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19. 그 결과
상무실에서 치욕스러운 일을 겪고 자리로 돌아온 유빈은 자괴감에 빠져있었다. 자신이 헌신해온 회사가 임원이 여직원을 불러 폭행하고 성추행해도 되는 곳이라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자신의 발로 찾아가 성추행을 당하라는 지시도 받았다.
유빈은 내일 이 회사에 다시 출근해야 한다는 게 끔찍했다. 시계를 보고 퇴근 시간까지 얼마나 남았나 계산해 보았다. 남은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길고 끔찍한 시간을 견디고 퇴근하는 유빈에게 스토커가 카톡을 보냈다.
- 오늘 즐거웠어?
- 진동은 너 바쁠 것 같아서 일부러 안 켰어.
- 집에 도착하면 선물이 와 있을 거야.
- 가자마자 열어 봐.
- 그것도 내일 김덕기한테 같이 검사받아.
- 사랑해.
집에 도착하자 문 앞에 상자가 놓여있었고 상자를 열어 본 유빈은 경악했다. 상자에는 굵기가 다른 바늘들과 소독약, 고리 모양의 보라색 피어싱 3개가 들어있었다. 동봉된 설명서에는 바늘을 소독해서 유빈의 양 유두와 음핵에 구멍을 뚫고 링 모양의 피어싱을 그 세 구멍에 끼우라고 했다. 스토커에게서 다시 카톡이 왔다.
- 나는 색이 맞는 V가 되게 좋아.
- 내가 좋아하는 색은 보라색.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보라색 V로 맞춰야 해.
스토커의 카톡에서 광기(狂氣)가 느껴졌다. 유빈은 더 이상 스토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거부의 메시지를 보낼까 고민해 봤지만 소용없을 것 같았다. 카톡보다 훨씬 강력한 수단이 필요했다.
스토커가 싫어할 만한,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스토커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만한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하던 유빈은 오늘 밤 클럽에 가기로 했다. 자신이 장난감이나 애완동물이 아니라는 걸 스토커가 똑똑히 알았으면 했다.
유빈은 냉장고에 들어 있던 맥주 한 병을 꺼내 마시면서 마지막으로 클럽에 갔던 게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았다. 대학생 때 자주 다니다가 공인회계사 준비를 시작하면서 발길을 끊었었다. 그리고 입사 직후에 축하 파티를 하러 친구들과 같이 갔던 게 마지막이었다. 클럽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그리워졌다. 스토커의 속박에서 벗어날 탈출구처럼 느껴졌다.
내일 출근이 걱정되었지만 피곤해서 못 일어난다면 출근하지 않기로 했다. 출근해서 김 상무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게 끔찍했다. 임원의 지위를 이용해 부하 직원을 서슴없이 성추행하는 회사에 정도 떨어졌다. 반병쯤 비운 맥주에 벌써 술기운이 올라온 것일까, 그녀 스스로 만든 분위기에 취해버린 것일까, 괜한 자신감도 생겼다.
‘잘리면? 다른 데 가지 뭐.’
자신이 클럽에 가는 걸 스토커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짜릿한 복수가 될 것 같았다. 딜도 팬티를 벗어 버리고 화장실로 가 안간힘을 다해 애널 플러그를 뽑았다. 고통스러웠지만 시원했다. 스토커에게서 한 발 벗어난 것 같았다.
샤워하고 옷장 앞에 서서 클럽에 입고 갈 옷을 골랐다. 엉덩이 라인을 잡아 줄 스포츠 팬티 위에 스키니진을 입었다. 상의는 사놓고 오랫동안 못 입은 파란색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크롭 티셔츠를 걸쳤다.
오랜만에 딜도 팬티를 벗어버리고 골반을 감싸주는 스포츠 팬티를 입으니 꽤나 포근했다. 크리스피한 바지에 다리를 넣을 때 바사삭하는 느낌도 괜찮았다. 크롭 티셔츠까지 입고 거울을 보았다. 마음에 들었다.
거울로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을 보며 화장을 고민했다. 샤워하면서 지운 기본 화장을 다시 하고 눈썹과 아이라인을 그려 넣었다. 컨실러로 눈 밑의 깊은 다크서클을 가렸다. 블러셔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생략하기로 했다. 갈라질 정도로 바싹 말라있는 입술엔 빨간 립스틱을 칠했다. 크롭티셔츠의 파란색 줄무늬와 서로 보색을 띠며 입술이 돋보였다.
