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화 〉24. 윗집 여자 (24/70)



〈 24화 〉24. 윗집 여자


유빈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처음 스토킹이 시작됐을  경찰에 신고했지만 아무런 도움도 못 주고, 도리어 유빈을 망상증 환자로 취급했던 형사였다. 하지만 곧 걱정과 공포가 짜증을 뒤덮었다. 스토커는 유빈을 택시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몰겠다고 했고, 케빈도 경찰이 유빈을 찾고 있다고 경고했다. 유빈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한형석 형사는 유빈에게 경찰서로 와달라고 요청했다. 참고인 신분이니 특별히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유빈이 이유를 물었지만, 한형석 형사는 경찰서에서 자세히 설명해주겠다고만 대답했다. 유빈은 꺼림칙했지만 경찰을 무조건 피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정말로 자신이 살인범으로 몰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굳게 다잡고 경찰서로 향했다.

참고인 신분으로 받는 조사였기 때문일까, 경찰서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딱딱하지 않았다. 의경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유빈에게 커피를 타 주었고, 한형석 형사는 유빈에게 택시 살인 사건에 대해 경찰이 파악하고 있는 것들을 설명했다.

피해자의 시체만 발견되었을 뿐 범행 목격자도, 범행 도구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피해자의 시체에서 상당량의 피가 뽑힌 흔적이 같이 발견됐다고 했다. 그리고 헛기침을 하면서 덧붙였다.

“피해자의 사망 추정 시각 직전에 민유빈 씨와 같이 있었던 게 CCTV에 여러 장면이 남아있어서 이렇게 증언을 부탁드리게 됐습니다. 혹시 그날  피해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실  있을까요?”

유빈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정하기 어려웠다. 처음부터 이야기하려면 스토킹의 시작부터 아주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눈앞의 형사는 유빈이 스토킹을 당하기 시작했을  성희롱에 가까운 발언을 하며 유빈을 조롱했던 사람이었다. 그 이야기를 믿어줄  같지 않았다.

거기다 유빈이 잘못 증언한다면 유일한 목격자인 그녀가 살인범으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피해자의 몸에서 뽑혔다는 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한형석 형사가 머뭇거리는 유빈을 보며 보챘다.

“피해자랑 어떤 사이이신지부터 여쭙고 싶네요.”

결국 유빈은 그날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클럽에서 처음 만났고 같이 잠자리를 가지기 위해 택시를 타고 이동하던  택시 기사에게 변을 당했다고 했다.  말을 들은 한형석 형사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물었다.

“그러니까 피해자와 원나잇 스탠딩을 하려고 하셨다고요?”

유빈은 한형석 형사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희롱하는 남자의 눈인지 범인을 의심하는 형사의 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둘 중 어떤 것이라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당장 경찰서를 나가고 싶었지만 자신 때문에 스토킹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에 대한 미안함이 앞섰다.

범인을 잡을  있다면 그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  있을  같았다 또 그 범인은 유빈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꼭 잡혀야 했다. 불쾌함을 누르며 조사에 임했다.

살해 현장을 직접 목격했냐는 한형석 형사의 질문에 유빈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실대로 택시가 주문과는 다르게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기사가 택시 문을 잠그고 흉기로 그 학생을 살해했다고 말했다. 한형석 형사는 택시의 번호판이나 회사명, 기사 정보 등을 물어봤지만 유빈이 기억할 리 없었다.

뒤이어 택시 기사의 생김새를 묘사해 달라고 했고, 유빈의 진술을 바탕으로 몽타주를 그렸다. 작은 키의 남성. 세로로 찢어진 눈과 얇은 입술. 짧지만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나이는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30대 아니면 40대, 어쩌면 50대.

유빈이 조사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을 때 한형석 형사가 사진 한 장을 내밀며 물었다

“이 사람 아십니까? 지난번에 신고하신 스토킹 사건을 수사하다 발견한 인물입니다. 민유빈 씨 바로 위층에 사시는 것 같더라고요. 이건 저희 수사 기밀 사항입니다만, 사건 당사자이시니 말씀드립니다. 민유빈 씨  바로 위층으로 사람이 들어가는 게 목격됐고 사이버 수사대의 수사 결과에 따르면 그 집의 IP 주소가 매우 불안정하다고 하는군요.”

