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27. 납치범의 사정
유빈은 황당했다. 케빈인지 스토커인지 모를 그 사람 제발 데려가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젖은 목소리는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유빈의 흐느낌이 서러운 통곡으로 바뀌어 갔다. 수연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유빈을 계속 몰아붙였다.
“그리고 너! 왜 내 아빠 관심도 뺏어가는데?”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유빈의 울음소리만 더욱 커졌다. 수연은분을 못 이기겠다는 듯 무기력한 유빈을 짓누르고 유두 고리에 다시 쇠사슬이 연결된 갈고리를 채워 잡아당겼다. 유빈의 비명과 울음이 섞인 소리가 집안에 울렸다. 수빈이 쇠사슬을 놓자 유빈의 울음이 헐떡임으로 바뀌었다. 수연이 유빈에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으며 갈고리를 풀어주었다.
“그러면 안 돼. 알겠지? 나 잠깐 나갔다 올 건데 괜찮지? 얌전히 있어.”
수연은 다시 유빈을 침대로 끌고 와 눕히고 로프를 가져와 유빈의 발목을 묶었다. 유빈은 저항하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수연은 가혹하게 유빈의 유두에 연결된 사슬을 잡아당겼다. 유빈은 기절한 듯이 침대에 눕혀졌다. 아파트에서 나간 수연은 케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바빠?”
핸드폰 너머 케빈이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응. 왜.”
* * *
한국의 1세대 컴퓨터 공학자였던 수연의 아버지 지밀환 교수와 국내 최초로 컴퓨터 보안 회사를 설립한 왕무택 회장은 절친한 친구였고 자연스럽게 두 집안 간의 왕래도 잦았다. 어렸을 때 수연과 케빈, 그리고 케빈의 동생인 창식은 자주 어울려 놀았다.
그러다 성장해가면서 수연은 케빈에게 여자로서 좋아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어쩌면 소꿉놀이할 때 케빈이 아빠 역할을, 수연이 엄마 역할을 맡았을 때부터, 아니면 중학생 때 수연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던 같은 반 남학생을 한 학년 위의 케빈이 혼내줬을 때부터.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수연은 처음에는 장난처럼, 그 후로 몇 번은 진지하게 케빈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지만 그때마다 케빈은 번번이 수연을 거절했다. 수연은 케빈이 늘 그렇듯 까칠해서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결코 케빈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어른들 간의 일로 두 집안이 소원해지고 케빈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떠났다. 케빈이 떠난 이후 대학에 진학한 수연은 때로는 텅 빈 것 같은마음을 달래보려고, 때로는 케빈이 돌아왔을 때 멋진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다는 걸 보여줘서 복수하려고 몇 번의 연애를 거쳤다. 하지만 텅 비었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마음에는 여전히 케빈이 차 있었다. 수연의 연애는 한 번도 오래 가지 못했다.
수연이 대학을 졸업할 때쯤 케빈이 미국에서 돌아왔다. 아버지를 통해 케빈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수연은 공항까지 마중 나갔지만 케빈은 간단한 인사만 하고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택시를 타고 급하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인천공항의 입국 게이트에서 택시 승강장까지 그 짧은 거리를 걸으며 수연은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고, 이미 먹었으면 차라도 같이 마시자고, 비행기 타고 와서 피곤하면 어디 들어가서 쉬는 것도 괜찮겠다고 졸랐지만 케빈은 대답도 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었다. 케빈이 택시 문을 열었을 때 수연은 아직도 오빠를 좋아한다고, 아니 사랑한다고 소리쳤지만 케빈은 수연을 잠깐 응시하고는 그대로 택시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집에 돌아온 수연은 베개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몇 번째 고백이었는지조차 잘 기억나지 않았다. 여자로서 자존심까지 다 버리고 그렇게까지 졸랐는데 제대로 거절도 안 하고 마치 귀찮다는 듯이 택시를 타고 가버린 케빈이 미웠다.
베개를 붙잡고 왜 자신이 거절당하는지 물었지만 베개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울을 보고 물었다. 거울이 못생겼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화장품을 가져와 얼굴에 발랐다. 하지만 흘러내린 눈물과 화장품이 섞인 얼굴은 더욱 추해보였다.
그러고 며칠 후 케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인천공항에서의 일은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귀국 직후에 잡힌 약속이 있었는데 비행기가 연착하는 바람에 약속 시간에 늦어서 그렇게 됐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중요한 약속이라 생각할 게 많았다고도 했다.
수연은 왠지 모를 서러움과 기대감이 섞인 목소리로, 터질 것 같은 울음을 꾹 참으며 물었다.
“그럼 오늘 나랑 밥 먹을래?”
“그래.”
케빈의 그 한마디에 수연은 날듯이 기뻐하며 귀여워 보이는 옷을 골라 입고 평소보다 진하게 화장을 했다. 거울을 보고 나서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미용실에 가서 머리도 새로 만졌다. 만나기로 한 레스토랑에 전화에 예약까지 했다. 그래도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고 설렘을 참지 못한 수연은 한 시간이나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기다렸다.
