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33. 사랑해, 진심으로
반면에 왕창식 부회장은 유빈을 배려하는 듯하면서도 상황과 유빈의 심리를 교묘히 통제하고 있었다. 유빈은 예의를 잃지 않으면서도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올 방법을 고민했다.
“점심 즈음에 만날 장소를 바꿨으면 좋겠다고 문자 드렸었는데 혹시 못 받으셨나요?”
왕창식 부회장이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띠며 여유롭게 받아쳤다.
“오늘 오전에 시작한 회의가 길어져서 문자 주셨을 때 미쳐 확인을 못 했습니다. 저희 회사는 회의 중에는 임직원 모두가 휴대폰을 끄는 걸 원칙으로 해서요. 죄송합니다. 오시기 직전에 주신 문자 읽었는데 이미 약속 시간이 너무 가까워져서 장소를 바꾸자고 말씀드리기가 곤란했습니다. 일단 제 사무실에서 뵙고 원하는 곳으로 모시고 가려고 생각 중이었습니다. 마땅히 생각해두신 곳이 없다면 제가 근사하게 같이 저녁 식사할 수 있는 곳 몇 군데 추천해드려도 괜찮고요.”
유빈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겨우 입을 뗐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은 왕창식 부회장에게 끌려다니고 있었다.
“아니오. 저녁 식사는 이따 선약이 있어서 말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무릎 위에 올려 둔 유빈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가 깍지가 풀렸다. 유빈은 가방에서 검은 봉지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로 했다.
“저한테 이걸 보내신 분이 부회장님이신가요?”
왕창식 부회장은 봉투를 끌어당겨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유빈을 쳐다보고 다시 봉투의 내용물을 보기를 반복했다. 그 안에는 스토커가 유빈에게 보냈던 딜도 팬티와 애널 플러그가 들어있었다.
“이게 뭔가요? 아니오. 이것들이 뭔지는 알 것 같습니다만 이걸 저한테 보여주시는 이유가 뭔가요?”
남자 앞에서 성인 용품을 늘어놓은 꼴이 된 유빈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왕창식 부회장의 시선을 피하며 황급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한숨을 돌렸다. 자신이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는 것과 스토커가 자신에게 저지른 끔찍한 짓들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중간 중간 왕창식 부회장의 표정을 살폈지만 가끔씩 차를 마실 뿐 눈에 띠는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방금 보여드린 게 스토커가 저한테 보낸 물건이에요. 11년 전에도 저한테 자위 기구를 보내셨잖아요. 그래서…… 사실은 부회장님이 스토커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왕창식 부회장이 봉투를 갈무리해 유빈에게 다시 건네며 말했다.
“방금 말씀하신 일들 무척이나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닙니다. 11년 전에도, 지금도 저는 유빈 양에게 이런 물건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
왕창식 부회장의 부정에 유빈은 고개를 떨궜다. 왕창식 부회장이 자신의 빈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11년 전 유빈 양과 대화하던 제 컴퓨터가 해킹당했었습니다. 굉장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유빈 양이 저한테 알려주셨던 연락처와 주소도 그 해커의 손에 넘어갔었습니다. 아마 그때 해킹했던 사람이 유빈 양에게 그런 부끄러운 물건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 해커는…….”
고개를 든 유빈이 왕창식 부회장과 눈이 마주쳤다.
“저희 형이었습니다. 이름은 케빈입니다. 지금 당하고 계시는 스토킹도 저희 형의 소행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유빈의 고개가 다시 떨궈졌다. 서로를 스토커라고 지목하는 형제 사이에서 다시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잘 마셨습니다.”
왕창식 부회장이 부회장실을 나가려는 유빈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만요. 유빈 양. 말씀을 들어보니 지금 위험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보호해드리겠습니다.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시는 게 어떠신가요? 필요하시면 저희 프로텍에 일하실 자리도 마련하겠습니다.”
유빈이 반대 손을 들어 자신의 손목을 잡은 왕창식 부회장의 손을 눌러 떼어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도 말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유빈이 나간 뒤 왕창식 부회장은 팔을 들어 탁자 위의 다기 세트를 쓸어내렸다. 사기(沙器)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그 소리를 듣고 비서가 들어왔지만 왕창식 부회장은 손짓으로 나가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다가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 이건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민유빈은 저한테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11년 전에도 지금도 그 아이는 제게 아닙니다. 지금 민유빈이 누구랑 같이 살고 있는지는 아십니까? 기다려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
프로테크놀로지를 나온 유빈은 정처 없이 도심을 맴돌았다. 갈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저녁 식사 약속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고, 여전히 스토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케빈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허기를 달래려고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으로 들어갔다. 햄버거를 주문하고 진동벨을 들고 기다리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케빈이었다. 유빈은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가방에 도로 집어넣었다. 진동벨이 울렸고 햄버거와 음료를 받아서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 유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유빈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케빈이 유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전화 왜 안 받아?”
