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화 〉29. 구출과 동거, 수락 (29/70)



〈 29화 〉29. 구출과 동거, 수락

케빈은 감정이 격해진 수연을 제지하고 유빈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유빈은 자신이 납치당했던 일부터 수연이 자신에게 과도를 휘둘렀던  그리고 자신이 수연을 제압한 것까지 케빈에게 털어놓았다.

수연을 보는 케빈의 시선이 달라졌다. 여동생을 바라보던 오빠의 눈빛은 사라지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죽이려고 했던 자에 대한 분노가 차올랐다. 케빈이 수연에게 묵직하게 말했다.

“수연아. 나가.”

수연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왜 나는 싫은데? 왜 나는 싫고 쟤만 좋은 건데? 오빠. 말해봐. 내가 먼저 오빠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내가 아니고 쟤야?”

케빈이 화를 눌러 참으며 말했다.

“수연아. 나가. 납치범이 여기 있다고 경찰 부르기 전에.”

수연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가방을 챙겨 나갔다. 케빈은 가져온 옷을 유빈에게 건네고 뒤돌아서 유빈이 옷을  입을 때까지 기다렸다. 케빈과 유빈이 침대에 나란히 앉았다. 케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

“같이 살자. 너 진짜 위험해.”
“그래도 동거는…….”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우리 집에  많아. 내가 너랑 자려고 했으면 지금 네가 옷을 입고 있겠어? 그건 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거야. 그런데 네가 마음을열기도 전에 납치되거나 죽는 건 싫거든?”

유빈은 케빈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케빈은 나체로 침대 위에 묶여 있는 유빈을 풀어주고 옷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복잡한, 말하기 어려운 문제가 남아있었다. 유빈은 용기 내어 물어보기로 했다.

“사실은 당신이 스토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케빈이 괴로운 듯 양손으로 이마를 움켜쥐고 말했다.

“저번에 말했잖아. 스토커는…….”

유빈이 케빈의 말을 채갔다.

“당신 동생, 프로텍 왕창식 부회장이라고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당신이 누군지, 제가 당신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 저는 왕창식이라는  뵌 적도 없어요.”

케빈이 중얼거리듯 잘 들리지 않게 말했다.

“아니야. 넌 내 동생을 만난 적이 있어.”

유빈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케빈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유빈의 손목을 잡았다.

“따라와 봐. 보여줄 게 있어.”

유빈은 저항하려고 했지만 케빈의 완력은 거셌고, 끌려가듯 케빈을 따라갔다. 케빈이 유빈을 데려간 곳은 바로 옆집 901호였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유빈을 먼저 안으로 들여보냈다.

케빈이 불을 켜자 유빈의 눈앞에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자신의 집과 같은 구조였지만 그 안에는 생활 집기대신 용도를   없는 온갖 기기들이 즐비했고 바닥에는 어디에서 어디로 연결되는 건지도 알기 어려운 선들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한형석 형사가 윗집을 주의하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리둥절해 있는 유빈에게 케빈이 말했다.

“여기가 스토커가 너한테 접근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아지트야. 저기 형광등 밑에 뚫린 구멍 보여?”

유빈은 케빈이 말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로 바닥에 손가락 하나 정도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케빈이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너한테 형광등 바꾸라고 했던 거 기억나지? 저 구멍들로  집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했어. 내가 처음 여길 발견했을 때 형광등 바로 아래 바닥마다 구멍이 뚫려 있더라고. 내 장비를 동원해서 살펴보니까 그 구멍으로 무선 몰래카메라가 삽입돼 있었어.”

케빈이 다른 기기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할 때 유빈이 물었다.

“잠깐만요. 몰래카메라랑  아지트를 설치한 게 당신이 아니라는 걸 제가 어떻게 믿죠?”

케빈이 괴롭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너를 도와주고 지켜주려는 사람을 믿는 게 그렇게 어려워? 내가  아지트를 만들었으면 너한테 왜 보여주겠어?”

유빈은 반박하기 어려웠다. 자신에게 공포감을 심어서 케빈의 집으로 데려가려는 게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나치게 음모론적이었다. 케빈은 설명하려고 집었던 기계를 내려놓고유빈에게 조곤조곤 말했다.

“솔직히 말할게. 내가 너를 좋아한 건 아주 오래됐어. 네가 팬텀 유통에서 일하기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너를 내 회사, 팬텀 유통으로 스카우트하라고 지시한 건 나야. 가까이에 두고 싶었거든. 네가 팬텀 유통에 들어온 이후로 나는 네 주변의 데이터 흐름을 관찰했었어. 너무 깊숙이들여다보지는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다가 여기, 네  바로 위층에서 수상한 데이터 흐름이 감지됐고, 그걸 추적하다가 여기가 스토커의 아지트라는 걸 발견하게  거야. 데이터가 어디로 전송되는지 추적하다가 스토커가 내 동생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  동생도 IP 우회까지 하면서  걸리려고 공을 많이 들였던 것 같은데 내 실력이  수 위거든.”

