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화 〉25. 어쩌면 훨씬 오래전부터 (25/70)



〈 25화 〉25. 어쩌면 훨씬 오래전부터


다음 날 출근한 유빈은 뜻밖의 공고문을 보게 되었다. 벽에 붙은 공고에는 김덕기 상무이사가 3개월간 정직처분을 받았다고 쓰여 있었다. 징계 사유는 적혀있지 않았다. 유빈은 당분간은 김 상무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하면서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했다.

회사 내에 김 상무의 위치는 확고했다. 김 상무의 회사  공식 서열은 사장님과 전무님 다음인 3위였지만 팬텀 유통의 사장님은 직원들  얼굴을 봤다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존재감이 미미했다.

전무님은 시무식이나 종무식  가끔 얼굴을 비추고 연설을 하거나 표창장을 주시는 정도였을  실제 대부분의 업무는 상무이사 선에서 처리되었다. 그런데 그런 김덕기 상무이사가 정직 3개월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자리에 앉은 유빈에게 영업 1팀 팀장님이 인사를 건넸다.

“민유빈 과장 휴가 즐거웠어?”

예상대로 유빈이 출근하지 않았던 날들은 휴가로 처리돼 있었다. 유빈은 인사를 받으며 궁금했던 것을 여쭸다.

“네. 부장님. 오래 자리 비워서 죄송합니다. 오다 보니까 김 상무님 공고가 붙어 있던데 어떻게 된 일이에요?”

팀장님이 뺨을 긁적이며 대답하셨다.

“글쎄. 사장님 결정이었다고만 들었어.”

놀란 유빈이 눈을 동그랗게 만들며 다시 여쭸다.

“사장님이오?”

팀장님이 얼굴을 긁던 손을 내리고 팔짱을 끼고 대답하셨다.

“응.  과장은 아직 한 번도 못 뵀지? 회사에 통 안 나오셨으니까. 요즘 상무님 업무 공백 때문인지 자주 오시던데…… 어 저기 오셨네.”

팀장님이 가리킨 방향을 본 유빈이 경악했다. 유빈과 눈을 마주친 케빈이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케빈이 다가오자 팀장님은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유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케빈과부장님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팀장님의 인사를 받아  케빈이 유빈을 향해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민유빈 과장님.팬텀 유통 사장 케빈입니다. 반갑습니다.”

유빈은 어색하게 케빈이 내민 손을 잡았다. 케빈은 유빈의 손을 끌어당겨 거리를 좁히고 유빈의 귀에 속삭였다.

“나중에 따로 보자.”

케빈은 다시 미소를 띠고 팀장님과 영업1팀 사원들에게 인사하고 돌아갔다. 팀장님이 유빈에게 물었다.

“민 과장, 사장님이랑 구면인가?”
“예전에 뵌 적 있었는데 저희 회사 사장님이신 줄은 몰랐어요.”

팀장님의 질문에 얼버무려 대답하고 책상에 앉은 유빈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이 스토킹은 그녀가 알던 것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문득 3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유빈은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하고 대학 졸업을 앞둔 상태에서 취직 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공인회계사 합격생들처럼 회계 법인에서 회계사로서 경력을 쌓으려고 생각 중이었을 때, 예상 밖의 이메일을 한  받았다.

자신을 팬텀 유통의 인사과 직원이라고 소개한 그는 유빈을 특채하고 싶다며 이력서를 보내달라고 했다. 취업준비생으로서 마다할 이유가 없는 스카우트 제의였다.이력서를 보내주고 받은 근무 조건은 더욱 매력적이었다. 연봉 7,000만원에 각종 복지 혜택과 더불어 회사에서 근무하는 동안 살 집과 타고 다닐 자동차도 지급하겠다고 했다. 게다가 평사원이 아닌 대리 직급으로 입사할 수 있다고도 했다.

대학 졸업 동기들보다 2~3년은 앞서 나갈 수 있는 조건을 유빈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유빈은 팬텀 유통으로 오게 되었다. 그런데 방금 팬텀 유통의 사장이 케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케빈이 스토커라면, 3년 전부터 이 일을 계획했다고 생각한다면, 모든 게 쉽게 설명됐다.

유빈은 책상에 앉아 자책하기 시작했다. 3년 전 명문대 차석 졸업 후 공인회계사 자격까지 취득한 그녀는 너무 오만해 있었다. 팬텀 유통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나서 그녀는 자신이 쌓아온 노력과 능력의 결과라고만 생각했다. 자신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한 번 더 다시 생각해봤어야 했다. 아무리 고 스펙이더라도 신입사원을 회사에서 특채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팬텀 유통에서 제시한 조건은 그녀의 스펙과 비교해 보더라도 지나치게 좋은 조건이었다.

