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11. 길들여지고 있는 걸까?
샤워를 마치고 고무장갑을 끼고 세면대에 던져 놓았던 딜도를 씻어 말렸다. 화장실에서 나가 다른 물건들도 정리했다. 다시 보고 싶지 않아 상자에 도로 넣어 구석에 밀어 놓았다. 정리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서서 새로 생긴 꼬리를 보았다.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 되어버린 것 같은 처참함 기분이 느껴졌다.
유빈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시계를 보니 저녁 시간이었다. 긴장감에 잊고 있었지만 오늘 유빈은 아침도 점심도 먹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자 배고픔은 어지러움과 함께 찾아왔다. 유빈은 휴대폰을 들어 자장면을 주문했다.
그리고 주문을 마치고 허둥지둥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배달원에게 꼬리를 보여줄 수는 없었다.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유빈은 공포보다는 짜증을 느끼며 확인했다.
- 딜도 팬티 입어. 새걸로. 내일 입을 미니스커트도 준비해 둬.
항문 안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잠깐이나마 스토커에게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자 짜증은 금세 공포로 바뀌었다. 허둥지둥 상자를 열어 엉덩이 부위에 구멍이 뚫린 딜도 팬티를 꺼내 딜도를 질에 삽입하고 구멍 밖으로 꼬리를 내어 입었다. 그리고 다시 옷장으로 돌아왔다.
계절은 여름이었고 꺼내놓은 옷들 중엔 무릎까지 내려오는 꼬리를 가릴 만한 옷이 없었다. 의자를 가져와 옷장 위에 올려 두었던 잘 입지 않는 옷이 있는 박스까지 내렸다. 그렇게 유빈이 허둥지둥하고 있을 때 자장면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초인종이 울렸다.
유빈은 당황했다. 얼떨결에 팔을 들어 가슴을 가렸다. 그러다 더 창피한 곳은 딜도가 비춰 보이는 국부와 꼬리가 달려 있는 항문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다리를 모으고 들고 있던 옷으로 골반을 가렸다.
하지만 이런 차림으로 손님을 맞을 수는 없었다.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유빈은 발을 동동 구르며 자장면이 아니라 배달되는데 더 오래 걸리는 다른 메뉴를 주문했어야 한다고, 아니면 보다 안전하게 꼬리를 가릴 수 있는 옷을 찾아 입고 나가서 사먹었어야 했다고 자책했다.
침착해지려고 애쓰며 계산을 해보았다. 유빈이 사는 아파트는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건물에 들어올 수 있었다. 지금 벨을 누르고 있는 배달원은 아직 1층 건물 정문 앞에 있을 것이다. 만약에 유빈이 지금 인터폰으로 정문을 열어준다면 배달원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까지 올라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가능했다.
그 시간 동안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옷을 찾아 자신이 걸치고 있는 물건들을 가릴 수 있게 차려 입을 수는 없었다. 유빈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휴대폰이 또 울렸다.
- 열어줘.
메시지를 확인한 유빈의 손이 인터폰 버튼을 향했고 건물 정문이 열리는 버튼을 눌렀다. 유빈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방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벌써 밖에서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옷 박스로 달려가 미친 듯이 안을 헤집었다. 찾아야 했다. 분명히 지난겨울에 입었던 발목까지 내려오는 두꺼운 검은 치마가 집 어딘가에 있었다. 유빈은 결국 옷 박스를 뒤엎었다. 하지만 찾는 옷은 보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고 배달원이 유빈의 집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유빈은 절망했다.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그리고 뒤이어 휴대폰이 울렸다.
- 문 앞에 놓고 가라고 해.
좋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면 배달원에게 벗은 몸과 이상하게 보일 게 분명한 유빈의 몸에 달려있는 도구들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었다. 순간 유빈은 감사하다고 답장을 하려다가 화가 나서 휴대폰을 침대에 집어던졌다. 지금 유빈은 이 곤경에 몰아넣은 게 스토커인데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한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유빈은 감정을 실어 문 밖으로 소리쳤다.
“문 앞에 놓고 가세요!”
바닥에 그릇이 놓이는 소리가 났고 엘리베이터가 다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유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에 던져두었던 휴대폰이 울렸다.
- 너 고연대 나왔다며? 졸업도 차석으로 했다며? CPA도 붙었다며? 똑똑한 거 아니었어?
스토커의 조롱에 유빈은 휴대폰을 벽에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휴대폰은 죄가 없는 것 같아 도로 침대에 던졌다. 도대체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침대 위에 떨어진 휴대폰을 보자 그 검은 치마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났다. 침대 밑 상자에 넣어 두었다.
침대 밑을 보는 게 왠지 껄끄러웠지만 휴대폰으로 비춰 박스의 위치를 파악하고 손을 뻗어 박스에 달려 있는 손잡이를 잡았다.
‘푸석.’
느낌이 이상했다. 유빈은 재빨리 손을 도로 당겼다. 하지만 손에 묻은 건 지난 계절 동안 쌓인 먼지였다. 유빈은 자신이 과민상태라는 걸 깨달으며 다시손을 뻗어 박스를 꺼냈다. 기억대로 발목까지 오는 검은 치마가 들어있었다.
