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30. 집안 사정
잠시 후 비서는 수연의 무례함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태도로 수연을 창식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수연은 이죽거리듯 비서를 노려보며 들어갔다. 집무실에서 창식이 수연에게 인사차 안부를 물었다.
“잘 지냈어? 요즘 자주 못 봤네. 교수님 고희연 때가 마지막이었지? 교수님은 잘 계시지?”
“응. 아빠 잘 있어. 오빠 아버지 병원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셔?”
창식이 잠깐 머뭇거리다 말했다.
“많이 안 좋으셔.”
“그럴 것 같더라. 아니면 왕 회장님 무서워하는 오빠가 이런 일을 할 리가 없지.”
수연의 무례한 말에 창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수연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가방에서 태블릿 PC를 꺼내 파일 하나를 열어 창식에게 내밀었다. 아버지 지밀환 교수의 컴퓨터에서 발견한 유빈의 스토킹 음모에 관한 문서였다. 자신의 이름이 여러 번 언급된 서류를 보며 창식의 눈썹이 매섭게 꿈틀거렸다.
“이걸 네가 왜 갖고 있어?”
“해킹은 오빠들만 하는 줄 알아? 나도 이거 끼워줘.”
창식이 태블릿 PC를 수연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수연아. 이거 지워. 모른 척해. 네가 끼기엔 너무 큰일이야.”
“아니. 이건 내 일이야. 케빈 오빠가 이 년을 좋아해. 오빠도 알잖아. 내가케빈 오빠 먼저 좋아했던 거. 이 년은 오빠가 데려가. 데려가서 케빈 오빠한테 꼬리 못 치게 단단히 단속해. 내가 도와줄게.”
창식이 고민하는 듯 양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며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네가 필요한 일이 있을 것 같아.”
“우리 아빠한테는 비밀이야.”
“알겠어.”
수연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프로테크놀로지 건물을 나왔다. 수연을 배웅한 창식은 서랍에서 며칠 전 비서에게 받은 쪽지 한 장을 꺼냈다. 그 쪽지에는 유빈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걸 전해준 비서는 유빈이 창식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창식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유빈과의 11년 만에 재회였다. 휴대폰을 들어 쪽지에 적힌 번호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 안녕하세요. 프로테크놀로지 왕창식 부회장입니다. 민유빈양께서 저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답신 주시고 프로테크놀로지 본사로 오시면 마중 나가겠습니다.
* * *
새로 산 휴대폰에 기본 설정을 하고 앱을 다운 받고 있던 유빈이 왕창식 부회장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왕창식 부회장만큼이나, 하지만 다른 이유에서 유빈의 가슴이 뛰었다. 케빈이 스토커로 지목한 사람과 드디어 연락이 됐다.
기다리고 있던 연락이었지만 막상 받고 나니 뭐라고 답장해야 할지 난감했다. 사무적으로 만날 약속을 정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대놓고 당신이 스토커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문자 메시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유빈이 스토커라면 이해할 수 있을 답장을 보냈다.
- 그동안 보내주신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한참 후에 답장이 도착했다.
- 네?
유빈은 휴대폰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정말 아닌 건지 아닌 척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왕창식 부회장은 스토커라면 반드시 이해할 수 있는 문자를 못 알아들었다. 만약 왕창식 부회장이 스토커가 아니라면 대단히 실례되는 일이었다. 유빈은 황급히 다시 답장을 보냈다.
- 죄송해요. 다른 분께 보내야 할 문자를 잘못 보냈네요. 혹시 내일 저녁 7시에 찾아 봬도 될까요?
이번엔 답장이 빨랐다.
- 얼마든지요. 내일 뵙겠습니다.
답장을 받은 유빈은 자신이 지금 스토커의 본거지로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이 몰려왔다. 언젠가 한 번은 만나야 할 사람이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예의상 마지막 답장을 보냈다.
- 네. 감사합니다.
그때 밖에서 케빈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우븨인!”
유빈은 마치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후다닥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랬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자기가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아 휴대폰을 꺼내 손에 들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 식탁에는 케빈이 방금 사 온 식재료가 쌓여있었다.
케빈은 유빈이랑 같이 살게 된 기념으로 자기가 요리를 해주겠다고 했다. 케빈이 요리하는 동안 유빈은 부엌을 들락거리며 자기가 도와줄 게 없냐고 물어봤지만, 그때마다 케빈은 그냥 식탁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잠시 후 스테이크와 파스타 샐러드로 차려진 만찬이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찬장에서 꺼내온 보드카도 곁들여졌다. 케빈이 스트레이트 잔에 따라준 보드카를 생각 없이 한 번에 들이킨 유빈은 처음 마셔보는 독주에 연신 기침을 토해냈다.
