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1화 〉31. 11년 전 (31/70)



〈 31화 〉31. 11년 전


무택의 프로테크놀로지 업무용 컴퓨터를 해킹했다. 케빈이 쌓아온 실력 앞에 무택의 컴퓨터 보안은 쉽게 뚫렸다. 그리고 무택의 컴퓨터에서 프로테크놀로지 후계 계승 계획 문서를 보게 되었다.  계획에서 케빈은 철저하게 배제돼 있었고 프로테크놀로지 전체를 창식에게 상속하기 위해 물밑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자신이 프로테크놀로지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자신을 소외시키려는 계획서를  케빈은 극도로 분노했다.

자신에게는  번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케빈과 창식은 이제 갓 고등학생이었는데도 벌써 상속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케빈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케빈은 입수한 문서를 들고 무택을 찾아갔다. 자신의 컴퓨터 보안 실력이 창식보다 월등히 나은 대도 왜 프로테크놀로지를 창식에게 물려주려고 하는 것인지 따지며 회사 지분을 달라고 요구했다. 케빈의 태도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무택은 케빈에게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넌 서자(庶子)야.”

감정이 격해질 대로 격해진 케빈이 무택에게 폭언을 쏟아 부었다.

“사생아 주제에 그 동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러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프로텍 회장 컴퓨터가 고등학생 해커한테 뚫렸다는  알면 사람들 반응이 어떨까요? 해킹할 때 사용한 제가 만든 프로그램 소스코드, 해킹하면서 확보한 프로텍 회장님 컴퓨터 보안 프로그램 소스 코드  갖고 있는데 이걸 뿌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 말을 들은 무택이 케빈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그날로 소스코드가 저장돼 있던 케빈의 컴퓨터는 압수되었다. 그일 때문이었을까, 케빈은 몇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쫓겨나듯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끄덕이며 케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빈이 와인 잔을 들어 케빈에게 건배를 제안했다. 슬픈 가정사에 이렇게라도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와인 잔과 스트레이트 잔을 부딪혀 건배를 한 케빈은 비워진 잔에 다시 보드카를 따르며 말했다.

“내가 너무 칙칙한 얘기만 했나? 그래도 미국에서 재밌었어. 컴퓨터 엔지니어링 전공으로 대학을 다니긴 했는데 교수들 실력이 나보다 못하더라. 시시해서 학교도 잘 안 나갔어. 정부기관 해킹했다가 경찰한테 추적당해서 도망 다니기도 하고, 갱단한테 의뢰받고 해킹했다가 총 맞을 뻔한 적도 있고. 총은 뭐, 내가 쏘기도 많이 쐈지.  총도 되게 잘 쏜다?”

말끝마다 붙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케빈의 잘난 척에 유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진짜 잘 쏘는데.”

케빈의 핀잔에도 멈추지 않던 유빈의 웃음이 케빈의 다음 말에  멎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너를 처음 알게 됐어.”

케빈이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잠깐 아버지의 집에 머무르며 창식과 같이 지내게 되었다.  때 창식은 대학원에 재학 중이었다. 연구 단계에 있는 어떤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라고 했지만 케빈에게는 무슨 프로그램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호기심이 동한 케빈은 창식의 컴퓨터를 해킹해 보았다. 창식이 만들고 있던 프로그램을 찬찬히 뜯어본 케빈은 한참 동안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메시지를 전송하고 상대가 답장할 경우 그게 맞는 간단한 대답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케빈이  연구 계획서에는 광고주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창식은 그 프로그램을 채팅 사이트에 연동해 불특정 다수의 여성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메시지를 받은 여성이 프로그램이 보낸 메시지에 반응할 경우 이름과 전화번호, 주소를 물어보고, 사진 전송을 요청하도록 설정되어 있었고, 창식은 그렇게 수집한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었다. 그러다 유독 창식의 눈에  여자가 있었다.

유빈이었다. 유빈의 기본 정보를 확인한 창식은 자신이 직접 유빈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유빈이 피겨스케이팅 선수였다는  안 뒤로 유빈이 참가했던 대회의 동영상들을 수집했다.  정보들을 종합해 유빈의 데이터베이스를 따로 만들어 관리했다. 그리고 집요하게 유빈에게 만나자고 요구했다.

케빈의 말을 들은 유빈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소름은 점점 퍼져 목을 거쳐 턱 아래까지 올라왔다.

“그거 진짜로 저 맞는 것 같아요. 중학교 2학년 때였나? 그런데 그 사람이 프로테크놀로지 후계자 왕창식 부회장이라고요?”

