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28. 얌전히 있으라고 했잖아!
유빈이 사는 아파트 바로 위층에 빈 집을 빌렸다. 빌트인(Built-in)으로 대부분의 가구와 집기들이 구비되어 있어서 특별히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계획을 구상하면서 잠깐 들렀다가 유빈과 마주쳤을 때는 마치 잘못하다 들킨 어린 아이처럼 깜짝 놀랐다. 유빈이 지하철에서 자신의 얼굴을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곳에 사는 사람인 것처럼 연기했다. 다행히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 다음 자신이 운영하는 그래픽 디자인 회사를 이용해 팬텀 유통에 접근했다. 팬텀 유통이 유통 독점권을 갖고 있는 그래픽 소프트웨어의 사용권을 구입하겠다고 했다. 자신이 구입하려는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부서가 유빈이 속해있는 부서라는 걸 알았을 땐 쾌재를 불렀다. 사용 계약을 핑계로 늦은 밤 유빈을 자신의 집까지 불러들이는 데에 성공했다.
방해가 되었던 같이 온 남자 사원을 쫓아내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리고 유빈은 수연이 커피에 탄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다. 미리 알아봐 두었던 용역들을 불러 유빈을 준비해둔 감금 장소로 옮겼다. 도망갈 걸 대비해 옷을 벗기고 반항할 걸 대비해 손을 묶었다. 가슴에 예쁜 액세서리도 달아주었다. 생에 처음 해보는 납치였지만 성공적이었다. 뿌듯했다.
* * *
케빈은 온종일 영업 1팀과 사장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유빈이 출근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유빈이 어젯밤 9시에 외근을 나갔다는 영업 1팀 팀장의 보고는 케빈을 불안하게 했다. 몇 번이나 유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유빈의 휴대폰은 꺼져있었다. 자신의 해킹용 노트북을 열어 유빈의 휴대폰 위치를 추적해 보려고 했지만, 꺼져 있는 휴대폰의 위치가 추적될 리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잡힌 유빈의 휴대폰 위치도 수상했다.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동생 수연의 집이었다. 차를 타고 회사를 나가 수연의 집으로 가 벨을 눌렀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때 수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침착하려 애쓰며 바쁘냐고 묻는 수연에게 그렇다고 대답하고 물었다.
“너 어제 민유빈이랑 같이 있었어?”
“응? 민유빈 그게 누구야?”
갑자기 높아진 수연의 목소리가 케빈의 귀에 잡혔다. 수연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게 분명했다. 케빈이 캐물었다.
“잘 생각해 봐. 어제 밤에 어떤여자애 만나지 않았어?”
수연의 톤이 한 층 더 높아졌고 말은 길어졌다.
“무슨 말이야? 오빠 나 질투 나게 하려고 다른 여자 이야기하는 거야? 그러지 마. 그거 되게 잔인한 거야.”
사라진 유빈과 거짓말하는 수연. 케빈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걸 직감했다. 아무래도 수연이 유빈의 행방을 찾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열쇠인 것 같았지만, 거짓말하는 수연을 다독여 유빈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건 힘들어 보였다. 케빈이 전화를 끊었다.
“나 바빠서 먼저 끊을게.”
케빈은 다시 차를 타고 유빈의 집으로 갔다. 초인종을 눌러보았지만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케빈은 유빈의 집 문에 머리를 대고 냉정해지려고 노력하며 생각했다. 가장 수상한 건 수연이었지만, 그 다음 의심할 사람은 역시 스토커였다. 그리고 케빈은 스토커가 유빈의 집 바로 위층 901호를 아지트로 쓰고 있다는 걸 몇 번의 해킹과 미행을 통해 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탈 겨를도 없이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901호 문 앞에 섰다. 해킹으로 알아낸 비밀번호를 입력하려는 순간, 901호가 아닌 옆집 902호에서 절망에 찬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살려주세요!”
유빈의 목소리였다. 심지어 울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사태가 급박하다는 것을 깨달은 케빈이 902호 문 손잡이를 돌렸다. 하지만 비밀번호 도어락으로 잠겨있는 문은 열리지 않았다.
케빈은 급하게 아파트 밖으로 나가 바로 옆 슈퍼에서 밀가루 한 봉지를 사들고 돌아왔다. 손으로 거칠게 포장을 뜯고 밀가루를 한 움큼 집어 비밀번호 패드에 뿌렸다. 자주 사용하지 않는 숫자에서는 밀가루가 그냥 흘러 떨어졌지만 자주 사용했던 숫자에는 그 위에 묻은 손 떼에 밀가루가 엉겨 붙었다. 자주 사용하는 숫자는 ‘2469’ 4개였다. 케빈의 뇌가 열을 내며 회전했다.
‘비밀번호 4자리. 가능한 경우의 수는 24개. 숫자가 중복 사용된 경우는 생각하지 않는다.’
