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화 〉14. 롱타임 30만원 (14/70)



〈 14화 〉14. 롱타임 30만원

아직 내일의 프레젠테이션이 남아 있었기에 술을 마실 수는 없었지만 카페에 가서 지난번에 먹지 못한 파니니를 먹기로 했다. 스토커의 해코지를 견뎌내고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끝낸 자신에게 그 정도 상은 줘도 될 것 같았다.

유빈은 좀처럼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좌회전 차선에서 빠져나와 잠깐의 드라이브를 즐기다 카페가 보이는 곳에 멈췄다. 파니니를 주문하고 구석진 자리를 골라 앉았다. 진동 벨을 받아왔다. 평소에도 손님에게 서빙 업무를 떠넘긴다는 생각에 탐탁지 않게 여기던 진동벨이었지만 오늘은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빈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진동 벨을 노려보았다. 진동 벨이 울렸다. 진동이 탁자에 전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유빈이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항문을 조였다. 플러그에 찢어지고 아직 아물지 않은 항문에서 배 안쪽으로 고통이 찔러 들어갔다. 유빈은 한 손으로 의자를 짚고 일어나 진동 벨을 들었다. 진동 소리가 작아졌고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진동 벨을 반납하고 주문했던 파니니와 자몽에이드를 받아왔다. 유빈이 자리에 돌아왔을 때 유빈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앉았다. 두꺼운  몇 권과 노트  권, 계산기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공부를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남자는 책을 보는 시간보다 유빈을 훔쳐보는 시간이 더 많은  같았다. 유빈과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하며 다시 공부하는 척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빈은 평소 같았으면 어린 남자한테도 관심을 받는다고 우쭐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런 로맨틱 코미디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스토커가 생각났다. 스토커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저 학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유빈은 학생이 공부하고 있는 책들을 관찰해 보았다. 탁자 귀퉁이에 쌓여 있는 세법과 경제학 책이 눈에 들어왔다.

계산기를 두드리며 지금 공부하고 있는 책은 아마 회계학 책인  같았다.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이미 공인회계사 시험을 패스한 유빈은 잠깐이지만 후배를 만난  같은 기분에 반가움을 느꼈다.

유빈은 그 남학생에게 접근해보기로 했다. 정말로 스토커가 보낸 사람이라면 뭔가 알아낼  있을지도 몰랐다. 자몽에이드 컵을 들고 남학생에게 걸어갔다.

“회계 공부해요?  CPA인데 도와줄까요?”

남학생이 멈칫하며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순진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스토커에게 고용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낯설지만 예쁜 여자의 접근을 받고 수줍어하는 이십  초반 남자의 귀여움이 묻어났다. 남학생이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유빈이 폭소를 터트렸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를 그렇게 열심히 훔쳐봤냐고, 얼굴은 왜 또 그렇게 빨개졌냐고 물어보려다 그냥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고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 남학생은  이상 훔쳐보지 않았다.

파니니를 마저 먹고 자몽에이드를 마시고 유빈은 카페를 나왔다. 그 남학생은 따라 나오지 않았다. 한바탕 웃고 나니 날카롭던 유빈의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다. 스토커가 그녀의 삶에 나타난 뒤로 그렇게 웃어 본 게 처음이었다.

유빈은 차에 타고 집으로 향했다. 퇴근 차량이 빠졌는지 이제 도로는 막히지 않았다. 드라이브를 즐기고 집에 도착해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갔다.

집에 도착한 유빈은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월요일이었지만 벌써 너무 피곤했다. 토요일, 일요일에 쉬지도 못했고 프레젠테이션 준비 업무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온종일 너무 많은 사람들을의심하느라 완전히 지쳐버렸다.

출근부터 퇴근까지 의심의 연속이었다. 출근길엔 검은 세단과  안에 타고 계셨을 상무님을 의심했고 회사에서는  대리님을 의심했다. 퇴근길에는 그저 우연히 유빈의 옆에 있었을 뿐인 대학생도 의심했다. 침대에 누워 생각해 보니 자신의 의심이 황당하게 느껴졌다.

상무님은 회사로 가는 중이셨을 테니 당연히 유빈이랑 방향이 겹쳤을 테고, 박 대리님은 여전히 좋은 회사 동료였다. 회사에서 딜도 팬티를 입고 있던 날, 왜 박 대리님이 가까이 오실 때마다 딜도가 진동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박 대리님이 스토커라면 그렇게  나게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는 않으셨을  같았다. 아마 그것도 스토커가 박 대리님을 이용해 자신을 감추기 위해 벌인 장난 하나였을 것이다.