케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빈은 잠깐 화장실에 갖다 오겠다고 말하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용변을 보고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을보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고 차가운 물을 틀어 세안했다. 다시 거울을 보고 흐려지는 초점을 바로잡기 위해 눈을 깜박였다. 거울 속에 11년  중학교 2학년이었던 자신의 모습이 비췄다.  때는 잘 몰랐지만 예쁜 얼굴이었다.

유빈은 초등학생 때부터 스케이트를 탔다. 한때 전국 대회에서 상도 타면서 마이너 종목이었던 피겨스케이팅의 유망주로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렸지만 중학생이 되고 몸이 자라나면서 피겨스케이팅이 점점 힘들어졌다.

중학교 1학년 때 이미 C컵이었던 가슴은 빠른 동작을 취하기에 지나치게 무거웠다. 가슴의 무게 때문에 회전할 때 무게 중심을 잡기도 너무 힘들었다. 쇼트트랙이나 스피드 스케이팅으로의 종목 전환도 생각해 보았지만 다른 종목에서 넘어온 선수들을 홀대하는 체육계 관행에 유빈의 부모님은 운동을 그만둔다는 결정을 내렸다.

몇 년 동안 자신의 삶이었던 얼음판을 떠난 유빈은 무료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운동만   탓에 친구들도 많지 않았고, 훈련과 대회 때문에 자주 빠졌던 학교에 적응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다 그 당시 유행하던 채팅 사이트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접근해오는 수많은 남자들을 보면서 왠지 모를 우쭐함이 느껴졌다. 2차 성징을 맞은 사춘기 소녀의 이성에 대한 설렘이었을까, 유빈은 채팅 사이트에 점점 빠져들었고, 몇몇 남자들과 연락처와 사진을 교환하기도 했다.

그 남자들 중 유빈에게 특히 집요하게 접근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연락처뿐만 아니라 주소를 달라고 했고, 채팅이 아니라 실제로 만나자고 거듭거듭 요구했다. 시간을 돌려 그때로 돌아갈  있다면 차단해 버렸어야 했던 남자였지만, 그 나이대의 왕성한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유빈은  남자에게 자신의 주소를 알려주고 만날 시간과 장소도 잡았다.

그런데 만나기 전 날 유빈의 집에 유빈이 수신자로 되어 있는 소포가 배달되었다. 그 소포를 뜯어본 유빈의 어머니는 유빈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그 안에 들어있던  진동 기능이 있는 소형 딜도였다. 당황하고 억울했던 유빈은 채팅 사이트에 접속해 그 남자에게 따져 물었다.  그런 걸 보냈냐고. 남자는 미안하다고만 대답했다.

다음  유빈은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로 엄마한테 혼난 게 너무 억울했다. 자위 도구를 보내는 변태 같은 남자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도  남자는 계속해서 유빈에게 만나달라고 애원했고 결국 유빈은 딱 한 번, 그 남자를 만났다.

실제로 본 그 남자는 유빈이 받았던 사진과는 너무 달랐다. 못생겼고 볼품없었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그 남자와 채팅을 하게 됐을 때, 유빈은 솔직하게 못 생겨서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남자와는 연락이 끊어졌다.

그런데 지금 케빈은 그 남자가 프로테크놀로지 후계자 왕창식 부회장이고, 자신을 스토킹하는 그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유빈은 온몸에 기운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세면대에 손을 짚고 섰다.

딱 한 번 스토커와 통화했을 때 그는 유빈이 잘못을 했다고 말했다. 케빈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정말로 자신이 그때 만났던 그 볼품없었던 남자가 스토커라면, 스토커가 말하는 잘못은 그때 유빈이 그 남자를 거절한 것일지도 몰랐다. 한편으로는 황당했다. 여자로서 남자의 대쉬를 거절한 게 왜 그렇게 흉악한 범죄의 타겟이 되어야  정도로  잘못인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유빈은 케빈에게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유빈이 화장실에서 나와 식탁으로 돌아갔을 때 케빈은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비틀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빈은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자신의 휴대폰을 열어 왕창식 부회장과 주고받았던 메시지들을 확인해 보았다. 내일 저녁 7시에 그 남자와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왜 프로텍 본사에서 만나자고  걸까?’

괜한 의심일지도 몰랐지만 유빈은 자신이 마치 스토커의 소굴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부러 저녁 식사 시간에 만나자고 했는데도 굳이 사무실로 오라는 것도 수상했다. 다시 메시지를 보내 다른 약속장소를 잡을까 고민했지만 휴대폰을 울리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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