다면 진지하게 교제해 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키스, 그리고 아마 결혼까지 유빈의 상상이 이어지고 있을 때 골목 끝에서 스산한 기운을 풍기는 한 남자가 나타났다.

유빈은 태식의 손을 떨쳐버렸다. 그리고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골목 끝에서 나타난 남자가 품에 손을 넣더니 사시미를 꺼내 들었다. 화장실에서, 계천에서, 택시에서 유빈을 괴롭히던 살수였다.

유빈은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태식은 유빈과 살수를 번갈아 보며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러는 동안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살수는 태식을 향해 사시미를 내질렀다. 택시에서의 악몽이 되살아난 유빈은 골목길 벽에 붙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또 피가 낭자할 것 같았다.

그런데 비명 소리는 없었다. 언젠가부터 익숙해져 버린 비릿한 피 냄새도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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