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21. 케빈, 정체?
몇 시간이 지났을까. 유빈이 눈을 떴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그녀 몸과 집안 곳곳에 묻어 있는 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어놓고 맑은 물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다 물의 색이 투명해진 것을 확인하고 그 아래에 섰다. 남은 샴푸와 바디워시를 털어 머리를 감고 몸을 씻었다. 그러고도 피 냄새가 가시지 않은 것 같아 비누로 온몸을 한 번 더 씻었다.
욕실 바닥에 락스를 뿌리고 피를 닦아냈다. 욕실에서 나오니 방바닥에도 피가 묻어있는 것이 보였다. 양동이에 물을 담고 락스를 풀었다. 고무장갑을 끼고 걸레를 양동이에 담갔다 뺐다. 장판을 한 겹 벗겨낼 것처럼 거칠게 바닥을 닦았다. 그래도 공기 중에 짙게 배어있는 피 냄새가 지워지지 않았다. 집 안 곳곳의 창문을 모두 열었다. 제발 이 역겨운 냄새가 사라지길 기도했다.
창문 밖에서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유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속옷 입었다. 그 위에 계절에 맞는 가벼운 여름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이대로 자고 일어났을 때 모든 게 잊히길 기도했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길 바랐다. 의식이 희미해지고 잠과 현실의 경계선에 이르렀을 때 어쩌면 이 지옥에서 다시 깨어나는 것보다 이대로 영원히 잠드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잠든 유빈을 깨운 건 초인종 소리였다. 유빈은 기신기신 일어나 인터폰 버튼을 눌러 문밖의 상황을 확인했다. 낯설지 않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언젠가 엘리베이터에서 그리고 계천에서 만났던 캐빈이라는 사람이었다. 유빈은 친하지 않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었다. 인터폰을 끄고 다시 침대에 누우려고 했다. 그때 인터폰 너머로 캐빈이 말했다.
“유빈. 문 열어봐. 이거 중요해.”
유빈이 말했다.
“돌아가 주세요. 지금 피곤해서요.”
유빈이 인터폰 버튼으로 손을 가져갈 때 캐빈이 급하게 외쳤다.
“잠깐만. 나 하이데스야.”
유빈의 손이 멈칫했다. 익숙한 이름이었다. 유빈의 사진이 인터넷에 유포됐을 때, 유빈의 페이스북 계정이 해킹당했을 때 유빈을 도와준 해커였다. 캐빈이란 사람도 계천에서 유빈이 살수에게 칼에 맞을 뻔했을 때 살려준 적이 있었다. 저 남자는 이 끔찍한 상황에서 유빈을 도와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케빈, 혹은 하이데스가 인터폰 카메라를 향해 들고 있는 물건을 흔들며 말했다.
“피자도 사 왔어. 문 열어줘.”
그러고 보니 유빈은 몹시 배고팠다. 며칠이나 굶었는지도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일단 저자와 대화를 나눠보기로 하고 문을 열었다. 집 안으로 들어온 캐빈은 불쑥 현관을 지나 방바닥에 신발을 신은 채로 한 발을 내디뎠다. 유빈은 공들여 닦은 지 얼마 안 된 바닥에 발자국이 찍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기요. 신발.”
캐빈이 멋쩍어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나서 현관에 신발을 벗고 다시 들어왔다.
“미안. 또 깜박했다. 미국에서 와서 그래. 이해해줘. 피자 먹어. 너는 피자 먹고 나는 네 휴대폰 잠깐 빌릴게.”
그러고는 유빈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는 피자 박스를 바닥에 펼치고 잠깐 두리번거리더니 유빈의 책상에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가져온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에 전환을 켜고 유빈의 휴대폰을 연결했다.
유빈은 피자 한 조각을 물고 캐빈이 무엇을 하는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캐빈은 바쁘게 마우스를 움직이고 무언가를 타이핑하더니 피자 한 조각을 다 먹은 유빈에게 이리 와보라며 손짓했다. 유빈은 캐빈에게 한발 다가섰다. 캐빈이 다시 손짓하며 말했다.
“가까이 와서 이 화면 봐봐.”
유빈은 피자 한 조각을 더 들고 캐빈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컴퓨터 화면에는 온갖 알 수 없는 파일들이 늘어져 있었다. 캐빈이 파일 하나를 클릭하며 물었다.
“요즘 휴대폰이 갑자기 느려지거나 하지 않았어?”
유빈은 피자를 삼키며 끄덕였다. 캐빈이 방금 클릭했던 파일을 복사해 어떤 프로그램을 열어 붙여넣었다.
“자 봐. 이 파일은 원래 이렇게 용량이 크지 않아. 얘를 분석해보면…….”
잠시 후에 캐빈의 노트북에 있던 프로그램이 붙여 넣어진 파일의 분석을 완료했다. 그리고 캐빈이 설명을 계속했다.