케빈은 차근차근 경우의 수를 시험해나갔다. 중간에 경보음이 울렸지만 도어락 배터리를 뺐다 다시 끼우는 것으로 해결했다. 14번째 경우의 수를 시험했을 때 도어락이 해제되었다. 케빈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침대 위에 묶여 있던 유빈과 눈이 마주쳤다.
도어락 소리를 들으며 누군가 들어오고 있다는 것은 눈치 챘지만, 막상 케빈과 눈이 마주친 유빈은 벗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손과 발이 묶여있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지만, 가슴을 침대로 향하게 해서 가렸다.
유빈이 부끄러워한다는 걸 눈치챈 케빈이 순간 뒤로 돌아섰다가, 최대한 유빈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이불을 덮어 가려주었다. 여자는 손과 발이 묶여 이불에 덮은 채로, 남자는 여자를 보지 않으려고 엉뚱한 곳에 시선을 두며 어색하게 대화가 시작됐다.
“일단 이것 좀 풀어주세요.”
“이불 걷어도 괜찮아?”
“아니오!”
케빈이 유빈이 덮고 있는 이불 안으로 손을 넣어 꼼지락거리며, 유빈의 손목에 묶여 있는 로프를 풀었다. 매듭에 익숙했지만, 보이지 않는 로프를 푸는 건 쉽지 않았다. 케빈의 손끝이 유빈의 몸에 살짝살짝 닿았고 그때마다 유빈이 움찔거렸다. 수연은 꼼꼼하게 매듭을 맺어놓았고 시간은 오래 걸렸다.
케빈이 손목의 로프를 풀어주고 나자 유빈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일어나 앉았다. 발목의 줄은 자신이 풀겠다고 했다. 케빈에게는 아래층 자신의 집에 가서 옷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비밀번호 6304예요. 옷장은 침대 옆에 있어요.”
케빈이 계단을 통해 8층으로 내려갔고, 유빈은 발목의 로프를 풀었다. 가슴에 달린 갈고리도 떼어냈다. 피어싱을 빼려고 했지만 손만 대도 유두에 통증이 느껴졌다. 이를 악물고 오른쪽 피어싱을 떼 냈다. 젖꼭지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며 질겁했다.
유빈이 왼쪽 피어싱을 빼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가 9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분노한 표정의 수연이 타고 있었다. 케빈이 멋대로 전화를 끊어버린 후 수연은 유빈을 없애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케빈이 자신을 계속해서 거부하는 게 유빈 때문인 것 같았다.
케빈이 밀가루를 사러 들렀던 바로 그 슈퍼에서 작은 과도를 샀다. 과도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손발이 묶여있는 유빈이라면 여러 번 찌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죽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겁을 줘 케빈에게서 떼어내기에는 충분할 것 같았다.
수빈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902호 문 앞에 섰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밀가루 봉지와 도어락에 뿌려져 있는 밀가루가 보였다.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을 직감한 수연이 긴장했다. 문을 열기가 두려워졌다. 그냥 돌아갈까 고민했지만 여기에서 포기한다면 유빈을 없앨 기회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피가 흐르는 오른쪽 가슴과 아직 피어싱이 채워져 있는 왼쪽 가슴을 번갈아 내려다보고 있던 유빈이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고, 수연과 눈이 마주쳤다. 수연은 유빈을 묶어 놓았던 로프가 모두 풀려있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허겁지겁 가방에 넣어 두었던 과도를 꺼냈다.
유빈을 겨냥했지만 수연 자신에게도, 유빈에게도 칼끝이 떨리는 게 보였다. 수연은 과도 손잡이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유빈에게 달려들었다. 피겨스케이팅 선수 출신이었던 유빈의 운동감각이 되살아났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과도를 들고 있는 수연의 손목을 걷어차고 그대로 회전해 수연의 턱에 발꿈치를 꽂았다. 과도는 바닥에 뒹굴었고 수연은 생각지도 못한 일격에 쓰러졌다. 가까스로 정신을 잃지 않은 수연이 턱을 붙잡고 떨리는 눈동자로 유빈을 노려보았다.
“얌전히 있으라고 했잖아.”
당황스럽기는 유빈도 마찬가지였다. 얼떨결에 수연을 제압하긴 했지만 나체로 가슴에 피를 흘리며 자신이 쓰러뜨린 사람을 보고 있기가 민망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자신을 납치하고 고문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발차기에 맞은 사람한테 미안해해야 할지, 자신을 납치한 사람한테 화를 내야 할지 헷갈렸다.
유빈이 망설이는 동안에도 유두에서는 계속 피가 나와 유빈의 상체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유빈은 화장실로 들어가 휴지를 갖고 나와 유두를 감쌌다. 그 사이 8층에 내려갔던 케빈이 유빈의 옷가지를 들고 돌아왔다. 바닥에 쓰러져 턱을 감싸 쥐고 있는 수연과 가슴을 휴지로 말고 움켜쥐고 있는 유빈을 번갈아 보며 케빈은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케빈을 보며 수빈이 소리쳤다.
“이게 다 오빠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