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화 〉16. 다시 시작된 (16/70)



〈 16화 〉16. 다시 시작된


프레젠테이션 중에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유빈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발을 향했다. 유빈은 스토커가 보낸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딜도 팬티를 입지 않는 대신 하이힐이라도 신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에 오늘도 신고 출근했다. 그런데 그 하이힐을  상무가 정확히 지적했다. 갑자기 신발 이야기가 나올 맥락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김 상무의 유머라고 생각하며 적당한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김 상무의 마지막 말은 유빈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상무님을 향한 유빈의 의심은 괜한 착각이 아니었다. 유빈이 대답하지 않고 아래를 보고 있지 상무님이 다시 마이크를 켰다.

“오늘 프레젠테이션 마치겠습니다. 민유빈 대리 상무실에 들러 주실 거죠?”

유빈이 급히 마이크를 입으로 가져오며 말했다.

“네. 상무님. 감사합니다. 잠시 후에 찾아뵙겠습니다. 모두 점심 식사 맛있게 하세요. 오늘 발표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무를 시작으로 사람들은 하나둘씩 대회의실을 빠져나갔고 넓은 대회의실에 혼자 남은 유빈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 끝났다는 기쁨보다는 김 상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지난 번 출근길에 유빈을 따라왔던 일에 오늘 프레젠테이션에서 스토커가 보낸 하이힐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까지 생각하면, 도저히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따 상무실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두려웠다. 예상했던 대로 상무님이 스토커라면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 벌어질  같았다.

유빈은 점심까지 거르고 자신의 자리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상무실이 있는 16층 버튼을 눌렀다. 중간에 멈추지 않았던 엘리베이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덜컹 소리를 내며 16층에 도달했다.

유빈은 상무이사 비서실을 통과해 김 상무의 개인 집무실 앞에 섰다. 심호흡을 하고 노크를 하려는 순간문이 열리고 김 상무가 직접 나타났다. 가까이서 본  상무의 각 잡힌 얼굴은 회사원보다는 조직폭력배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유빈은 정말 상무님이 스토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빈이 스토커 생각에 허공을 응시하고 있자 김 상무가 말했다.

“민유빈 대리. 뭘 그렇게 서 있어. 긴장하지 말고 어서 들어와. 상무실이라고 특별한 거 없어. 다 같은 사무실이지.”

유빈은 억지로 웃으며 대답하고 상무실로 들어가 소파에 앉아 김 상무와의 독대를 시작했다. 먼저 대화를 주도한 쪽은 김 상무였다.

“오늘 프레젠테이션 아주 인상 깊었네. 완벽해서 피드백을 주려고 해도 줄  없더군. 오늘은 그것 때문에 부른 건 아니고, 민유빈 대리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이번에 영업1팀에서 ICT 쪽 사업을 크게 하잖아. 민 대리가 거기 가서 도움을 조금 줬으면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유빈은 상무님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ICT라면 정보 컴퓨터 기술의 약자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지, 유빈의 전공분야도, 관심 분야도 아니었다. 사적인 일을 회사 일에 끌어들여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알고 있었지만, 그 단어를 듣고 스토커와 하이데스가 생각나 기분이 언짢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영업1팀은 김덕기 상무가 사실상의 팀장으로 직접 지휘를 하는 팀이었다. 김 상무가 스토커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의 직속 부하직원으로 들어가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유빈이 거절하기 위해 단어를 고르고 있을   상무가 설득하듯 말을 이어갔다.

“영업1팀 친구들이 다 공대 출신이라 기술에는 아주 빠삭한데 전반적으로 기획이나 자금 흐름 같은 부분들 관리해줄 사람이 없어. 내가 직접 하려고 해도 워낙 바쁘기도 하고, 나도 컴퓨터공학과 나와서 사실 재무나 회계 쪽은 빨리빨리 처리가 안돼. 그래서 자네한테 부탁하네. 고연대 경영학과 나와서 공인회계사도 패스했다면서. 지금 영업1팀에 자네가 꼭 필요해. 민 대리, 대리 단지 몇 년 됐지?”

유빈은  상무의 말을 들으며 거절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마지막 질문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상무는 교묘하게 유빈에게 거절할 기회도, 타이밍도 주지 않고 있었다. 유빈이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대리로 입사해서 올해 3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김 상무가 자신의 뜻대로 풀려간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대리 3년차면 과장 달 때가 됐구먼. 그렇지?”