특히 집과 자동차를 제공한다는 조건은 정말 이상했다. 자동차와 집은 일반적으로 회사에 오래 근무한 중역들에게 제공하는 복지이지 신입사원에게 제공하는 특전이 아니었다. 차 타이어가 칼에 찢겨져 있었던 일, 집 안에 몰래 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던 일, 샤워기에서 피가 쏟아졌던 일, 그녀의 집 바로 위층이 스토커의 아지트일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던 한형석 형사의 암시, 9층에서 마주친 여자가 차례로 떠올랐다.

회사에서 지급한 자동차와 집에서 유빈은 스토커에게 놀아나고 있었다. 유빈은 케빈과 악수했던 손을 쥐었다  보았다.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며 마치 자신의 손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케빈이 귓속말했던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케빈은  김덕기 상무한테 징계 처분을 내렸을까?’

김덕기 상무는 확실히 스토커의 하수인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케빈이 스토커라면 김덕기 상무를 회사에서 몰아내는 징계를 내릴 이유가 없었다. 김덕기 상무와 거리를 두는 척 연기하고 싶었다면, 회사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정직 처분보다는 감봉 정도의 징계를 내렸을 것 같았다. 그 편이 유빈을 스토킹하는 데에 훨씬 유리했다.

가방에 넣어두었던 사직서가 떠올랐다. 감정적으로는 당장이라도 케빈을 찾아가 사직서를 던지고  회사를 나가고 싶었지만,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아직 케빈이 스토커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사직서를 제출할 수는 없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팀장님이 유빈을 부르셨다.

“민 과장 오전에 어디 아파 보이던데 괜찮아?”
“아니오. 괜찮습니다.”

팀장님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씀하셨다.

“그래. 다행이네. 민 과장 부서 이동하고 휴가 갔다 와서 아직 배정된 업무 없지? 이따 저녁에 황 대리랑 같이 외근 좀 가줘. 일이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고, 클라이언트가 오늘 아침에 갑자기 연락이 왔는데 남자만 오면 안 만나겠대. 그런데 우리 팀에 여자가  과장 한 명밖에 없잖아. 클라이언트 쪽도 여자야. 업무 관련 이야기는  대리가 진행할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유빈이 짧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약속 시간이 저녁 9시니까 천천히 준비해서 만나면 될 거야. 야근 수당 챙겨줄 테니까 계약  따와.”

유빈은 한  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구태여 여자 직원이 와야 미팅진행하겠다는 클라이언트의 요구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3년간의 회사 생활을 통해 해괴한 요구를 하는 고객들이 많다는 건 이미 익숙해져있었다. 팀장님 말씀처럼 업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그동안 유빈은 너무 오랫동안 일에서 손을 놓고 있었다.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을 거라면 다시 일에 집중해야 할 시간이었다. 유빈은 같이 외근을 나가기로 되어있는 황우현 대리를 흘깃 쳐다보았다. 부서 이동 첫 날, 다른 동료 직원한테 대마법사라고 소개받았던, 쑥스러워하며 제대로 인사도  나누었던 그분이었다. 직접 말을 걸었다간 지난 번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질 것 같아 사내 메신저로 말을 걸어보았다.

- 안녕하세요.  대리님. 오늘 밤 같이 외근 나가게 된 민유빈입니다.

메신저로 대화할 때는 부끄러움이 전혀 없으신 건지 황 대리님의 답장은 청산유수였다.

- 안녕하세요. 황우현 대리입니다. 오늘 같이 일하게 돼서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 업무는 저희가 유통 독점권을 갖고 있는 소프트웨어의 사용 계약을 체결하는 일인데요, 소프트웨어 사용 설명 PT, 계약서까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클라이언트 반응도 괜찮았습니다. 어렵지 않은 일이니 믿고 맡겨주세요. 준비한 자료들 미리 보내 드립니다.

황 대리님이 보낸 자료를 다운 받으며 유빈은 작게 웃었다. 두 걸음 떨어진 사람이랑 이렇게 메신저로 이야기한다는 게 어색하면서도, 얼굴 보고는  마디도 못 하시던 분이 메신저로는 저렇게 술술 이야기를 풀어 가시는 게 재밌었다.

유빈은 자료 숙지하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다운로드 된 파일들을 열어 확인했다.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대리님의 메시지처럼 어려운 일도 아닌  같았다. 걱정이라면 여자 앞에서 한 마디도 못 하시는 황 대리님과, 여자가 안 오면 안 만나겠다는 괴상한 성향의 의뢰인이랄까. 그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게 오늘 유빈의 일이 될  같았다.

다른 직원들이 하나둘씩 퇴근할 시간에 유빈은 황 대리님과 같이 회사를 나왔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많이 남아있었고, 둘은 먼저 저녁을 먹기로 했다. 유빈은 아직 일하는 중이니 간단하게 분식집에서 먹자고 했지만 황 대리님은 자기가 대접하겠다고 부득불 우겨 스테이크 집으로 유빈을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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