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화 〉8. 엘베남 (8/70)



〈 8화 〉8. 엘베남


모든 것이 끔찍했지만 유빈은 눈을 질끈 감고 한 번  피스톤을 밀어 넣었다. 자신의 몸 안으로 차가운 액체가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기분이 나빴다. 너무 차가웠다. 별생각 없이 그릇에 차가운 물을 받은 게 후회됐다.

피스톤이 주사기의 끝에 닿았고 주사기 속 액체가 유빈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유빈은 처음 당해보는 관장에 정신을 잃을  같았다. 배가 아팠고 속이 메스꺼웠다. 당장에라도 화장실로 달려가야  것 같이 대변이 마려웠다. 왜 스토커가 참으라고 따로 지시했는지  것 같았다.

하지만 버틸 수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바닥에 싸버릴  같았다. 화장실로 향했다. 복통 때문에 빨리 걸을 수도 없었다. 출렁거리는 배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변기에 앉았다. 엉덩이가 변기에 닿자마자 항문에서 폭포처럼 물이 쏟아져 나왔다. 뒤이어 물에 불은 대변들이 따라 나왔다. 유빈은 필사적으로 배에 힘을 줬다. 물줄기는 더욱 거세졌고 장을 통째로 비울 듯이 갈색의 변이 쏟아져 나왔다.

장은 비워졌고 유빈은 헉헉댔다. 휴지를 말아 항문을 닦고 물을 내렸다. 손을 씻고 화장실 밖으로 나가 휴대폰을 확인했다. 예상했던 대로 스토커에게서 카톡이 와 있었다.

- 참으라고 했지? 다시 관장해. 200mL 5분 동안 참아.

용량이 두 배고 늘어났고 끔찍한 과정이 반복되었다. 유빈은 이번에도 참지 못하고 관장 직후 화장실로 향했다. 스토커의 반응은 냉담했다.

- 300mL. 이번에도 5분 못 참으면 다음엔 1L야.

두 번의 관장으로 그릇은 비워져 있었다. 유빈은 눈물을 삼키며 다시 그릇에 하얀 가루를 붓고 부엌으로 가 물을 받았다. 이번엔 따뜻한 물을 받았다. 다시 관장이 시작되고 유빈의 뱃속에 물이 차올랐다.

주사기를 항문에서 빼내고 필사적으로 항문에 힘을  닫았다. 관장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물의 온도가 맞았기 때문인지 이번에는 조금 참을 만했다. 하지만 5분은 길었고 유빈의 몸이 이리저리 비틀렸다.

휴대폰으로 5분이 지난 것을 확인하자마자 유빈은 화장실로 가 변기에 앉았다. 앞선  번의 관장으로 많은 변이 쓸려 나왔고 이번엔 맑은 물과 몇 개 되지 않는 작은 덩어리만이 변기에 떨어졌다.

유빈이 다시 화장실에서 나와 휴대폰 화면을 켰다. 스토커가 말한 대로 5분을 버텨냈고 내심 이제 그만 관장을 끝내주길 바랐다. 하지만 도착해 있는 카톡은 유빈을 절망으로 몰아갔다.

- 다시 1L. 10분 동안 참아.

저 거대한 주사기를 2번 가득 채울 만큼의 물이 유빈의 뱃속에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빈이 울면서 애원했다.

- 제발 봐주세요.시키시는 대로 뭐든지 할게요.

완전한 굴복이었다. 메시지를 전송하고 나자 유빈에게 불쾌한 생각이 떠올랐다.

‘스토커는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흐뭇해하고 있을까? 기뻐하고 있을까? 웃고 있지는 않을까? 웃고 있다면 어떤 웃음일까? 설마 내가 항문에 물을 넣고 고통스럽게 참는 걸 보면서 자위라도 하고 있는 걸까?’

거기까지 상상한 유빈은 갑자기 서러워졌고 휴대폰을 바닥에 놓고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유빈이 울고 있는 동안에도 휴대폰은 울렸지만, 유빈은 자신 혹은 다른 누군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휴대폰을 확인하지 못했다. 결국 울다 지친 유빈은 바닥에 쓰러져 잠들었다.

배게도 이불도 없이 바닥에서 나체로 잠들었던 유빈은 다음  새벽 한기를 느끼면서 눈을 떴다. 가장 먼저 휴대폰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스토커가 보낸 수 십 통의 메시지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메시지는 한 통이었고 내용도 간단했다.

-  자. 사랑해.

유빈은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스토커는 완전한 사이코패스였다. 그렇지 않다면 어제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고 나서 사랑한다는 말을  수는 없었다. 혹시 새로운 메시지가 오지 않을까 걱정하며 계속 휴대폰을 응시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유빈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베개를 베고 다시 잠들었다.

유빈이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평소에 일어날 때보다 너무 밝았다. 출근시간이 지났을 것 같았다.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11시였다. 너무 오래 잤다. 하지만 곧 오늘이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토요일이라는 게 떠올랐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어젯밤에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녀 스스로 항문에 물을 주입했고 그 물이 갈색으로 변해 냄새를 풍기며 도로 쏟아져 나왔다. 끔찍한 기억이었다.