유빈은 겸손을 표하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유빈은 영업1팀으로 옮기기보단 재무팀에 계속 남아 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김 상무는 유빈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겸손도 지나치면 보기 안 좋은 법이네. 오늘 프레젠테이션 보니 과장이 아니라 차장을 달아도 되겠던데? 자네 과장 승진 건과 영업1팀 발령 건은 내가 같이 검토해보겠네. 이만 내려가서  보게.”

결국 끝까지 유빈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직장에서 상사가 승진을 말할 때 부하직원이 반대 의견을 낸다면 자칫 예의 없게 비춰지기 좋은 상황이었다. 유빈은 간단한 인사를 드리고 소파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조금 걸어갔다.

그때 김 상무가 툭 던지듯 말했다.

“민 대리, 그 구두 어디서 샀어? 발표할 때부터 눈에 띄더라고.”

김 상무는 또다시 스토커가 유빈에게 신고 다니라고 요구한 하이힐을 지적했다. 유빈은 잠시 망설였다. 평범한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의 관계로 남을 것인지, 스토커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뎌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탐색을 위해 적당히 중의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을 던져 보았다.

“이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저한테 꼭 신어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스토커와 관련된 이야기가 김 상무의 입에서 나오길 빌었다. 하지만 김 상무는 그 구두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어이구. 유빈 씨 연예인이네. 협찬도  받고.”

유빈은 답답했다. 분명히  상무는 스토커와 관련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스토커가 보낸 하이힐을 이렇게 자주 맥락에 맞지 않게 지적할 이유가 없었다. 저 웃음뒤에 감춰진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지난 토요일 계천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캐물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이곳은 그녀가 일하는 회사였으니까. 그렇게 감정적으로 변해 캐묻는다고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이제는 알고 있었으니까.

유빈이 포기하고 상무실을 나가려는 순간, 김 상무가 벌떡 일어나 유빈의 손목을 잡아끌더니 벽으로 밀쳤다. 그리고 유빈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그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다른 손은 치마 안으로 집어넣었다.

손목과 손가락을 집요하게 놀리며 유빈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가 유빈의 팬티 안으로 김 상무의 손이 들어갔다. 유빈은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직장 내 성추행을 당하는 불쌍하고 순진한 여직원의 눈망울로, 하지만 스토커의 정체를 밝혀내겠다는 날카로운 정신으로 김 상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도 김 상무의 손가락은 유빈의 국부를 유린하고 질 안으로 파고들었다. 유빈은 김 상무가 무엇을 확인하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유빈의 팬티에서 손을 빼고 손목을 돌려 유빈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김 상무가 말했다.

“민유빈 대리, 이 복장으로 다니면 안 되지 않나?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이 더 중요한 법이야.”

유빈은 여기에서 물러설  없다고 생각했다. 입을 막은 김 상무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저한테 그 흉물스러운 팬티와 하이힐을 보낸 게 상무님이셨습니까?”

김 상무가 손사래 치며 대답했다.

“난 아니야.”

유빈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김 상무 본인이 스토커가 아니라면 스토커는 대체 누구인지 왜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하는 건지 김 상무는 스토커와 무슨 관계인지 알아야 했다.

“그렇다면 누구입니까? 상무님은 어떻게 그 일을 알고 계신 겁니까?”

김 상무가 다시 유빈의 손목을 낚아채 집무실 벽에 몰아세우더니 팔꿈치로 그녀의 목을 누르기 시작했다. 유빈은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성대가 강하게 눌리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유빈의 숨이 차오르고 정신이 아찔해질 때쯤 김 상무는 반대 손 집게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대면서 유빈의 목을 억압하고 있던 팔꿈치를 풀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잘 들어. 그자가 시키는 대로 해.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도 장담할  없어. 목숨을 잃게 될지, 아니면 어딘가로 팔려가 롱타임 30만 원짜리 창녀가 될지 그자를 빼면 아무도 몰라. 그자는 그럴 힘을 갖고 있어. 반항하지 마. 오늘은 상무이사 권한으로 반차 처리할 테니까 집으로 바로 들어가. 그리고 내일부터 앞뒤 둘 다 그 자가 시켰던 대로 갖춰 입고 출근해.”

유빈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상무님. 알려주십시오. 그자가 누구입니까?”

김 상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민유빈 대리. 이만 퇴근하세요.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바른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유빈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깨달았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머리를 숙여 인사하고 상무실을 나왔다.

유빈이 나가자  상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안 입고 있었습니다. 네. 알아듣게 말해뒀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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