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6. 두 번째 선물, 보냈어
유빈은 혼란스러웠다. 3년간의 직장 생활 동안 같은 재무팀에 있으면서 많은 걸 배우고 의지해 온 박 대리님이었다. 그런데 딜도의 신호는 박 대리님이 스토커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었다. 유빈은 자신이 잘못 느꼈길 바랐다. 아침에 딜도의 자극이 너무 심해서 그 느낌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점심시간이 되었고 박 대리님이 다시 유빈에게 다가와 어깨를 감쌌다. 딜도가 거세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유빈 씨. 오늘 점심도 중국집. 팀장님이 쏘신대. 물론 법인 카드로.”
박 대리님이 팀장을 따라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딜도의 진동이 잠잠해졌다.
중국집에서 유빈은 일부러 박 대리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았다. 식사 중에 딜도가 진동하면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고, 스토커에 대한 본능에 가까운 공포감과 거부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자장면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목이 메어 왔다. 오랜 직장 동료를 의심해야 하는 자기 자신이 너무 싫었고 그녀를 그렇게 몰아간 상황이 저주스러웠다.
늦게 출근했던 유빈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잔업 때문에 야근을 해야 했다. 유빈이 회사에서 나온 시간은 밤 9시가 훌쩍 지났을 때였다. 차를 가져오지 않았기에 퇴근할 때도 지하철을 이용해야 했다.
지하철역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가슴이 졸여 왔지만 다행히 아침에 있었던 것과 같은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물함에 넣어 두었던 옷을 찾아 집으로 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9시 5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유빈이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 늦을 뻔했네. 잊지 마. 통금시간은 10시야.
유빈의 미간이 구겨졌다. 딜도 팬티에 하이힐에 지하철 출퇴근에 통금까지 너무한 거 아니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게다가오늘 늦게 들어온 건 순전히 스토커가 아침에 벌인 일 때문이었다. 하지만 말한다고 들어줄 사람 같지는 않았다. 유빈은 괜히 휴대폰을 침대에 던지며 화풀이하고 샤워하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보니 스토커에게서 카톡이 와있었다.
- 오늘 재밌었지? 앞으로도 선물은 꼭 몸에 걸치고 다니고 통금도 그대로야. 좋은 소식도 있어. 내일부터 차타고 출근해도 돼.
마치 큰 배려를 해주겠다는 듯한 마지막 문장에 유빈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오늘 하루 동안 스토커 때문에 겪었던 일들이 떠오르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하철에서 변태로 몰렸고, 지각과 야근을 해야 했다. 한 마디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휴대폰을 들었지만, 스토커와의 대화창을 여는 순간 도착한 메시지에분노는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유빈의 이름으로 시작한 장문의 메시지에는 유빈이 태어났던 병원, 다녔던 학교,지금까지 살았던 집 주소, 사용했던 휴대폰 번호 등의 유빈 본인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개인 정보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그 뒤로 유빈의 가족과 친구들, 만났던 남자친구들의 신상정보가 이어졌다.
한 통의 메시지가 더 도착했다.
-도망가지 마. 반항하지도 마. 넌 내 거야.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는 유빈의 눈에 서린 두려움이 절망으로 바뀌어갔다.
* * *
다음 날 아침 아직 기상 알람이 울리기도 전 이른 시각 유빈이 눈을 떴다. 휴대폰 진동이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휴대폰을 집어 올렸다. 카톡 메시지가 끊임없이 전송되고 있었다. 스토커인가 하고 긴장했지만 닉네임이 달랐다. 하지만 스토커는 여러 개의 계정을 자유롭게 번갈아가면서 쓰는 것 같았고, 유빈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잠시 후 진동이 멈췄고 유빈이 카톡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해 보았다. 친구로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라는 문구가 먼저 보였다. 유빈은 스토커한테서 처음 카톡을 받았을 때가 떠올라 다시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전송된 메시지는 대부분 인터넷 게시판들을 캡쳐한 사진이었다.
유빈은 사진을 한 장 한 장 옆으로 넘겨보았다. 그 캡쳐에는 어제 아침 유빈이 지하철에서 당했던 수치스러운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하철에서 엉덩이를 뒤로 내밀고 한 남성의 성기에 문지르고 있는 사진, 얼굴이 달아올라 지하철에서 내리는 사진, 지하철역 계단에서 주저앉아 신음하고 있는 사진 등이 여러 각도에서 찍혀 올라와 있었다.
게시글의 제목과 내용은 더욱 수치스러웠다. ‘5호선 치녀’, ‘역성추행’, ‘도망가는 여자 변태’, ‘광릉역 간질녀’ 등의 말들이 서슴없이 사용되고 있었다. 댓글은 유빈의 기분을 더욱 참담하게 만들었다.
‘당하는 남자 표정 봨ㅋㅋㅋㅋ 진짜 부왘이다.’
‘ㄴ 남자 표정 진짜 왜 저래 ㅋㅋ 좋은 거 아니야?’
