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26. 수상한 의뢰인, 구면
스테이크 집에 들어가 각자 요리를 주문하고 나니, 둘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유빈은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렇다고 특별히 할 이야기도 없었기에 업무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오늘 만나는 클라이언트는 어떤 분이세요?”
여자와 단 둘이 마주 앉은 황 대리님이 긴장한 듯 다소 과장된 표현을 섞어가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완벽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민 과장님은 맛있게 드시고 그냥 옆에만 있어 주세요.”
자기가 한 말에 당황한 황 대리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유빈은 황 대리님을 믿고 미팅에 참여해도 되는지 걱정되었다. 사내 메신저로 대화를 나눌 때와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때 너무 달랐다. 회사 동료와 마주 앉아서도 이정도로 긴장하시면 여자 의뢰인이랑 만났을 때는 입도 못 여실 것 같았다.
유빈은 자신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을 느꼈다. 황 대리님도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하셨는지 자기 앞에 놓인 물 컵을 만지작거리셨다. 잠시 후 주문한 스테이크가 나왔고 황 대리님이 예의 그 과장된 어투로 유빈에게 식사를 권했다.
“맛있게 드십시오!”
유빈은 가벼운 미소로 대답하고 고기를 한 조각 썰어 입에 넣었다. 테이블 건너편에 포크와 나이프 사용에 익숙하지 않으신 황 대리님이 낑낑대며 스테이크를 자르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정육점에서 고기를 손질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유빈은 그만 티 나게 웃어버렸다. 잘 먹지도 못하시는 스테이크는 왜 먹으러 오자고 했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황 대리님의 머릿속엔 ‘여자와 밥 먹을 때 가야 할/가지 말아야 할 식당 목록’ 같은 게 있는지도몰랐다.
유빈의 웃음을 본 황 대리님의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유빈은 기왕 이렇게 된 거 자신이 썰어주겠다고 했고, 대리님은 민망했는지 자신의 접시에 포크와나이프를 올려 유빈 쪽으로 슬쩍 밀었다. 유빈이 능숙하게 고기를 자르며 황 대리님에게 물었다.
“저번에 체육 대회 때 비 온 거 황 대리님이 그러신 거라던데 진짜예요?”
황 대리님은 이번엔 귀까지 빨개져 입술만 꼬물꼬물했다. 유빈이 접시를 다시 황 대리님 쪽으로 살짝 밀며 식사 인사를 했다.
“맛있게 드십시오!”
황 대리님은 접시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하면서 포크로 고기를 찍어 먹었고, 유빈은 식사 내내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식사를 마친 유빈과 황 대리님은 의뢰인과 잡은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의뢰인은 자신의 집에서 만나기를 원했고 황 대리님이 운전하는 차는 주택가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려 한 고급 빌라로 들어가, 주소를 확인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의뢰인이 나왔고, 황 대리님과 유빈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황 대리님은 새로운 여자가 나타났기 때문에, 유빈은 의뢰인과 구면이었기 때문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웨이브 펌이 들어간 머리에 유빈 어깨 정도 오는 키, 나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동안. 어제 유빈의 아파트 9층에서 만났던 그 여자였다. 유빈은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업무상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팬텀 유통 영업 1팀 민유빈 과장입니다. 이분은 같은 부서 황우현 대리님이십니다.”
인사를 마친유빈이 의뢰인의 눈치를 살폈지만 의뢰인도 유빈과 구면이라는 것을 굳이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의뢰인은 커피를 내왔고 테이블을사이에 두고 셋은 마주 앉았다. 황 대리님이 테블릿 PC를 꺼내 준비해간 소프트웨어에 관한 설명을 시작됐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 둘 사이에서 황 대리님은 꽤나 버벅거렸다. 의뢰인은 설명을 듣는 내내 황 대리님보다는 유빈에게 시선을 보냈다.
설명이 끝난 뒤에 질문도 유빈에게 했다. 유빈은 점심에 받은 자료를 미리 숙지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유연하게 질문에 대답했다.
“제품 기본 세팅은 마음에 드는데요, 기능들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계속 업데이트되면서 추가될 예정이라고 하셨죠? 업데이트 버전에 추가 사용료를 내야 하나요?”
“아니오. 업데이트 버전은 추가 비용 없이 바로 다운로드 받아서 사용하실 수 있어요.”
“괜찮네요. 혹시 저희가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다가 필요한 기능이 있으면 업데이트에 반영해주실 수도 있나요?”