치마를 둘러 입었다. 무릎까지내려오는 꼬리가 완전히 가려졌다. 브래지어도 찼다. 상체에는 특별히 가려야 할 도구가 없었지만 그래도 전신을 꽁꽁 감춰야 할 것 같은 마음에 펑퍼짐한 티셔츠를 골라 입었다.
문 밖으로 나가 자장면을 가지고 들어왔다. 자장면 한 그릇을 이렇게 빨리 배달해주는 성실한 배달원이었다. 괜히 배달원에게 짜증을 실어 소리를 질렀던 게 미안했다.
다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두 끼를 굶은 유빈에게 자장면 냄새의 유혹은 강렬했다. 식탁으로 가져갈 여유도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자장면 그릇의 비닐을 벗기고 나무젓가락을 뜯어 자장면을흡입했다. 입가에 소스가 묻는 게 느껴졌지만 너무 배고팠다. 닦을 새도 없이 한 그릇을 비웠다.
배가 부르자 잠이 왔다. 그럴 만도 했다. 아침부터 살해 위협을 당했다. 그 스트레스를 정리할 시간도 없이 어제까지만 해도 도저히 불가능할 거라고 믿었던 플러그를 항문 안에 넣었다. 유빈은 무릎을 모아 세우고 얼굴을 묻었다. 자세를 바꾸자 항문과 질에서 이물감이 느껴졌지만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신경 쓰기에 유빈은 너무 피곤했다.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유빈은 왜 자신이 스토커의말에 이렇게까지 복종하는지 궁금했다. 분명 살해의 공포도 있었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오르가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특히 스토커가 자장면 배달원에게 문을 열어 주라고 했을 때 유빈이 지체 없이 인터폰 버튼을 누른 건 정말 황당했다. 그 짧은 사이에 죽음의 두려움이 찾아왔던 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대학생 때 교양 과목으로 들었던 심리학 내용이 생각났다.
스톡홀름 증후군: 납치당한 사람이 납치된 기간이 길어지고 납치한 사람과 오랜 시간을 보낸 후엔 납치자에게 심리적으로 완전히 동조되어 그의말에 순응할 뿐만 아니라, 납치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납치범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현상
‘그렇다면 나는 지금 원격으로 납치돼 있는 걸까?’
같은 수업에서 배웠던 다른 내용이 떠올랐다.
스탠포드 감옥 실험: 스탠포드 대학교 심리학과에서 한 실험을 진행했다. 두 명의 참가자 중 한 명에게는 죄수 역할을, 다른 한 명에게는 간수 역할을 맡겼다. 죄수가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이 설정되었고 간수 역할을 맡은 사람에게 죄수 역할을 맡은 사람에게 가벼운 처벌을 내릴 권한이 주어졌다. 처음에는 앉았다 일어나기, 팔 벌려 뛰기 정도의 가벼운 처벌이 내려졌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간수 역할을 맡은 사람은 죄수 역할을 맡은 사람에게 점점 강한 처벌을 내리기 시작했고 심지어 죄수 역할을 맡은 사람을 폭행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신기하게도 죄수 역할을 맡은 사람은 점점 혹독해지는 처벌을 묵묵히 수행했고 폭행을 당하고도 아무런 반향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간수 역할을 맡은 사람이 시키는 것들에 점점 더 열심히 복종했다. 두 참가자 모두 자신들은 실험에 참여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명확히 알고 있었다.
‘나는 지금 죄수 역할에 익숙해지고 있는 걸까?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휴대폰을 확인하고 스토커가 지시하자마자 문을 열었던 걸까? 무감정한 지시만을 내리다가 이제는 나를 조롱하기까지 하는 스토커는 간수 역할에 익숙해지고 있는 걸까?’
불행하게도 그 수업은 여러 심리학적 현상들을 배우는 것에서 끝났고 유빈은 스톡홀름 증후군도, 스탠포드 감옥 실험에서 죄수 역할을 맡아 버린 경우에도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지 배우지 못했다. 만약 침대 위에 놓아 둔 휴대폰이 울린다면 유빈은 또 당장 달려 가 확인할 것이 분명했다.
카톡이 왔다.재빨리 확인했다.
- 뭐 준비하라고 했지?
유빈은 지체하지 않았다.
- 미니스커트요.
답장을 보내고 나자 황당함이 몰려왔다. 바로 전까지 감옥을 어떻게 탈출할까 고민하던 자유인에서 카톡이 오자마자 순식간에 스토커에게 복종하는 죄수로 전락했다. 마치 자신이 꼭두각시 인형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실은 유빈의 팔다리가 아니라 휴대폰을 통해 마음에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휴대폰을 떠올린 유빈의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연상되었다. 휴대폰 – 카톡 – 스토커 – 미니스커트. 꼭두각시 인형처럼 유빈의 몸이 스르르 움직였다. 표정은 없었다. 유빈은 미니스커드를 꺼내 침대 옆에 두었다. 스토커는 유빈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망가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