하마터면 쟁반을 놓칠 뻔한 유빈이 근처 테이블에 쟁반을 올려놓으며 대답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요?”
케빈이 평소와는 다르게 우물쭈물하다 대답했다.
“미안. 휴대폰 위치 추적했어.”
왕창식 부회장은 케빈이 스토커일 거라고 했다. 유빈의 목소리가 공공장소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정도로 높아졌다.
“정말 스토커세요? 제 휴대폰에 직접 지우셨던 위치추적 앱 다시 설치하셨어요?”
“난 앱 없어도 추적할 수 있어. 그것보다 너…….”
케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빈이 패스트푸드점을 나갔다. 케빈은 급하게 유빈을 따라가 손목을 잡았다. 왕창식 부회장이 자신의 손목을 잡았을 때의 소름 돋았던 느낌이 되살아났다.
유빈의 고함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이거 놔!”
케빈의 손을 뿌리친 유빈이 그대로 패스트푸드점을 나가 차에 올라탔다. 케빈도 달려나가 유빈의 차 문을 열었다.
“위치추적한 건 정말 미안해. 너무 걱정됐어.”
유빈이 안에서 차 문을 잡아당겼지만 케빈의 완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차 문을 잡은 채로 케빈이 말했다.
“나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해본 거 네가 처음이야. 그리고 이것도 진심이야. 사랑해.”
유빈과 케빈의 시선이 교차했다. 먼저 시선을 피한 쪽은 유빈이었다.
“저도 죄송해요. 당신이 스토커인지 아닌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위치추적 해보셨으면 이미 아시겠지만 오늘 왕창식 부회장을 만났어요. 당신 동생이요. 그쪽에서는 당신이 스토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누구를 믿어야 할지 어떻게 알 수 있죠?”
차 문을 붙잡고 있던 케빈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과거에 너한테 나쁜 짓 했던 사람이 누구든 지금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걸 믿어주면 안 될까?”
유빈은 대답 대신에 차 문을 끌어당겼다. 케빈을 뒤로한 체 유빈의 차가 도로를 질주했다.
멀어지는 유빈의 차를 보며 케빈은 방금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봤다. 도저히 평소의 자신답지 않은 말들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해.’
케빈이 처음에 유빈에게 가졌던 감정은 동생이 갖고 싶어 하는 여자에 대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다. 창식이 광적으로 유빈에게 집착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반쯤은 동생이 갖고 싶어 하는 장난감을 먼저 갖는 형의 짓궂음으로, 나머지 반쯤은 프로텍 경영권을 독차지한 창식에 대한 복수심으로 유빈을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로 데려왔다.
그리고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가졌던 아이가 금세 싫증을 느끼는 것처럼 곧 잊어버렸다. 가끔 유빈의 업무 평가표를 들여다보긴 했지만, 그녀가 받는 대우 이상으로 훌륭하게 일하고 있었다. 경영 측면에서 보더라도 성공적인 인재 영입이었다.
그렇게 유빈을 기억 저편에 묻어둔 체 3년이 지났다. 그리고 스토킹이 시작되면서 케빈의 삶에 유빈이 다시 등장했다. 케빈이 따르는 검은 십자가 교단의 지밀환 교주는 스토킹 계획을 세우고 창식을 끌어들였다.
지밀환 교주는 창식 몰래 케빈에게도 스토킹에 동참하라고 제안했지만 케빈은 거절했다. 해킹 기술을 악용해 힘없는 여자를 괴롭힌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컴퓨터 기술은 좋은 일에 쓰일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교단의 신도로서 교주가 진행하는 계획을 드러내놓고 반대하기는 힘들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이 일에 유빈을 끌어들인 것 같다는 미안한 마음에 그저 멀리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컴퓨터 바탕화면을 바꾼다든가, 괴 소포를 보낸다든가 하는 정도의 장난처럼 시작했던 스토킹은 점점 잔혹해져 갔다. 유빈에게 살해 위협을 가하기도 했고, 공공장소에서 유빈을 능욕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해킹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