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23. 오랜만입니다
유빈은 케빈이라는 사람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유빈은 케빈이 남기고 간 쪽지를 다시 열어보았지만 휘갈겨 쓴 전화번호만 적혀 있었을 뿐, 케빈에 대해 추론할 수 있는 어떤 정보도 없었다.
케빈이 자신의 집에서 같이 살자고 했던 말도 생각해 보았다. 이미 스토커는 유빈의 집에 침입해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고 수도관에 피를 주입해놓기까지 했다. 이 집이 스토커로부터 안전하지 않은 건 분명했다.
그렇다고 섣불리 케빈의 집으로 이사할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케빈이 스토커라면 스토커의 집에서 같이 사는 게 되고 말 것이었다. 어쩌면 유빈을 공황상태로 몰아넣고서 자신의 집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치밀한 술책이었을지도 몰랐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스토커와의 마지막 통화가 떠올랐다. 스토커와 케빈의 말투를 비교해보았다. 자신감과 건방짐이 섞인 태도로 상대방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게 묘하게 비슷했다.
유빈의 표정이 굳었다. 스토커와의 통화를 떠올리자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잊었던 스토커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유빈에게 잘못을 빌라고 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지?’
유빈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스토커가 정확히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추측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느 것 하나 정리되지 않는 상황에 답답함을 느낀 유빈은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유빈은 습관적으로 불을 켜려고 했지만 스위치를 눌러도 불은 들어오지 않았고 바닥에는 케빈이 해체해 놓은 형광등이 널려 있었다. 불도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밤을 보내게 될지도 몰랐다.
허겁지겁 전에 쓰던 휴대폰에서 유심칩을꺼내 새 휴대폰에 넣고 전원을 켰다. 그런데 케빈의 와이핑 프로그램은 유심까지 완전히 초기화시켜버렸고 새 휴대폰은 유심을 인식하지 못했다. 부랴부랴 휴대폰 가게로 다시 달려가 유심을 사서 돌아와 철물점에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검색해 몇 군데 더 전화를 돌려봤지만 지금 당장 형광등을 설치하러 와주겠다는 곳은 없었다. 결국 유빈은 그 날 밤을 형광등을 조심스럽게 구석으로 밀어놓은 채 어둠 속에서 보냈다.
* * *
유빈과 헤어진 뒤 케빈이 향한 곳은 유빈이 일하는 회사 팬텀 유통의 상무실이었다.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케빈의 방문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덕기 상무와 눈이 마주쳤다. 케빈이 고함을 질렀다.
“너 민유빈한테 손댔어?”
김 상무의 입에서 뜻밖의 호칭이 튀어나왔다.
“선생님, 아니 사장님.”
케빈이 집게손가락을 들어 김 상무의 미간을 가리키며 또박또박 말했다.
“너 이 일에서 손 떼.”
김 상무가 얼버무리면서 말했다.
“사장님. 이건요 제 분야예요. 여자는 자고로 벗겨놔야 말을 듣는다고요. 그리고 사장님이 보신 건 교주님의 명령에 따른 거예요…….”
케빈이 분노한 얼굴로 김 상무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너 아직도 창녀 관리하던 조폭이야? 그럴 거면 내 회사에서 나가! 너 이 일에서 무조건 손 떼. 민유빈 여기로 부르지도 말고 감시도 하지 마. 알겠어? 민유빈 휴가나 내일까지로 처리해 놔.”
케빈의 기세에 눌린 김 상무가 시선을 피하며 작게 대답했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자기 할 말을 다 하고 원하는 대답을 들은 케빈은 유빈한테 그랬던 것처럼 인사도 없이 상무실을 나갔다. 케빈이 나간 뒤 김 상무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상황이 지나치게 꼬이고 있었다.
김덕기 상무가 케빈을 처음 만난 건 십여 년 전 조직폭력 집단에 몸담고 있을 때였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반에서 1, 2등을 다투던 김덕기는 어느 날, 어머니가 친구를 잘못 만났다고 슬프게 우시던 사건들을 계기로 공부와는 점점 멀어졌다. 경찰의 보호관찰대상이 되었고, 다시 공부해보려고 해도 친구들도, 선생님들도 그를 문제 학생으로만 취급했다.
고등학교에 가도 그 기록은 김덕기를 따라다녔고 그는 점점 공부 반대편의 친구들과 가까워졌다. 양아치라는 단어는 자신의 이름 앞에 당연히 붙는 수식어처럼 느껴졌다.
