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화 〉9. 그는 알고 있었다 (9/70)



〈 9화 〉9. 그는 알고 있었다


유빈은 조금  자세히 보기 위해 살짝 위치를 옮기려고 하다 뒤를 돌아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웃었다. 남자는 유빈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누구한테 말하는지 알 없게 중얼거렸다.

“쯧, 너 예쁜 건 아는데 그렇게 남자만 나타나면 강간범 취급하는 거 되게 실례라는 것도 좀 알아. 나는 식사를 때는 예의와 격식을 갖추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사람이라고.”

유빈은 상황에  맞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강간범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숙녀에게 딜도가 달린 팬티를 입히고 항문에 무언가를 쑤셔 넣으려고 하는 변태한테 쫓겨 그녀의 삶이 송두리째 뽑혀 나갈 것 같은 위기라는 걸  남자는 모를 터였다.

유빈도 고개를 돌려 벽에 대고 중얼거렸다.

“어떤 예의와 격식을 모르는 몰지각한 사람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이 된 경우엔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봐줘요.”

남자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고 유빈과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여전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진짜 예쁘네.  사람이 왜 널 먹고 싶어 하는지 알아?”

유빈의 팔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뛰었다. 이 남자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이미 2층을 지나 남자가 눌러 놓았던 1층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유빈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이 남자의 주의를 끌 만한 질문을 던져야 했다. 하지만 급한 마음에 별 효과 없는 질문이 반말과 함께 튀어나왔다.

“당신 누구야?”

지나치게 평범한 질문이었고 역시 남자는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식탁 예절과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지. 소개했잖아? 이름도 알려줄까? 캐빈이라고 불러.”

유빈은 그런 농담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는 벌써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있었고 유빈은 급하게 닫힘 버튼을 눌렀다. 캐빈이 유빈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8층에서 1층 사이에서 우리 입장의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같은데? 그래도 예의와 격식을 지켜. 엘리베이터 안에서 식사는 금지야.”

유빈이 닫힘 버튼을  누르며 대답했다.

“식사는 됐고 대화나 좀 하지?”

캐빈은 고개를 가로 젓고 대답했다.

“손 떼. 어딜 겁도 없이. 내가 범인이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고 나서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고 있는 유빈의 손을 툭 쳐내고는, 열림 버튼을 눌러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유빈이 정신을 차리고 캐빈을 쫓아가려고 했을  캐빈은 이미 유빈의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캐빈이 사라지고 유빈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유빈은 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해야 할 게 너무나 많았다. 달리면서 모든 걸 잊고 싶었다. 달리기 코스가 있는 집 근처 계천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숨이 차올랐지만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달리기 코스에 도착해서 한참을 더 뛰었다. 숨이 차오르면서 잡념이 날아갔다. 질에서 느껴지던 이물감도 사라졌다. 다행히 달리는 동안 딜도는 진동하지 않았다.

땀에 물든 집업 후드의 색깔이 진해지고 숨이 더 이상 차오를 곳이 없어졌다. 유빈은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으로 다져진 충분히 예쁜 몸이었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혹시 딜도 팬티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하고 내려다봤지만, 그 위에 스포츠 팬티도 덧입었고 레깅스는 진한 검은색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무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유빈에게 꽂히는 시선 중 하나가 이상했다. 성숙한여성의 몸을 보는 건강한 남성의 시선이 아니었다. 그리고 너무 오래 고정되어 있었다. 어디서 다가오는 시선인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계천을 사이에 두고 한 남자가 유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빈이 계천에 도착해서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경쟁하듯이 맞은편에서 달리고 있던 남자였다. 유빈도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유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손이 아니라 그 손에 들려 있는 휴대폰을 흔들고 있었다.

‘휴대폰?’

유빈은 휴대폰을 집에 놓고 나왔다. 주머니도 없는 레깅스와 민소매 셔츠를 입었는데 휴대폰을 챙겨 나올 수는 없었다. 휴대폰을 손에 들고 달리고 싶지도 않았다.