케빈의 말을 들은 유빈의 입술이 삐죽삐죽하더니 엉뚱한 질문이 툭 튀어나왔다.

“저를  좋아하는데요?”

케빈이 유빈을 흉내내듯 입술을 삐죽거리다 대답했다.

“거울 봐. 예쁘잖아.”

케빈의 상대가 대답하기 곤란하게 만드는 이상한 화법에 유빈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케빈이 유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 밑에서 계속 살고 싶어?”

유빈은 케빈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아니오.”
“그럼 나랑 같이  거지?”

또다시 나온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 유빈이 화제를 돌리려고 둘러댔다.

“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계속 당신이라고 부르면 버릇없는 것 같고, 사장님이라고 부르기도 어색해서요.”
“자기야 어때? 난 딱 좋은데.”

유빈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가라앉았다.

“이건 정확히 말씀드려야  것 같아요. 지금 짝사랑 중이세요.”

케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래. 괜찮아. 그건 천천히 이야기하기로 하고, 일단 내가 지켜줄 수 있게 같이 살자. 네가 죽어버리면 내가 많이 슬플 것 같아.”

유빈은 계속 케빈에게 말려드는 것 같았다. 아직 케빈이 스토커가 아니라는 확신은 없었다. 케빈이 스토커로 지목한 왕창식 부회장이라는 사람의 말도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유빈이 망설이는 틈에 케빈이 치고 들어왔다.

“집세 없고, 각자 설거지 빨래 각자 하고, 부엌 2개니까 너 하나  하나 쓰고, 세탁기는 필요하면 하나 더 사고, 화장실도 2개니까 각자 하나씩 쓰고. 어때?”

결국 유빈이 항복했다. 연인 사이로서 동거하는 게 아니라는 다짐과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케빈의 집에서 같이 살기로 했다. 스토커에게 쫓기는 유빈으로서는 의탁할 사람이 케빈 외에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삿짐센터에 전화해 당일 서비스로 유빈의 짐을 케빈의 집으로 옮겼다. 유빈은 비용을 걱정했지만 케빈은 무신경하게 자기 카드로 결제했다. 케빈의 짐으로 자신의 짐이 옮겨지는 동안 유빈은 케빈의 차를 같이 타고 케빈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휴대폰이 생각났다. 옷과 함께 수연의 집에 있을 터였지만 그곳에 다시  용기는 나지 않았다. 케빈이 사준 휴대폰이었기에 그 짧은 시간 안에 잃어버렸다는 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케빈에게 부탁해 휴대폰 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휴대폰과 유심칩을 구입해서 나왔다. 케빈이 이번에도 자기 카드를 내밀었지만 유빈은 케빈을 만류하며 자기 카드로 결제했다.

“저도 돈 벌어요.”

케빈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어차피 네 월급도 다 내 돈에서 나가는 거잖아.”

얄미운 말만 골라서 하는 케빈을 유빈이 옆 눈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제가 일해서 받은 거거든요!”

케빈은 지지 않았다.

“오늘 출근도  했으면서.”

유빈은 속으로 저런 남자랑 사귀었다간 피 말라 죽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케빈의 집에 도착한 유빈은 케빈이 지정해준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왼쪽 유두에 남아있던 피어싱을 뺐다.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에 비명이 혀끝까지 닿았지만 케빈한테 들릴까 봐 꾹 삼켰다. 미리 준비해뒀던 휴지로 왼쪽 유두를 감싸 쥐었다. 휴지는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 연거푸 휴지를 바꿔가며 지혈했다.

양쪽 유두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브래지어는커녕 상의도 입기 힘들었지만 집안에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억지로 브래지어 후크를 채웠다. 아직 풀지 않은 이삿짐에서 펑퍼짐한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잠깐 숨을 몰아쉬고나서 새로 산 휴대폰을 들고 침대에 누웠다.

902호에서 쫓겨난 수연이 향한 곳은 프로테크놀로지 본사였다. 사원증을 태그하고 들어가는 직원 뒤에 붙어서 로비 게이트를 통과했다. 그 직원이 수연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신경 쓰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부회장실이 있는 16층을 눌렀다. 부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왕창식 부회장의 비서가 수연을 제지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사원증 보여주세요.”

수연이 앙칼지게 대답했다.

“없어요. 창식이 오빠 만나러 왔어요.”

비서는 부회장의 이름을 직함도 없이 함부로 부르는 수연을 수상하다는 듯이 보며 다시 물었다.

“약속 있으신가요?”

수연의 얼굴이 빨개지며 턱의 퍼런 멍과 대조를 이루었다. 휴대폰을 꺼내 창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나 수연이야. 응. 오랜만이야. 나 지금 오빠 회사인데 누가 나 오빠한테  가게 해. 바꿔줄 테니까 혼내줘.”

수연은 창식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휴대폰을 비서에게 넘겼다.

“네. 부회장님. 백보연 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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