한형석 형사가 슬쩍 유빈의 눈치를 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저도 그쪽 분야는  모릅니다만, 사이버 수사대 측의 말로는  우회된 IP 주소를 추적하다 보니 원주소가 그 집으로 나왔다고 하네요. 스토킹에 해커가 동원된  같다고 하셨는데 조심하세요. 저희도 아직 확실한 증거를 잡은  아니지만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살인 사건 스토킹이랑 관련이 있습니까?”

사진을 받아  유빈의 손이 떨렸다. 사진 속의 인물은 케빈이었다. 한형석 형사의 마지막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경찰서를 나왔다.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온 유빈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신의 집인 8층이 아니라, 그 위층, 9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자신의 집 바로 위의 집 901호 앞에 서서 심호흡했다.

스토커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몰려왔지만, 이렇게 계속 당하는 것보다 만나서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나을 거라고 자신을 설득하며 초인종을 눌렀다. 벨소리가 울렸고 유빈의 가슴이 같이 뛰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이 케빈이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 * *

유빈은 901호 문손잡이를 내려다보았다. 문에 귀를 대고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해 보았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초인종을 한   눌러보려던 순간, 옆집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나왔다. 유빈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갑작스러운 유빈의 강렬한 시선에 당황해하며 유빈을 지나쳐갔다.

유빈은 그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자는 유빈의 시선이 거두어지지 않은 것을 의식했는지, 뒤를 돌아보며 유빈에게 말했다.

“그  비어있어요.”

그러더니 다시 가던길을 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유빈은 그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라면 지나가다 마주친 적이 있었을지도 몰랐지만,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익숙했다. 허리까지 내려오게 길러 웨이브 펌을 넣은 머리, 그리고 특히  여자가 신은 하이힐에 강한 기시감이 남았다.

별 소득 없이 자신의 집에 들어온 유빈은 사람을 불러 형광등을 고치고 침대에 누웠다. 살수, 김덕기 상무, 케빈, 왕창식 부회장 그리고 어쩌면 9층의 그 여자까지. 그녀의 삶에 갑자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중 누구를 피해야 할지 누구를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살수와김 상무를 피해야 하는 분명했지만 그들은 스토커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스토커가 누구인지 알아내야 했다. 한형석 형사가 암시했던 대로 케빈인지, 케빈의 말대로 왕창식 부회장인지, 아니면 제3의 인물인지 찾아내야 했다.

유빈은 휴대폰을  연락처 목록을 열었다. 케빈의 번호만이 저장되어 있었다. 케빈한테 전화해보려고 했지만, 전화해서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 명확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스토커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었고, 케빈이 진짜 스토커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형석 형사가  준 말을 곧이곧대로 전할 수도 없었다.

유빈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스토커일지도 모르는 다른 한 사람, 프로테크놀로지 왕창식 부회장과 통화해보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프로테크놀로지를 검색해 회사 공식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 신호음이 가고 안내에 따라 몇 번의 숫자를 입력한 후에 상담원과 연결되었다.

유빈이 상담원에게 왕창식 부회장을 연결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자신이   있는 일이 아니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유빈은 꼭 통화해야 한다고 사정했고, 결국 상담원은 왕창식 부회장의 비서실과 연결해주었다.

하지만 비서실의 반응도 냉랭했다. 지금은 왕창식 부회장과 통화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결국 유빈은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남기고  왕창식 부회장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한 뒤 전화를 끊었다.

고민해야 할 일은 또 있었다. 내일은 회사에 나가야 했다. 케빈은 오늘까지 쉬어도 된다고 했고, 회사에서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는 걸로 보아 그 말은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아마 휴가나 출장으로 처리되어 있을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출근하기 싫은 마음을 카드 고지서라도 보며 다독였겠지만, 출근해서 김 상무의 얼굴을 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깊은 우울감이 찾아왔다. 스토커일지도 모르는 케빈이 회사에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아서 마음속에만 담아뒀던 사직서를 종이 위에 옮겼다. 또 김 상무가 자신을 호출한다면, 케빈이 정말 스토커라면 제출하고 회사를 뛰쳐나올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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