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화 〉2. 예쁘게 입고 나와 (2/70)



〈 2화 〉2. 예쁘게 입고 나와

어쩌면 오늘의 사건들은 서로 아무 상관이 없을지도 몰랐다. 같은 날 일어났다는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을 수도 있었다. 그냥 더럽게 재수 없는 날이었을 것이다. 유빈은 그렇게 생각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퇴근하기로 했다. 어쨌든 오늘 계약도 회의도 지각한 걸 퉁치고도 남을 만큼 완벽하게 마무리되었으니까.

유빈은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을 집었다. 카톡이 하나 와있었다. 갑자기 아침에 있었던 일과  날의 기억이 떠올랐고 기지개를 켜면서 이완됐던 근육과 정신이 다시 바짝 긴장됐다.

- 앞으로도 종종 지하철 타고 다녀. 난 말이야, 운동화보단 하이힐이 좋더라고. 엉덩이는 역시 근육이 잘 잡혀 있더라? 그리고 컴퓨터 바탕화면 말인데 포맷하고 나서 너무 칙칙해서 내가 예쁜 걸로 다시 바꿔뒀어.

유빈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갈 수 없었다. 바뀌어 있을 바탕화면을 보기가 두려웠다. 유빈은  대신 포장마차로 향했다. 난생처음 혼자 소주잔을 기울였다. 집에 들어갈 용기를 얻기 위해선 술기운이라도 빌려야 했다. 소주 한 병을 비운 유빈은 택시를 타고 집 앞에 도착했다. 취기가 올라 살짝 어지러웠지만 다리에 힘을 주고 문 앞에 똑바로 섰다.

누가 볼까 두려워 문에 몸을 붙이고 한 손으로 가린 체 조심스럽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뒤에서 누군가가 비밀번호를 훔쳐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번호 하나하나를 누를 때마다 심박수가 올라가고 몸에 열기가 달아올랐다. 도어락 버튼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뒤를 돌아볼까 생각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진짜로 뒤에서 유빈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그대로 까무러쳤을 것이다. 유빈은 재빨리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와 온몸으로 문을 밀어 닫았다. ‘쿵’ 문 닫히는 소리가 유빈의 가슴이 내려앉는 소리처럼 들렸다.

유빈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재빨리 불을 켜고 집안을 둘러보았다. 아침에 나갔을 때와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무렇게나 현관에 벗어 던지고 갔던 구두도, 눈에 들어오는 다른 집기들도 유빈이 놓아두었던 그대로였다.

조심스럽게 현관을 지나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컴퓨터는 꺼져있었다. 어젯밤 컴퓨터를 끄지 않고 잠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저절로 침이 삼켜졌다. 유빈은 전원 버튼을 눌러 컴퓨터를 부팅했다가, 부팅이 완료되기 전 잠깐 모니터를 껐다.  바탕화면이 바뀌어 있는  보게 된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취기가 올라오고 몸은 더욱 뜨거워졌다. 몇  전 그날처럼 손은 땀에 젖었고, 마우스를 쥐려 할 때마다 미끄러졌다. 유빈은 마우스에서 손을 떼 천천히 모니터 전원을 켰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 바탕화면은 포맷한 후 그대로 뒀던 윈도 기본 배경화면이었다. 유빈은 안도감과 스토커에게 놀아났다는 자괴감을 동시에 느끼며 컴퓨터 책상에 몸을 기대고 잠에 빠져들었다.

유빈은 다시 꿈을 꿨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달리고 있고 누군가 그녀를 쫓아온다. 쫓아오는 자의 손에는 사시미가 들려있고 유빈의 구두는 그 칼에 찢겼는지 밑창과 굽이 덜렁거린다. 운동화로 갈아 신는다. 달리면서 신발을 갈아 신을 수 있을까? 중요하지 않다. 유빈은 계속해서 달린다.

쫓아오는 자의 손이 점점 가까워진다. 그의 손이 유빈에게 닿는다. 하필 엉덩이에. 그의 손이 유빈의 몸 안으로 파고든다. 어찌된 일인지 유빈이 입고 있는 청바지는 그의 손을 그대로 통과시킨다. 유빈이 달리기를 멈춘다. 무너진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다. 그러나 바닥은 없다. 어둠뿐이다. 어둠 아래로 유빈의 몸이 스르르 잠긴다.