‘여자 겁나 예뻐 ㄷㄷ’
‘ㄴ 나도 당하고 싶음. 5호선 타고 다녀야겟다’
‘여자가 서른 넘으면 성욕이 주체가 안 된다더니...’
‘자기가 해놓고 얼굴은 왜 빨개지는데?’
‘저거 진짜 간질 맞냐?’
‘ㄴ 맞아’
‘오르가즘 아니야?’
‘ㄴ 간질이라니까’
‘ㄴ 저렇게 예쁘고 가슴 큰 여자가 무슨 간질이야’
‘ㄴ 병신아 예쁜 거랑 간질이랑 먼 상관’
‘ㄴ 개노답 사진잘봐 저 여자 골반도 장난 없어. 간질이겠냐?’
‘ㄴ ㄱㄴㄷ 간질이 골반이랑 가슴에 걸리냐?’
‘보지 확인해보고 싶다. 뭐 들어 있을 거 갖지않음?’
‘ㄴ 확인만 하게?’
‘ㄴ 변태새끼야 닥쳐’
‘퍼갑니다~’
‘저 여자 신상 아는 사람?’
‘부렉시트// 코찰청에 수사의뢰해보던가’
자신의 나이를 몇 살이나 부풀리는 사람, 자신을 간질 환자 취급하는 사람, 벗겨 보겠다는 사람, 저 수치스러운 사진들을 퍼뜨리겠다는 사람, 신상을 털겠다는 사람……. 유빈은 더 이상 댓글들을 읽어 내려가기가 괴로웠다. 스크롤을 쭉 내려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했다.
- 이거 다 지우느라 힘들었어. 조심해.
유빈은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해보았다. 어제 자신은 스토커 지하철에서 켠 진동 때문에 수모를 당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걸 촬영했다. 여기까지는 그녀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게 인터넷에 유포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카톡을 보낸 사람이 그걸 지워줬다고 했다.
유빈은 떨리는 손으로 포털사이트 앱을 켜 ‘5호선 치녀’를 검색해 보았다. 검색 결과 페이지를 끝까지 넘겨보았지만, 유빈과 관련된 게시물은 없었다. 이 카톡을 보낸 사람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유빈이 답장했다.
- 고맙습니다.
돌아오는 답장은 없었다. 유빈은 문득 궁금해졌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랑 관련된 게시물들을 지운 건지 그리고 이 사람이 누구인지. 다시 휴대폰을 들어 카톡을 보냈다.
- 누구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번엔 답장이 왔다.
- HiDeath
유빈은 이 답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해석해보면 ‘안녕 죽음’이라는 소름끼치는 말이었고,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하이데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죽음의 신과 똑같았다. 하지만 누구냐고 묻고 나서 받은 답장이니 본인의 이름이 하이데스인 것 같았다. 아마 닉네임일 것이다. 다시 답장을 보내 보았다.
-하이데스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답장은 없었다.
출근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고 유빈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팬티에 돋아난 돌기는 걸리적거렸고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오늘은 어제와 다르게 좋은 게 있었다. 차를 타고 출근할 수 있었다.
지하철과는 다르게 차 안에서라면 진동이 울리더라도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만일에 대비해 바지 한 벌과 팬티 두 장을 종이 가방에 챙겨 차 뒷좌석에 싣고 회사로 향했다. 막상 운전을 시작하자 운전 중에 딜도가 진동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별 탈 없이 회사에 도착했다. 회사에 도착해서도 진동은 오지 않았고 박 대리님을 볼 때마다 괜히 가슴 한 구석이 뜨끔거렸던 것 말고는 별일 없이 하루 일과가 지나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다. 유빈은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딜도 팬티에도 그럭저럭 적응됐다. 조금 딱딱한 재질의 탐폰을 끼우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진동이 왔을 때 대처할 자신은 없었지만, 어쨌든 요 며칠 진동은 울리지 않고 있다. 여전히 스토커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고 인터넷에서 그녀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지워준 하이데스라는 사람도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당분간 그냥 잊기로 했다.
유빈은 오랜만에 되찾은 일상을 만끽했다. 아침에 일어 나 눈을 비비고 출근해서 바쁘게 일하고 퇴근했다. 예전엔 지긋지긋하다고 느꼈던 생활이지만 이제는 너무나 소중했다. 이 소중한 생활에 스토커가 다시 나타나지 않길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유빈에게 찾아온 평화는 짧았다. 퇴근길에 다시 스토커에게서 카톡이 왔다.
- 두번째 선물 보냈어.
주차장에서 카톡을 확인하자마자 유빈이 마음속에 소중히 품고 있던 무언가가 산산조각났다. 가슴에 파편이 박힌 듯 쓰려왔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자신의 집이 있는 8층을 눌렀다. 중간에 아무도 타지 않았고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8층을 향했다.
문 앞에 상자가 놓여 있었다. 스토커가 말한 두 번째 선물이었다. 유빈은 상자를 가지고 들어와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봤다. 열어보고 싶지 않았다. 이번엔 어떤 흉물이 들어 있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 열어봐. 예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