‘꿈이었을까?’

유빈이 시선을 옮겼다. 바닥에는 어제 사용했던 주사기와 그릇 그리고 앞으로 사용해야 될지도 모르는 흉측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낯선 물건들 사이에서 그나마 느껴지는 익숙함 때문이었을까, 딜도 팬티가 특히 눈에 들어왔다.

유빈은 이제 엉덩이 쪽에 뚫려 있는 저 구멍의 용도를  것 같았다. 항문에 꼬리를 끼우고 저 구멍으로 꼬리를 내어 입도록 디자인된 팬티였다. 질에는 딜도, 항문에는 꼬리를 끼운 자신의 모습이 상상되었고, 혐오감과 함께 스토커가 떠올랐다.  스토커가 메시지를 보냈을 것 같아 카카오톡을 열어 보았다. 새로 수신된 메시지는 없었다.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불이 흘러내렸고 자신의 나신이 내려다 보였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이불을 추켜올려 가슴을 가렸다. 잠깐 그렇게 멍하게 앉아 있었다.

스토커에게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머리가 아파왔다.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다. 운동을 하고 싶었다. 운동선수 출신이었지만 오랫동안 방치해 둔 몸이 삐거덕거리는 것 같았다. 무슨 운동을 할지 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어렸을 때 했던 운동은 피겨스케이팅이었지만 스케이트를 타기엔 아직 날씨가 따뜻했다. 일반인에게 개방된 아이스링크도 없었다.

결국 가볍게 조깅을 하기로 했다. 조깅을 마치면 카페에 가서 오랜만에 파니니랑 같이 에스프레소도 마시기로 했다. 에스프레소를 마신 후엔 서점에 가서 회사에서 받은 도서 쿠폰으로 책도 사기로 했다.

부디 오늘 하루만큼은 스토커가 장난을 치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즐거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옷장을 열었다. 바닥에 옷을 늘어놓으며 츄리닝을 입을지 민소매 셔츠와 레깅스를 입을지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거울에 자신의 벗은 몸이 비췄다. 이제는 가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츄리닝을 선택했다. 먼저 달릴  출렁거려 불편하지 않게 스포츠 브라를 입고 그 위에 반소매 집업 후드를 걸쳤다. 하의 속옷을 입어야 했다. 유빈에게 고민이 찾아왔다. 딜도 팬티를 입을지 말지 결정해야 했다.

어젯밤 스토커에게 굴복당했던 일이 생각났다. 소심하지만 저항해 보기로 했다. 스포츠 팬티를 입고 그 위에 츄리닝 바지를 입었다. 머리를 뒤로 넘겨 묶고 현관문을 나서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스토커였다.

- 팬티 갈아입어. 하의는 레깅스로 입고.

또다시 공포가 엄습해 왔다. 유빈은 휴대폰을 들고 갈등했다. 거부하고 싶었다. 딜도 팬티를 입고 운동하러 나가느니 차라리 집에 있고 싶었다. 그때  통의 카톡이 더 울렸다.

- 프로필 사진 확인.

유빈은 잠깐 무슨 프로필 사진을 말하는 건지 헷갈렸지만, 스토커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바뀌어 있는 것이 보였다. 동그란 사진을 눌러 확대했다. 사진에는 화장실에서 유빈을 습격했던 세로로 찢어진 눈을 가진 남자가 있었다. 유빈에게 죽음을 말할 때마다 보냈던 그 남자의 사진이 아예 프로필 사진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결국 스토커가 원하는 대로 츄리닝 바지와 스포츠 팬티를 벗고 딜도 팬티와 레깅스로 갈아입었다. 다시 딜도 팬티를 입고 나니 질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이걸 입고 달릴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그 위에 스포츠 팬티를 덧입었다. 조깅 중에 딜도가 진동하지 않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하의를 갈아입고 거울을 보니 레깅스에 후드 집업은 어울리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상의도 민소매 셔츠로 갈아입었다. 순응의 의미였는지 저항의 의미였는지 분명하진 않지만, 유빈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찍어 스토커에게 전송했다. 잠깐 기다렸지만, 스토커는 확인만 했을 뿐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현관 앞에 선 유빈은 스토커가 보낸 하이힐을 신고 나가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운동하러 나가면서 하이힐을 신을 수는 없었다. 방금 스토커가 보낸 지시에도 하이힐은 없었다. 신발장에서 러닝화를 꺼내 신으면서 유빈은 문득 자신이 행동 하나하나를 스토커와 관련지어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유빈이 현관문을 나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평소와는 다르게 엘리베이터는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유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유빈이 사는 8층 위에도 2개의 층이 더 있었고 그럴 수도있다고 생각하며 넘어가려고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한 남자가 탔다. 유빈은 그 남자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뒤쪽 구석에 섰다. 거리를 유지하면서 남자를 관찰할 수도 있는 좋은 위치였다. 남자는 슬림(Slim)한 몸매에 누더기 같은 청바지, 그 위에 박시(Boxy)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유빈은 옆모습밖에 볼 수 없었지만 날카로운 콧날 아래로 자신감과 고독이 뒤섞인 듯한 묘한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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