고3 어느 날,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담임 선생님에게 대학 진학 상담을 받으러 갔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김덕기의 성적으로는 갈 수 있는 대학이 없다며 김덕기를 조롱했고 덕기는 처음 보호관찰 대상이 되었던 그날만큼 슬프게 우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그동안 학교와 선생님들에 대해 갖고 있던 증오심이 배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양아치라고 불리던 많은 학생들이 그렇듯 조직폭력배가 됐다. 처음에는 잔심부름으로 시작했지만 곧 성매매 여성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성매매 여성들은 도망가기 일쑤였고 덕기는 그들을 감시했다. 때로는 상담도 해주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여자는 벗겨놨을 때 고분고분해진다는 걸.
눈에 쌍심지를 켜고 덕기에게 대들던 여자들도 약간 겁을 줘 벗기고 나면 온순해졌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손으로 조금 쓰다듬어주는 것도 아주 효과가 좋았다. 그의 방법론 덕분이었을까, 김덕기는 곧 조직 안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자신의 조직원들을 거느리고 업소 몇 개를 직접 관리하는 위치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응어리가 있었다. 조직원들, 심지어 그가 관리하는 성매매 여성들까지도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며 그를 무시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자신에게 전공이 뭐냐고 묻는 사람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열등감은 커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전단지를 보게 되었다. 컴퓨터를 무료로 가르쳐준다고 쓰여 있었다. 덕기의 시선을 끈 건 무료라는 단어보다 그 앞에 붙어 있었던 ‘전공 수준보다 더 깊게’라는 말이었다. 그의 응어리를 자극하는 그 말에 덕기는 전단지에 표시된 곳에 찾아가 열심히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곳은 단순한 컴퓨터 활용 기술이 아니라 해킹 기술을 가르쳤다. 덕기는 조직생활에도 도움이 되는 기술과 지식에 푹 빠져들었다. 나중에 그곳이 단순히 컴퓨터를 가르쳐주는 곳이 아니라 해킹 기술로 신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검은 십자가(Black Cross)라고 불리는 종교 집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가끔씩 들리는 복잡한 종교 이야기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해킹으로 신이 될 수 있다는 건 썩 괜찮은, 정말로 실현 가능할지도 모르는 생각인 것 같았다. 교단에 점점 빠져들었던 덕기는 때때로 조직원들을 시켜 교단의 일을 봐 드리기도 했다.
검은 십자가 교단에서 교주 다음의 2인자이자, 해킹 강사로 활동하고 있던 사람이 케빈이었다. 케빈의 화려한 해킹 기술과 끝없는 컴퓨터 관련 지식들을 보며 덕기는 케빈을 동경했고 둘은 점점 가까워졌다. 나중에 케빈이 재벌 회장님의 아들이라는 걸 알고는 더욱 그와 친해졌다.
그러다 케빈은 아버지에게 미리 받은 유산으로 지금의 팬텀 유통을 창립했다. 덕기는 팬텀 유통에 고용돼 때로는 자신의 조직원들을 동원해, 때로는 케빈에게 배운 해킹 기술을 사용해 회사를 키워나갔다. 팬텀 유통은 검은 십자가 교단에 훌륭한 자금줄이었고 덕기는 낮에는 팬텀 유통의 임원으로, 밤에는 검은 십자가의 일원으로 살아갔다.
그러다 최근에아주 골치 아픈 업무를 맡았다. 검은 십자가 지밀환 교주님의 지시로 팬텀 유통에서 일하는 민유빈이라는한 여직원을 감시하라는 임무였다. 오랜만에 맡게 된 여자를 관리하는 업무에 김덕기는 자신감이 있었다. 표적이 된 그 여직원을 따라다니기도 하고 불러다가 쓰다듬어주기도 하는 등 열심히 업무를 수행했다.
아주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시작했던 업무였다. 그런데 갑자기 케빈이 그 일에 조금씩 반대하기 시작했다. 교주님과 케빈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가 매우 곤란했다. 둘이 이야기해서 합의된 사안만 자신에게 전달해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케빈이 아주 많이 엇나가기 시작했다. 교주님의 지시로 시작한 이 업무에서 손을 떼라고 명령했다. 그러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몹시 곤란했다. 덕기를 곤란하게 만드는 건 교주님과 케빈뿐만이 아니었다. 이 업무에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었다. 그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았다
“네. 케빈은 아예 지밀환 교주님께 반기를 들기로 한 것 같습니다. 네. 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네. 저번에 약속하신 건…… 네. 그것도 그때 다시 여쭙겠습니다. 그럼 말씀하신 시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