케빈은 유빈은 안쓰럽게 보더니 유빈에게는 와인을 가져다주고 자신은 계속 보드카를 마셨다. 만찬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둘은 팬텀 유통 직원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황우현 대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둘 다 깔깔거리며 웃었다. 바라던 대로 유빈과 같이 살게 돼서 기뻤던 걸까, 케빈의 보드카 병은 빠르게 비워졌다. 식탁의 음식이 줄어들고 가득 차 있던 보드카 병이 반쯤 비워졌을 때 케빈이 화제를 전환했다.
“우리 아버지가 프로테크놀로지 회장이잖아. 그런데 나는 왜 이러고 있는지 알아?”
유빈이 입에 머금고 있던 와인을 삼키며 대답했다.
“가정사가 복잡하시다고 저번에 말씀하셨어요.”
케빈이 잔에 남아있던 보드카를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복잡해. 아주 많이.”
이야기는 수십 년 전, 케빈이 태어나기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지방의 유지였던 케빈의 할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라며 도(道) 내에서 수석을 다투던 케빈의 아버지 왕무택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집을 떠나 서울로 오게 되었다.
서울에서 한 여인을 만난 왕무택은 그녀와 사랑에 빠졌고 둘의 관계는 미래를 약속할 만큼 깊어졌다. 하지만 케빈의 아버지는 그녀를 자신의 집에 데리고 갈 수 없었다. 과거 시골에서 으레 그랬듯 무택은 그 지역 내에 정해진 혼처가 있었다. 혼담은 무택이 대학을 졸업하는 대로 혼례를 올리는 데까지 진행되어 있었고, 무택은 보수적인 아버지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무택이 대학을 마칠 무렵 혼담은 무르익어 결혼 날짜를 의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때 무택이 서울에서 만났던 여인이 아기를 갖게 되었다. 고민에 빠져있던 무택은 굳은 결심을 하고 자신의 아기를 가진 여인을 데리고 시골집으로 갔으나 예상했던 대로 일은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셔 무택을 집에서 쫓아내겠다고 하셨고, 혼담이 오가던 집안에서도 무택에게 직접적으로 난색을 표해왔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집안에서 결혼을 약속한 여인 사이에서 갈등하던 무택에게 화를 누그러뜨리신 아버지가 찾아오셨다.
“남자가 양가(兩家) 살림하는 거 흠나는 거 아니다.”
무택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한발 양보하신 아버지를 더 이상 실망시킬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하지 말았어야 할 선택을 한 무택은 아버지가 정해 준 여인과 결혼하되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인과의 관계를 지속하기로 했다.
무택이 집안의 뜻을 거스르는 선택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또 있었다. 무택이 사업을 하길 원했던 걸 알고 계셨던 아버지는 자신이 정한 혼처와의 결혼을 전제로 자금 지원을 약속하셨고, 그 지원에는 처가의 자금이 포함돼 있을 거라고 하셨다. 무택이 시골집 마당에서 전통 혼례를 올리던 날, 서울에서는 케빈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듬해에 무택의 둘째 아들, 창식이 태어났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무택이 설립한 프로테크놀로지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 컴퓨터 보안 업계를 사실상 독점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바깥 일이 이렇게 술술 풀려가던 것과는 반대로, 무택의 집안에서는 결혼 당일부터 심어졌던 불화의 씨앗이 서서히 싹트고 있었다.
케빈의 어머니와 창식의 어머니 사이의 다툼이 잦아졌고, 특히 호적에 올라가 있지 않았던 케빈 어머니의 불안감은 점점 커져갔다.케빈을 돌보는 일보다 무택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거나 창식의 어머니를 견제하는 데에 온 시간과 노력을 쏟았고, 그런 환경에서 케빈은 외롭게 커갔다.
반쯤은 케빈 어머니의 집착에 지쳤기 때문에, 나머지 반쯤은 정실부인이 아닌 여인과의 관계가 대외적으로 드러나는 게 부담스러워졌기 때문에, 무택은 점점 케빈과 케빈의 어머니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럴수록 케빈 어머니의 불안과 집착은 심해졌고, 케빈이 나이가 들어 자신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받을 수 없는 사생아라는 걸 자각할 무렵, 케빈은 컴퓨터와 해킹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프로테크놀로지 사장이었던 무택을 통해 당시만 해도 희귀했던 관련 서적들, 정보들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건케빈으로서는 행운이었다. 스스로 연구하고 가끔은 프로테크놀로지 직원들을 통해 배우기도 하면서 케빈의 해킹 실력은 점점 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생이 된 케빈은 자신이 컴퓨터에 손댄 창식과 주먹다짐까지 하며 싸운 케빈은 무택에게 크게 혼났다. 케빈은 창식보다 자신이 더 혼난 이유를 사생아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전에도 줄곧 창식은 잘못해도 용서받았지만 자신은 심하게 꾸지람을 들었어야 했다. 속으로 화를 삭이다 폭발한 케빈은 해서는 안 될 위험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