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화 〉13. 좋은 밤이었다 (13/70)



〈 13화 〉13. 좋은 밤이었다



번호를 중얼거리다 과속방지턱에서 속도를 줄이지 못했다. 덜크드엉. 몸이 흔들리면서 마음도 같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유빈은 검은색 세단이 진짜로 자신을 따라오는 건지 단지 그녀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을 뿐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회사까지 조금 돌아가는  감수하고 통행량이 적은 골목길로 들어가 보았다. 검은 세단이 자신의 방향대로 가는 거라면 이 골목길로 들어올 가능성은 낮다는 가설을 세웠다. 검은 세단이 따라 들어왔다. 유빈의 불안감이 이성을 뒤덮었다. 괜히 차선도 없는 인적 드문 골목길로 들어왔다고 후회했다.

떨리는 심정으로 옆에 보이는 편의점 앞에 차를 세웠다. 쿵쾅거리는 왼쪽 가슴을 손으로 눌러 진정시키고 룸미러로 뒤를 바라보았다. 검은 세단은 여전히 거기에 서 있었다. 갑자기 검은 세단에서 경적이 울렸다.

‘빠앙!’

놀란 유빈의 손이 핸들 위에서 떨렸다. 뒤차는 계속해서 경적을 울렸다. 유빈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에서 내릴 수도 없었고  좁은 골목길에서 레이스를 펼치며 도망갈 수도 없었다. 뒤차가 화가 난 듯 경적간의 간격이 점점 짧아졌다. 유빈의 머릿속에 온갖 불길한 상상이 펼쳐졌다.

‘강간당할지도 몰라. 진짜 스토커라면 딜도 팬티를 벗고 애널 플러그를 뺐다고 나를 죽일지도 몰라. 죽인다고 했잖아. 어쩌면 차에 화장실이랑 계천에서 봤던 남자가 같이 타고 있을지도 몰라. 직접 죽이지 않고 그 남자한테 시키겠지?’

유빈의 상상이 사후세계까지 펼쳐졌을  누군가 유빈의 차 창문에 노크했다.

‘똑, 똑.’

차 안에서 노크 소리와 유빈의 맥박 소리가 같이 울렸다. 유빈은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려 노크한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편의점 유니폼을 입고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가 다시 노크했다. 유빈은 창문을 조금 내렸고, 여자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 남의 가게 앞에 이렇게 차를 세워 두시면 어떡해요!”

유빈은 룸미러와 사이드미러로 주변 상황을 둘러보았고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했다. 유빈의 차가 골목을 막고 있었다. 골목길 치고 좁은 편은 아니었지만 양 옆으로 주차된 차들 사이에 유빈의 차가 멈추면서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길도, 뒤차가 지나갈 길도 막혀 있었다.

뒤차가 다시 경적을 울렸다. 가게 입구가 막힌 데다 경적 소음까지 더해져 편의점 점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유빈은 사과하고 차를 조금 옮겨 통행을 방해하지 않을만한 곳에 다시 세웠다. 유빈의 뒤에 서 있던 검은색 세단은 속도를 높여 그대로 유빈의차를 지나쳐 갔다.

역시 잠깐 가는 방향이 같았을 뿐이었다. 유빈은 엉뚱한 사람을 의심하고 길을 막고 영업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괴롭고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 속 한 구석에선 두려움에 떠는 어린 아이가 여전히 검은 세단에는 스토커가 타고 있었을 것이라고, 이렇게 지나가 버린 것도 유빈을 조롱하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수작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회사에 도착한 유빈에게 박 대리님이 인사를 건넸다. 주말에 뭐했냐는 평범한 아침 인사에 유빈의 몸이 얼어붙었다. 자신이 항문에 플러그를 넣는 변태 같은 행동을 했던 걸 박 대리님이 알고 계신 것만 같았다. 며칠 전 딜도 팬티를 입고 있을  박 대리님과 가까워질 때마다 딜도가 진동했던 것도 생각났다. 딜도 팬티는 입고 있지도 않았지만 질이 움찔했다.

유빈의 눈에  대리님이 스토커로 보이기 시작했다. 직장생활 3년차, 회사 문화에 적응했다고 자신하던 유빈은 그 흔한 인사에 대답하지 못했다. 얼어있는 유빈에게 박 대리님이 다시 말을 걸었다.

“유빈 씨 괜찮아?”

유빈은 속으로 얼음을 깨고 나와야 한다고 부르짖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아 박 대리님. 죄송해요. 잠깐 딴생각이 들었네요. 좋은 아침이에요.”

 대리님은 주말에 뭐 했냐고 물었지만 유빈은 자신이 주말에 대해서도 박 대리님의 주말에 대해서도 물어볼 수 없었다. 박 대리님이 인사에 대답했다.

“응. 좋은 아침이야.”