“그 부분은 저희가 제작 업체에 고객님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될수 있게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후로 몇 가지의 질문과 답변이 더 오갔고 계약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의뢰인은 그 자리에서 계약서에 사인했고 황 대리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유빈은 어제 자신의 아파트 9층에서 봤던, 그리고 언젠가 한 번 더 봤던 것 같은, 그때의 경험이 유쾌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 잘 기억나지도 않는 찝찝함 속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황 대리님이 계약서와 태블릿 PC를 정리하는 동안 의뢰인이 유빈에게 커피를 권했다.
“커피 식겠어요. 계약도 잘 마무리됐는데 커피지만 건배해요.”
유빈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사무적인 미소를 띠고 커피를 마셨다. 황 대리님이 짐 정리를 마치시는 걸 본 의뢰인이 말했다.
“황우현 대리님이라고 하셨나요? 이만 가보셔도 될 것 같아요. 좋은 계약 감사합니다. 그리고 민유빈 과장님?”
유빈과 의뢰인의 눈이 마주쳤고 둘만 인지할 수 있는 짧은 정적이 흘렀다.
“저희 구면이죠? 잠깐 저랑 개인적인 이야기 나누실 수 있을까요?”
유빈은 황 대리님을 바라보며 가지 말라고, 자기와 같이 나가자고 텔레파시를 보내봤지만 역시 전달되지 않았다. 유빈과는 다른 이유로, 하지만 유빈만큼이나 이 자리에서 빨리 일어나고 싶었던 황 대리님은 급하게 인사를 하고 황급히 집 밖으로 나갔다.
“두 분 좋은 시간 되십시오!”
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유빈과 의뢰인이 단둘이 마주 앉았다. 의뢰인이 유빈의 눈을 정면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지수연이야. 그리고 난 네가 싫어.”
의뢰인과 마주쳤던 유빈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유빈은 눈을 뜨고 자세를 바로잡으려고노력했지만 눈꺼풀은 너무 무거웠고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소파에 쓰러진 유빈을 보며 수연이 혼잣말했다.
“아빠랑 오빠는 내 거야.”
* * *
유빈은 불편한 자세에서 어깨에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다. 머리카락은 흘러내려 눈을 가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걷어내 시야를 확보하고 싶었지만, 양 손목이 묶여 있어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머리를 털어 뒤로 넘기니 팬티만 입은 채로 침대에 눕혀져 있는 자신의 몸이 보였다.
유두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양 유두에 고리 형태의 피어싱이 채워져 있었고, 고리에는 얇은 쇠사슬이 연결돼 있었다. 쇠사슬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았다. 쇠사슬은 하나로 합쳐졌고 그 끝은 수연의 손에 들려 있었다. 수연과 유빈의 눈이 마주쳤다. 수연이 만족스러운 듯이 웃으며 말했다.
“일어났어?”
유빈은 수연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곳이었다. 전체적인 구조는 자신의 집과 같았지만 집안의 가구와 집기들의 배치가 미묘하게 달랐다.
자신이 왜 여기에 누워있는지생각해 보았지만, 수연의 집에 방문해서 성공적으로 계약서에 사인을 받고 커피를 마신 후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유두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수연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여긴 902호. 같은 건물 아래층 801호가 네가 살던 곳이야.”
그리고 유빈이 그 말을 이해할 틈도 주지 않고 유빈의 젖꼭지에 연결된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유빈은 유두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수연 쪽으로 상체를 움직였다. 하지만 수연은 계속해서 사슬의 반대쪽을 잡아당겼고 유빈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손이 묶여 있어서 저항할 수도 없었다.
필사적으로 꿈틀거려 수연에게 가까워졌다. 수빈은 다시 한번 거세게 사슬을 당겼고 유빈은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떨어졌다. 수연이 침대에서 떨어져 고통에 신음하는 유빈을 보며 조소를 날렸다.
“벌레 같은 년.”
유빈이 비명을 참으며 대답했다.
“계약 조건이 마음에 안 드셨던 거라면……, 아악.”
수빈이 다시 사슬을 잡아당겼고 유빈은 고통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닥쳐. 계약 따위 어찌 되든 무슨 상관이람.”
통증과 서러움이 섞인 눈물이 유빈의 눈에 고였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걸 본 수연이 놀라며 물었다.
“이거 많이 아파? 빼줄까?”
유빈은 굴욕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이 유빈의 유두에 채워진 고리와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쇠사슬을 연결하는 갈고리를 풀었다. 하지만 유빈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고 수연은 유빈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먼 곳을 보며 말했다.
“많이 아프구나. 그런데 너 그런 꼴 당할 만했어. 왜 내가 좋아하는 오빠한테 꼬리치는데?”
유빈이 흐느끼며 대답했다.
“어떤 오빠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저 그런 적 없어요.”
수연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유빈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네가 케빈 오빠한테 꼬리쳤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