유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초점을 맞추려 노력했다. 남자가 휴대폰을 든 손을 흔들고 있다는 것 말고는  보이지 않았다. 수읽기를 해보았다.  남자가 스토커일 수도 있었다. 스토커는 항상 카톡을 통해 유빈에게 연락해 왔고 유빈이 휴대폰을 들고 있지 않은 지금, 유빈에게 접근할 수단이 없어지자 저렇게 쫓아와 휴대폰을 흔들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유빈은 승부를 걸어 보기로 했다. 지금은 대낮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계천 주변을 오가고 있었다. 남자가 유빈에게 쉽게 해코지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빈이 계천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 남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남자는 피하지 않았다. 점점 가까워지면서 남자의 모습이 유빈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빈의 가슴까지밖에 오지 않는 작은 키에 빨간 반점이 가득한 얼굴, 그리고 결정적으로 위아래로 찢어진 눈이 보였다.

화장실에서 유빈에게 죽음을 경고하고, 스토커의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돼 있는  남자였다. 유빈의  몸이 떨려오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화장실에서 만났을 때 저 남자는 자신은 사주를 받고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저 남자에게 최소한 스토커가 누구인지는 물어봐야 했다.

유빈이 징검다리를 다 건널 때까지 남자는 휴대폰을 흔들며 자리를 지켰다. 유빈이 징검다리를  건너 남자에게 가까워졌다. 팔을 뻗는다면 그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릴 수 있을 거리가 되자 남자가 씨익 웃으며 유빈의 몸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유빈의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자신은 할 일을 다 했다는  아무 말없이 유빈을 지나쳐 걸어갔다.

유빈은 그 남자를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물어봐야 할 게 너무나 많았다. 겁이 났지만 남자의 뒤통수를향해 말을 걸었다.

“저기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봐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뚜벅뚜벅 가던 방향으로 걸어갔다. 유빈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감정이 담기기 시작했다.

“야! 너 누구야?”

사람들의 시선이 유빈에게 몰렸고, 남자는 유빈에게서 멀어졌다. 사람들은 대낮 도심에 미친년이 나타났다는 듯 유빈을 흘끔흘끔 쳐다보다 피했다. 유빈의 목소리와 함께 감정이 폭발했다.

“야 이 새끼야.  누구냐고!”

남자의 팔이 움직였다.  팔만으로 팔짱을 끼는  같은 자세였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짤막하게 말했다.

“살수(殺手).”

유빈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웠고, 다가가서 다시 물으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 유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유빈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집에서 나오면서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캐빈이었다. 캐빈은 황급히 주위의 시선을 수습하며 둘러대듯 유빈에게 말을 걸었다.

“유빈아 미안. 내가 많이 늦었다.”

그러고 나서 유빈의 어깨에 손을 얹고 유빈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너 방금 죽을 뻔했다. 저 사람이 입고 있는 옷 봐.”

유빈은 자신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상했다. 가을 직전의 무더운 늦여름이었지만 남자는점퍼를 입고 있었다. 캐빈이 다시 말했다.

“저 점퍼 주머니 안에 사시미 들어 있어.”

방금 남자가 손을 움직였던 건 사시미를 꺼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유빈에게 또다시 죽음의 공포가 몰려왔다. 의식이 제멋대로 흘러갔다.

‘도대체 왜?스토커가 시키는 대로 하다가 지하철에서 그 치욕을 당하고, 어제 그렇게 큰 고통도 겪었는데? 오늘은 팬티도 갈아입고 레깅스도 신었는데? 하이힐을  신어서? 나 사랑한다며?’

살수는 다시 팔을 내리고 뚜벅뚜벅 걸어서 유빈에게서 멀어졌다. 유빈은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있는  알았지만 울음을 참을  없었다. 계속해서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죽이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왜 죽이려고 하는지, 죽이지 않는다면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유빈은 그저 누구냐고 물어봤던 건데 또 죽을 뻔했다. 너무나 서럽고 억울했다.

캐빈이 다시 유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유빈은 어깨들 털어 캐빈의 손을 뿌리쳤다. 캐빈이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수상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거들먹거리는 말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빈은 눈물범벅이 된 눈으로 캐빈을 노려보고 계천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한 유빈은 완전히 지쳐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캐빈이 떠올랐다. 캐빈.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 봤지만 흔한 영어 이름이라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섬뜩한 사실을 깨달았다. 캐빈은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 위층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게다가 오늘 처음 봤음에도 유빈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점퍼에 칼이 들어있었던 건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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