“이렇게 쪼개지지. 얘는 원래 휴대폰 작동에 필요한 파일이고 방금 떨어져 나온 얘는 위치추적 프로그램이야.”
위치 추적 프로그램이라는 말에 유빈이 피자를 입에 넣은 상태로 기침을 시작했다. 캐빈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유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아? 코크를 안 사왔네.”
유빈이 입에 있던 피자 조각을 삼키고 캐빈에게 물었다.
“누가 왜 깔아놓은 거예요?”
캐빈이 컴퓨터에 집중하며 짧게 끊어서 대답했다.
“스토커. 이유는 글쎄.”
그 뒤로도 캐빈은 유빈의 휴대폰을 뒤지고 의심스러운 파일들을 분석하고 유빈에게 결과를 설명했다. 유빈은 캐빈에게도 피자를 권해봤지만 캐빈은 식사 예절을 지키는 사람이라 바닥에 놓인 피자는 안 먹는다는 농담 같은 대답을 무뚝뚝하게 하며 유빈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자기가 바닥에 놨잖아?’
수 십 개의 악성 프로그램들이 발견되었다. 대부분은 유빈의 딜도 팬티와 애널 플러그 진동을 원격으로 조종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이었다. 질경에 연결된 프로그램도 발견되었다. 유빈은 스토커가 어떻게 자신이 보낸 도구들을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었는지 이해했다. 그러고 보니 진동이 울릴 때는 항상 휴대폰이 옆에 있었다.
캐빈은 한 프로그램의 코드를 분석하면서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마우스 등을 두드렸다. 유빈은 무슨 프로그램인지 궁금해서 캐빈의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지만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코드들만 잔뜩 보였다. 캐빈에게 물었다.
“이건 뭔데요?”
캐빈이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아까 보여준 거랑 비슷한 원격 조종 프로그램인데 얜 특이하네. 이 프로그램이랑 쌍을 이루는 프로그램이 하나 더 있어야 작동해. 쌍을 이루는 프로그램이 설치된 기기가 근처에 있으면 얘도 같이 돌아가게 설정된 것 같은데?”
유빈의 머릿속에 박 대리님이 떠올랐다. 박 대리님이 가까이 오실 때 딜도 팬티의 진동이 울렸었다. 그것 때문에 그녀는 박 대리님을 의심했었다. 그런데 박 대리님이 휴대폰을 바꾸고 나서는 유빈이 딜도 팬티를 입고 있어도 진동이 울리지 않았다.
캐빈이 말한 쌍을 이루는 프로그램이라는 게 박 대리님 휴대폰에 설치돼 있었던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오히려 유빈과 같은 해킹 피해자일 박 대리님을 스토커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던 게 죄송했다.
캐빈이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에서 유빈의 휴대폰을 빼 유빈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이거 도저히 안 되겠다. 초기화해서 그냥 버려. 옛날 모델이네. 내가 새 모델로 사줄게.”
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이 휴대폰을 들고 다니고 싶지 않았다. 캐빈은 끄덕이는 유빈과 천장을 번갈아 보더니 유빈에게 형광등은 바꿨냐고 물었다. 유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속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최근에 일어난 너무 많은 일들 때문에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캐빈이 유빈에게 드라이버를 달라고 했다. 드라이버를 받은 캐빈은 의자에 올라가 직접 형광등 하나를 해체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작은 카메라 하나를 꺼내 유빈에게 보여줬다. 유빈은 말없이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의자에서 내려와 손을 씻고 돌아온 캐빈은 피자 박스를 놓고 유빈과 마주 앉았다. 배가 고팠는지 먹지 않겠다던 바닥에 놓인 박스에 들어있는 피자를 한 조각 집어먹었다. 유빈이 따라놓은 컵에 담겨 있던 콜라도 들이켰다. 유빈이 캐빈이 먹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오늘 이거 해주려고 오신 거예요?”
캐빈이 짧게 대답하고 피자 한 조각을 더 집어먹기 시작했다.
“아니.”
유빈은 캐빈이 두 번째 조각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그럼 왜 오셨어요?”
캐빈이 다시 짧게 대답하고 세 번째 피자 조각을 집었다.
“너 데려가려고.”
유빈은 캐빈이 자신이 하이데스라고 소개했던 게 떠올랐다.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 나를 데려간다고?’
이번에는 캐빈이 피자를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물었다.
“어디로요?”
캐빈이 유빈의 놀란 눈을 보며 뭔가 오해했다는 걸 직감하고 빠르게 대답했다.
“안전한 곳으로. 일단 이거 먹고 이야기하자. 나 코크 더 갖다 줘.”
피자를 다 먹고 콜라병을 비운 캐빈이 설명을 시작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유빈의 휴대폰에 설치된 백신 프로그램이었다. 왜 백신 프로그램이 설치돼 있는데도 휴대폰이 해킹당했는지 아냐는 캐빈의 물음에, 유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업데이트도 꼬박꼬박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