카페에서 만난 대학생을 스토커가 보낸 사람이라고 의심했던  다시 생각해 봐도 황당했다. 그 학생은 유빈이 들어오기 전부터 카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중에 도착해서 먼저 접근한 쪽은 오히려 유빈이었다. 괜히 그 학생에게 미안해지기도 하고 얼굴이 빨개져 시선을 피하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스토커 때문에 신경이 너무 곤두서있어서 괜한 사람들을 의심했다.

유빈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미 수 십 번도  확인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확인해보기로 했다. 스토커와의 대화방을 열었다. 스토커는 유빈이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그 위로 스토커가 요구했던 것들이 보였다. 꼬리를 달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홍대 앞에서 차에 올라가 춤을 추라니. 미친놈이 틀림없었다.

유빈은 굳게 결심하고 대화방을 나갔다. 스토커와 나누었던 모든 메시지가 삭제됐다.  이상 스토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유빈이 휴대폰을 내려놓자마자 카톡이 울렸다. 방금 전 스토커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지만 반사적으로 스토커가 메시지를 보냈을 거라고 생각하며 다시 휴대폰을 집어 올렸다. 다행히 스토커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반가운 사람도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 유빈이 좋다고 따라다니던, 유빈은 좋아하지 않던 선배였다.

“유빈아 너 진짜 롱타임 30만원이야? 나 할래.”

유빈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없었다. 카톡이 다시 울렸다.

“오해한 거면 미안. 페북에 이런 걸 올렸길래.”

사진 한 장이 전송됐다. 사진을 확대한 유빈은 경악했다. 사진은 성매매 광고였다. 사진의  위에는 빨간 글씨로 ‘숏타임(2시간) 20만원 롱타임(8시간) 30만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 유빈이 누워 있는 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의 유빈은 그녀의 침대 위에서 벌거벗은 채로 거대한 딜도를 자신의 질에 넣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얼굴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실제로는 고통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마치 사진에서는 마치 오르가즘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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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커가 처음에 딜도 팬티를 입으라고 했을 때의 모습이었다. 사진의 중간에는 유빈의 배꼽을 가로질러 ‘큰 게 좋아요’라는 문구가 찍혀 있었고, 사진의 아래에는 유빈의 실명과 카톡 아이디까지 적혀 있었다. 스토커가 몰래카메라로 유빈을 관찰하고 있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녹화까지 되어 이렇게 사용될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유빈은 답장할 겨를도 없이 페이스북 앱을 켰다. 오랫동안 로그인하지 않아 다시 이메일 주소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했다. 급한 마음에 계속 오타가 났고 시간이 흘러갔다. 그 시간동안  누군가 저 사진을 볼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로그인에 성공했다.

뉴스피드를 볼 겨를도 없이 자신의 개인 정보를 확인했다. 스크롤을 내려 선배가 보내  사진을 찾으려고 했다. 그런데 없었다. 활동로그도 확인해 보았지만 최근에 게시물을 올린 기록은 없었다. 유빈은 카톡에서 사진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분명히 자신의 계정으로 올라와 있는 게시물이었다. 유빈이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아해하고 있을 때 고등학교 선배가 다시 카톡을 보냈다.

“롱타임 부담스러우면 숏타임도 괜찮아.”

유빈은 창녀가 된 기분에 환멸감을 느꼈다. 하지만 선배가 자신의 계정으로 올린 자신의 얼굴과 이름이 있는 사진까지 보내준 상황에서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최대한 예의바르게 상황을 모면할 만한 답장을 했다.

- 선배.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지내시죠? 페이스북 해킹당한 것 같아요. 사진에 있는 사람 닮긴 했는데 저 아니에요.

선배가 끈적한 답장을 보내왔다.

- 너 맞잖아. 내가 널 얼마나 좋아했는데 네 얼굴을 못 알아보겠어. 고등학교 때랑 하나도 안 변했더라. 적혀 있는 카톡 아이디도 네 거잖아. 그거 보고 연락하는 거야. 유빈아…….  지금 그 사진 보면서 자위 중이야. 봐줄래? 내  커. 5분만. 10만원 줄게. 그냥 보고만 있어줘. 혹시 괜찮으면 10분만 같이 자위해줘. 20만원 줄게. 숏타임 뛰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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