한 시간이 지났고 약속 시간이 되었지만 케빈은 나타나지 않았다. 삼십분이 더 흘렀지만 수연은 여전히 혼자였다. 레스토랑 직원이 수연에게 다가와 주문할 거냐고 물었다. 수빈은 외로움과 창피함을 느끼며, 조금만 더 있다가 주문하겠다고 말하며 직원을 물렸다.
케빈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케빈은 받지 않았다. 결국 한 시간이 더 지난 뒤 수연은 혼자 레스토랑을 나왔다. 공항에서 바람맞았던 그 날만큼이나 서럽게 울었다. 그날 새벽에 케빈에게서 못 나가서 미안하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지만 괜찮다고 답장하기엔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그 문자를 마지막으로 꽤 오랜 시간동안 케빈과는 연락하지도 얼굴을 보지도 않는 사이로 지냈다. 케빈에게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잊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다 우연히 케빈이 자신의 아버지 지밀환 교수와 같이 일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케빈과 인연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는 걸 안 순간, 케빈을 잊으려고 했던 수연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자신이 케빈을 좋아해왔다는 걸 아버지에게 처음 털어 놓으며, 아버지를 통해 케빈과 약속을 잡았다. 이번엔 케빈도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나왔고 수연은 준비해 간 커플링을 내밀었다. 하지만 케빈은 커플링 상자의 뚜껑을 덮으며 다시 수연에게 내밀었다.
“나 좋아하는 여자 있어. 넌 아니야. 우리 그냥 어렸을 때처럼 즐겁게 오빠 동생으로 지내자.”
수연에게 커플링 상자가 닫히는 소리가 케빈의 마음이 닫히는 소리처럼 들렸다. 집에 돌아온 수연은 누군지도 모를 케빈이 좋아한다는 그 여자를 저주했다. 십 년도 넘게자신이 사랑해온 남자를 채가는 여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케빈에게 전화해 그 여자가 누구냐고 캐묻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았다. 소심하게 문자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 그 여자도 오빠 좋아해?
답장은 며칠 후에 도착했다.
- 글쎄.
- 그럼 그 여자 말고 나 좋아해. 난 오빠 좋아해. 아주 많이.
케빈의 답장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연은 부모님의집에 들렀다가, 집에서 일하던 아버지의 노트북이 켜져 있는 걸 보게 되었다. 나쁜 의도는 없었다. 그저 아버지가 하는 일을 구경하고 싶었던 딸의 호기심이었다. 어차피 봐도 어려운 컴퓨터 프로그램 코드들이 잔뜩 있어서 자기는 이해하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런데 컴퓨터 화면에 떠 있었던 문서는 수연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한참을 빨려 들어갈 것처럼 화면 속 문서를 읽었다. 그 문서에는 아버지가 세운 범죄 계획과 케빈이 좋아하는 여자가 누구인지 쓰여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수연은 되뇌었다.
‘민유빈. 민유빈. 민유빈.’
이 여자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케빈의 사랑을 빼앗아간 것도 모자라 아버지의 관심까지 온통 이 여자에게 쏠려있었다. 수연은 아버지의 컴퓨터에서 보던 문서와 같은 폴더에 있던 파일들을 몽땅 자신의 이메일로 전송했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문서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읽어보았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지만, 수연에게는 그것보다 어디에서 유빈을 만날 수 있는지가 더중요했다. 팬텀 유통 사원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유빈의 회사로 찾아가기는 무서웠다. 그러다 문득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유빈의 자동차 타이어를 펑크 낼 날짜와, 그것 때문에 유빈이 지하철을 타고 출근할 날짜, 시간, 탑승역이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수연은 그곳에서 유빈을 만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과 패션에 힘을 주고 하이힐까지 신었다. 그리고 유빈이 탔을 지하철에 같이 탑승했다. 만원지하철에서 힘겹게 몇 칸을 옮기고 나니 문서에서 사진으로만 봤던 유빈의 모습이 보였다.
말을 걸어볼까, 뒤통수라도 때려볼까 고민했지만 자신보다 월등히 큰 키의 유빈에게 반격이라도 당한다면 곤란할 것 같았다. 몰래 유빈의 앞에 섰다. 그리고 하이힐 굽으로 유빈이 신고 있던 운동화를 밟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소심한 복수였지만 짜릿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의 컴퓨터에서 찾은 문서를 다시 읽어보았다. 문서의 다른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빈이 앞으로 당할 수많은 사건들이 적혀 있었다. 불쌍하다기보다 기뻤다. 자신이 찜해놓은 남자를 채간 여자가 받아야 할 마땅한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소심하지만 복수도 했고 앞으로 유빈이 큰 벌을 받을 것도 알았지만, 그렇다고 케빈의 마음을 유빈에게서 자신으로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수연은 결국 유빈을 자신이 직접 납치하기로 했다. 납치해서 버릇을 고쳐놓든가 아니면 없애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