거울의 자신에게 입술을 내밀어 보았다. 매력적인 입술이었다. 마지막으로 눈가와 코 주변, 턱 선에 쉐도우를 넣어 입체적인 얼굴을 완성했다. 머리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지만 단발이라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고데기를 가져와 깔끔하게 정리했다. 거울에 아침보다 다섯 살은 어려 보이는 여자가 보였다.
유빈은 흡족해하며 신발장으로 갔다. 하이웨스트 스키니진과 크롭티셔츠에 어울릴만한 스니커즈를 골랐다. 퇴근하고 현관에 벗어 두었던 하이힐이 눈에 들어왔다.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클럽을 갔을 때 하이힐을 신고 갔다가 넘어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이 좋은 기분을 스토커가 보낸 하이힐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았다.
한쪽 발을 들어 현관 구석으로 스윽 밀었다. 하이힐이 넘어지면서 서로 뒤엉켰다. 다시 세워 놓을까 고민했지만 오늘만큼은 그 하이힐에 손 대고 싶지 않았다. 다시 발을 들어 신발장 아래 공간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방으로 돌아와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9시. 아직 클럽에 가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유빈은 남은 맥주를 마시며 휴대폰으로 요즘 유행하는 클럽 춤을 찾아봤다. 춤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요즘 유행을 못 따라가는 아줌마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다. 백주가 비워지고 시간이 흘렀다. 유빈은 벌떡 일어났다. 스토커에게 반항하기로 했으니 휴대폰은 집에 놓고 나가기로 했다.
습관처럼 아파트 치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문을 열었다가 금세 다시 문을 잠갔다. 클럽에 가는데 차를 타고갈 수는 없었다. 주차할 곳도 없고 술도 못 마실수 없었다. 게다가유빈은 이미 맥주 한 병을 마셨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자정에가까워질수록, 상수역에 가까워질수록 시선을 끄는 지하철 안 사람들의 복장도 클럽 문화의 일부이다. 유빈은 스키니진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교통카드 기능이 추가된 신용카드가 잘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힘찬 걸음으로 지하철역을 향해 출발했다.
지하철역에 가까워지자 서울의 뜨거운 여름밤이 느껴졌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가게들은 여전히 성업 중이었고 술집들은 오히려 더 붐볐다. 유빈은 보폭을 넓히며 사람들을 헤치고 지하철역으로 걸어 들어갔다.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한 계단 한 계단을밟을 때마다 가슴에 맺혀있던 응어리들이 터져나가는 것 같은 상쾌함이 느껴졌다.
카드를찍고 승강장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철이 도착했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문 가운데로 당당히 들어갔다. 내리려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유빈을 노려보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유빈은 신경 쓰지 않고 빈자리에 앉았다.
상수역에서 내려 역 안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집었다. 계산을 하려는데 편의점 직원이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유빈은 자기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남자가 신분증을 보여 달라는 말에 깔깔거리며 웃었다.
“고등학생으로 보여요? 설마 중학생으로 보이는 건 아니죠?”
웃고 나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신분증을 보여주고 신용 카드를 내밀어 맥주 값을 내고 역 밖으로 나왔다. 클럽을 향해 걸어가면서 맥주 캔을 따서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자정의 홍대 분위기가 느껴졌다. 곳곳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은 무언가에 취한 듯 바삐 움직였다.
유빈은 맥주 캔을 비우며 그들에게 녹아들었다. 버스킹에 환호하는 사람들 틈에 껴서 같이 소리 질러 보기도 하고, 주류회사에서 진행하는 다트 던지기 이벤트에도 참여했다. 결과는 꽝이었지만 괜찮았다. 기념사진도 같이 찍었다. 빈 맥주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클럽으로 들어갔다.
유빈의 기분이 더욱 달아올랐다. 입장권으로 테킬라 한 잔을 사서 입에 털어 넣고 사이키 조명 아래에서 춤추는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그녀를 향해 뻗어 오는 남자들의 손길을 매너 있게 거부하며 플로어를 누볐다. 대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짜릿함이 느껴졌다.
음악이 유행곡으로 바뀌고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다. 유빈은 스테이지로 올라갔다. 유빈을 따라 올라온 한 남자가 과감하게 유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빈은 잠시 멈칫 했지만 스테이지 아래 사람들이 그 남자와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가 내민 손을 잡았다. 유행곡에 환호성이 섞이며 클럽이 달아올랐다.
남자는 리듬과 분위기를 타며 유빈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곧 남자와 유빈의 몸이 밀착되어 부벼졌다. 1절이 끝나고 아주 잠깐 클럽 전체의 불이 꺼졌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빈에게 기습 키스했다. 다시 조명이 들어오고 2절이 시작됐을 때스테이지 위에서 키스하는 둘의 모습에 사람들은 다시 열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