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22. 나 짝사랑 중이야
그 뒤로 이어진 캐빈의 설명은 유빈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캐빈은 그 백신 프로그램을 만든 회사, 프로테크놀로지의 최고 경영자 왕창식 부회장이 유빈의 휴대폰을 해킹한 스토커라고 했다. 자신이 만든 백신을 무력화하고 유빈의 휴대폰에 접근하여 원하는 프로그램을 심어 놓는 건 그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언젠가 김덕기 상무가 유빈에게 프로테크놀로지의 왕창식 부회장과 무슨 사이냐고 물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도 유빈은 그 사람의 얼굴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라면 뉴스에서 몇 번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 사람이 자신을 스토킹하는 이유는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이어지는 캐빈의 이야기는 유빈을 더욱 공황상태로 몰아넣었다. 캐빈은 며칠째 행방불명된 유빈이 걱정돼 유빈의 집 주변 CCTV를 해킹해보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경찰이 자신이 해킹한 CCTV에 접근한 흔적을 발견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직감한 캐빈은 경찰 측이 확보한 자료에 접근했다.
유빈이 클럽에서 만난 남학생이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경찰이 그날 밤 같이 있었던 유빈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경찰이 유빈을 범인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빈이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캐빈이 유빈에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달라고 했지만 유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캐빈이 유빈에게 한 번 더 물었다.
“정말 네가 죽였어?”
유빈이 소리 지르듯 대답했다.
“아니에요!”
유빈은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았다. 아니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죄책감을 지워버리긴 힘들었다. 유빈과 스토커 사이에 그 학생을 끌어들인 건 유빈이었다. 거기다 여자 친구가 있다고 했던 남자를 데리고 자려고 했던 기억이 죄책감을 더했다.
심지어 스토커는 유빈의 집에 살해된 학생의 피를 뿌리고 유빈의 집에 피해자의 혈흔이 있다는 걸 경찰에 알리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유빈의 감정이 격해지는 모습을 본 캐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유빈을 달래려고 했다.
“알겠어. 난 너 믿어.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줘.”
잠깐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 먼저 정적을 깬 건 유빈이었다.
“그런데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누구시죠?”
캐빈이 잠깐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나 너 좋아해. 여자로. 이게 널 지키려는 첫 번째 이유야.”
캐빈이 다시 뜸을 들이기 시작했다. 유빈은 두 번째 이유를 기다리며 캐빈의 눈을 바라보았다. 캐빈이 잠깐 유빈의 시선을 피하더니 다시 유빈과 눈을 마주치고 물었다.
“나 짝사랑 중이야?”
유빈은 황당했다. 자신을 지켜준 것도 앞으로도 지켜주겠다는 것도 고마웠지만, 캐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이번이 캐빈과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고백하고 답을 달라는 남자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진심인지도 의심스러웠고 스토커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다. 유빈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캐빈이 다시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지금 당장 대답 안 해줘도 돼. 어차피 앞으로 매일 얼굴 볼 건데.”
유빈이 놀라서 되물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세요?”
캐빈이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부터 내 집에서 살아.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계속 험한 꼴 당하는 것 못 보겠어.”
캐빈은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유빈이 캐빈의 말을 막았다.
“잠깐만요!”
유빈은 캐빈의 화법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자신을 도와주는 이유를 설명하다가 갑작스럽게 고백하고 대답을 요구하더니, 이제는마치 자기가 정하면 유빈이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듯 동거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유빈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캐빈이 말했다.
“미안. 내가 너무 빨랐나? 차근차근 다시 말해줄게. 내가 누구냐고 물어봤었지? 이름은 캐빈이고 성은 왕이야. 왕캐빈이라고는 부르지 마. 촌스러운 거 나도 알아. 현 프로텍 왕무택 회장의 장남이야. 물론 넌 들어본 적 없겠지. 아버지가 숨기고 싶었던 사생아니까. 이렇게 되면 자동으로 내가 왕창식 부회장, 그러니까 너를 스토킹하고 있는 사람의 형이라는 건 알겠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정보에 유빈이 눈을 깜박였고, 캐빈은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너를 지켜주고 싶은 첫 번째 이유는 이미 말했고, 두 번째 이유는 못난 동생이 저지른 일 형이 나서서 해결하려고. 난 아버지한테 컴퓨터 기술이 사람을 해치면 안 된다고 배웠는데 걘 아닌가 보더라. 이러니까 한국에 그런 속담이 있지. ‘형만 한 아우 없다.’인가?”
유빈은 머릿속으로 캐빈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보를 정리하며 물었다.
“그럼 하이데스는 누구예요?”
캐빈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나라고. 해커로 활동할 때 쓰는 이름이 하이데스야. 너는 못 들어봤겠지만 그쪽에서는 되게 유명해. 하이데스가 나타났다고 하면 제우스랑 포세이돈도 벌벌 떨어. 아테네 이런 애들은 상대도 안 돼.”