유빈은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의 책상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무슨 업무를 처리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상태로 오전 근무 시간이 끝났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유빈은 여전히 영혼 없는 얼굴로 하이힐 굽 소리만을 내며 회사 건너편 식당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뒤에서 유빈을 따라온 박 대리님이 유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유빈은 순간적으로 어깨를 털어 손을 뿌리쳤고 당황한 박 대리님과 눈을 마주쳤다. 유빈의 질이 다시 움찔했다. 아니 이번엔 떨리고 있었다.  대리님이 사과했다.

“유빈 씨 미안.”

유빈도 덩달아 당황해 같이 사과했다.

“아 박 대리님. 죄송해요. 딴생각하다 깜짝 놀랐어요.”

 대리님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유빈 씨 오늘 생각이 많다? 먹어야 생각도 하지. 할머니 철판 가는 길이었지? 같이 가자.”

박 대리님은 좋은 사람이었다. 대리로 입사한 유빈과 직급은 같았지만 연차는 훨씬 높았고, 유빈이 회사 생활을 시작할 때 멘토 역할을 하며 회사 생활에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신 분이었다. 유빈은 박 대리님과 어색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박 대리님이 스토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 회사 앞에 세워진 검은색 세단 한 대 유빈의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같은 차종이었다. 유빈은 흠칫하며 번호판을 확인해 보았다.

‘52  4416’

유빈이 외워두었던 번호판과 일치했다. 유빈은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박 대리님에게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 물어보았다.

“저 차 되게 좋아 보이는데 누가 타고 다니세요?”

박 대리님이 다시 푸근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유빈 씨 차에도 관심 있었어? 상무님 차잖아. 오늘은 저거 타고 오셨네. 평소엔 다른 차 타고 다니셔서 유빈 씨는 오늘 처음 봤나보네.”

유빈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려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하하……. 네.”

상무이사. 입사 3년차 대리인 유빈에게는 까마득히 높은 직급이었다. 유빈은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몇  뵙고 조심스럽게 인사했던 기억, 지난  회의에서 유빈을 칭찬해주셨던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업무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유빈에게는 그저 멀게만 느껴지던 분이었다.

유빈이 머릿속으로 퍼즐을 맞춰 보았다.

‘그 검은색 세단에 상무님이 타고 계셨다면 상무님이 스토커일까? 만약에 상무님이 스토커라면 설명되는 부분이 있다. 차도 여러 대 갖고 계시니 나를 겁주기 위해서 사람을 고용할 정도의 경제력은 갖고 계실 것이다.’

박 대리님이 유빈의 어깨를 툭 쳤다.

“유빈 씨 또 딴 생각해? 무슨 생각하는데? 고민 있으면 말해봐. 해결은 못 해줘도 들어는 줄게.”

유빈은 자신이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고, 그런데 스토커가 회사 상무님이실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박 대리님 본인이 스토커일지도 모른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웃으려 노력하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점심을 먹고 자리에 돌아온 유빈은 업무 파일과 사내 메신저를 살펴보았다. 상무님한테서 내려온 메시지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대부분 부장님의 업무 지시였고, 다른 팀에서 요청받은 업무 협조 건도 몇  있었다. 출장 중이신 과장님이 인수인계하고 가신 업무도 하나 있었다. 부장님 지시로 유빈에게 넘어온 업무 중에는 어쩌면 상무님이 지시한 내용이 있을지도 몰랐지만 부장님께 각각의 업무들이 어디에서 내려왔는지 여쭤볼 수는 없었다.

유빈은 너무 예민해지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내일 유빈은 회사 중역들이 참여하는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해야 했다. 그동안의 경험들로 전 날의 준비가 프레젠테이션의 완성도를 결정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꽉 찬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준비는 길어졌고 유빈은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회사를 나섰다.

점심에 보았던 검은색 세단이 서 있던 자리가 유빈의 눈에 들어왔다. 그 자리는 비어있었다. 유빈의 생각이 복잡하게 흘러갔다.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또 나를 따라오려는 걸까? 아닐 거야. 퇴근 시간이 지났으니 상무님도 퇴근하셨겠지. 주차 공간이 아니니까 다른 곳으로 옮기셨을 지도 모르고. 내일 프레젠테이션에 상무님도 들어오시겠지? 하이힐을 신고 발표해야 하나?’

유빈은 주차장으로 가 그녀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퇴근 시간은 지났지만 서울의 도로는 여전히  막혀 있었다. 유빈은 그녀의 차가 앞으로  수 없다는 사실보다 그녀의 차 뒤에 계속 같은 차가 서 있다는 게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과잉해석이었다. 꽉 막힌 서울의 도로에서 그녀도 그녀 뒤의 차도 그저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녀의 차가 차선을 변경하며 룸미러 시야에서 사라졌다. 너무나 흔한 일이었지만 유빈은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긴장이 풀어지자 이 밤을 그냥 보내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유빈을 정신적으로 괴롭히고 있긴 하지만, 어제부터 스토커는 아무런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게다가 몇 주를 공들인 프레젠테이션 준비도 마무리됐다. 충분히 좋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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