유빈은 캐빈이 농담을 할 때는 웃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하니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캐빈이진지한 표정을 유지하며 계속 말했다.
“하이데스가 얼마나 위대하냐면 국내 컴퓨터 백신 독점 기업 프로텍 왕창식 부회장이 하는 나쁜 짓도 척척 막아내잖아. 아마 나 아니었으면 왕창식이 너한테 훨씬 심하게 했을걸? 지금까지는 멀리서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네가 실종되고 살인사건에 관련되고 이러면 가까이 있어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거든?”
캐빈의 말을 들은 유빈은 자신의 기억 속 퍼즐을 맞춰놓았다. 처음에 스토커는 여유로운 듯, 유빈을 가지고 노는 듯 행동했지만, 하이데스가 나타난 이후 대단히 초조해 보였다. 그리고 잠깐 스토킹을 멈춘 적도 있었다. 캐빈의 말대로라면 왜 그랬는지 설명이 됐다. 유빈이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 캐빈이 불쑥 끼어들었다.
”내일부터, 아니다. 오늘부터 나랑 같이 살 거지?“
유빈은 당황했다. 지금까지 그녀의 삶에 너무 많은 큰 사건들이 일어났고 방금 너무 많은 정보를 들었다. 이것들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무언가 결정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유빈이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동안 캐빈은 의자와 드라이버를 들고 유빈의 집을 돌아다니며 형광등을 분해하고 숨겨진 카메라를 찾아냈다. 그런 캐빈을 보며 유빈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카메라의 위치를 저렇게 정확히 알고 있는 거지?’
하지만 캐빈에게 직접 물을 수 없었다. 캐빈이 형광등을 해체하는 동안 조용히 피자 박스와 콜라병을 정리했다. 각자 일을 마치고 캐빈이 소형 몰래카메라들을 손에서 공깃돌처럼 만지작거리며 유빈에게 말했다.
“가자.”
유빈이 눈을 동그랗게 말며 대답했다.
“네? 어디요? 아직 같이 산다고 안 했는데…….”
캐빈이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너도 같이 살고 싶구나? 일단 휴대폰 사러 가자. 사 주기로 했잖아. 쓰던 휴대폰 이리 줘봐. 와이핑 프로그램(Wiping program)으로 초기화해줄게.”
캐빈은 유빈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유빈의 휴대폰을 다시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에 연결했다. 와이핑 프로그램이 작동했고 유빈의 휴대폰에 있던 데이터는 깔끔하게 지워졌다. 유빈은 그 안에 있던 자신의 사진과 연락처들까지 모두 지워지는 걸 보며 캐빈의 막무가내식 태도에 황당함을 느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저 휴대폰의 정체를 알아버린 이상 무언가 남아있다면 꽤나 찝찝할 것 같았다. 휴대폰을 초기화하고 캐빈은 유빈을 데리고 근처 휴대폰 가게로 가서 그녀가 사용하던 시리즈의 최신 모델 공기계를 사주었다. 유빈이 감사하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캐빈은 자기 할 말만 하더니훌쩍 떠나버렸다.
“이건 내 번호.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전화하고. 그런 생각이 너무 안 들어서 고민이어도 전화하고. 회사는 모레부터 출근하면 돼. 그리고 김덕기 상무가 너한테 나쁜 짓 했다는 것도 들었어. 조치해 놓을 테니까 안심하고 출근해.”
유빈이 뭐라 대답하려고 했지만, 캐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면서 뒤로 손을 흔들어 유빈에게 인사했다. 유빈은 캐빈이 주고 간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만 만지작거렸다. 유빈은 집에 돌아와 새 휴대폰을 손에 쥐고 생각에 잠겼다. 스토커만큼이나 갑자기 나타난 캐빈이라는 사람의 정체가 궁금했다. 자신의 말로는 유빈을 지켜주고 있다고 했지만 캐빈이 스토커라고 해도 이 모든 상황이 설명됐다.
캐빈은 카메라의정확한 위치부터, 유빈의 옆에서 일어났던 살인사건, 심지어 유빈의 휴대폰이 해킹돼 스토커한테 이용당했다는 것까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유빈이 스토커에게 당한 수많은 일들은 캐빈이 그가 말한 대로 천재 해커라면 그가 직접 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캐빈이 했던 자신은 프로테크놀로지 왕무택 회장의 아들이고, 스토커는 자신의 동생인 프로텍 왕창식 부회장이라는 말은 농담인지 진담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들었다. 캐빈이 마지막에 남긴 말도 수상했다. 유빈은 회사에서 캐빈을 만난 적조차 없었지만, 캐빈은 마치 자기가 유빈의 회사에서 큰 권한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모레부터 출근하라든지, 김 상무한테 조치를 취해놓겠다든지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