유빈은 머리가 아팠다. 목이 말랐다. 머리가 아팠고 목이 말랐다. 눈을 떴다. 컴퓨터는 대기 모드로 전환돼 있었다. 이틀 연속으로 마신 술에 머리가 녹는  같았고 위장을 토해내고 싶을 정도로 속이 메스꺼웠다. 냉장고를 열고 어제 회식을 끝내고 박 대리님이 챙겨주셨던 숙취해소 음료를 꺼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캔을따서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의자로 돌아와 앉아 축 늘어졌다.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뭔가 대단히 기분 나쁜 꿈을 꾸었던 느낌이 들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내일도 출근해야 했다. 꿈 따위에 연연해서 그녀의 생활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자기 전에 컴퓨터를 끄려고 마우스를 흔들어 대기 모드를 해제했다. 모니터 전원이 들어왔다. 바탕화면이 바뀌어 있었다. 창백한 하얀 화면에 소름 돋는 빨간 글씨.

- 취한 모습도 귀엽더라.

유빈은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런데 의지와는 다르게 목이 턱턱 막혀 왔다. 입을 벌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대신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컴퓨터에 연결된 전원 플러그를 뽑아 버렸다. 그래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유빈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친구로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
우는 모습도 귀엽네.

막혀 있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스토커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 이상 집에 있을  없었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스토커의 추악한 손이 쫓아올 것만 같았다.

결국 유빈은 경찰에 전화했다. 잠시 후 도착한 경찰  명에게 지금까지 겪은 일들에 대해 증언을 남기고 컴퓨터 본체와 카카오톡 기록을 증거로 제출했다. 경찰이 유빈의 집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나중에 다시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며칠 후 경찰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을 유빈의 집에 출동했던 강력계 한형석 형사라고 소개했다. 한형석 형사는 사이버 수사대에 의뢰해 증거물로 수집해  하드디스크를 분석했지만, 외부의 해킹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유빈이 쓰는 백신 프로그램을 뚫고 침입할 수 있는 해커는 국내에 몇 안 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지하철에서 유빈이 당했다고 주장한 성추행은 아무런 증거도 증인도 없어서 경찰에서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했다. 카톡 기록은 흔한 남녀 간의 애정표현으로 간주된다고 했다. 엉덩이 어쩌고 했던 부분은 성희롱으로 고소할 수는 있겠지만 큰 효과는 없을 거라고 했다. 누가 보낸 건지 알 수 있냐는 유빈의 질문에 이런 자잘한 건으로 카카오톡 서버에 정보 공개 요청을 하기는 어렵다고 대답했다.

사무적인 정보의 전달이 끝나자 유빈을 향한 불쾌한 암시가 이어졌다. 바탕화면이 바뀌었을 때 술에 취해있었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술김에 본인이 바꿔놓고 헷갈리는  아니냐고, 카톡을 보낸 사람이 유빈한테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잘 해보라고. 끝없이 이어지는 빈정거림에 유빈의 표정이 굳어졌다.

형사와의 대화에서 유빈은 애정결핍이 지나쳐서 누군가 그녀에게 집착하는 망상을 하는 여자로 변해 있었다. 유빈은 오늘  또다시 악몽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전화를 끊었다.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경찰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까? 그 누군가도 나를 망상증 환자로 취급하지 않을까? 그냥 도망갈까? 회사도 집도 떠나서 스토커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릴까? 만약에 간다면 어디로……?’

유빈이 흘러가는 생각을 다잡았다. 스토커가 무서워 그녀의 일상을 포기하는 게 바보처럼 느껴졌다. 스토커는 유빈의 집에 침입하고 경찰에게도 걸리지 않는 수법으로 그녀를 감시하고 있었다. 유빈이 어디로 가든 따라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싸우려고도 생각해 봤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와 싸워 이길 수는 없었다. 당장에 세울 수 있는 뾰족한 대책은 없었다.

유빈은 스토커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를 대비하기로 했다.PC방에 들러 인터넷으로 휴대용 전기 충격기와 캡사이신 스프레이를 구매했다. 약간의 안도감이 느껴졌다.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곳에서 자는 게 더 위험할 것 같았다. 그리고 주문한 물건도 받아야 했다. 울적한 마음을 달래며 집에 들어가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다음  퇴근한 유빈은  앞에 놓여 있는 택배 상자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집으로 들고 들어와 포장을 뜯었다. 하지만 그 안에 유빈이 주문한 전기충격기와 캡사이신 스프레이는 없었다. 유빈은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쇼핑몰에 접속해 자신의 주문 내역을 확인해 보았지만 어제의 주문은 취소되어 있었다.

상자 안에는 하이힐 한 쌍과 처음 보는 모양의 팬티가 들어 있었다. 바깥쪽은 평범한 검은색 여성용 팬티였지만 안쪽 유빈의 성기가 닿아야 할 자리에는 하얀 반투명 실리콘으로 만든 돌출물이 있었다. 흡사 남성의 성기를 본뜬  같은 그 돌출물을 바라보던 유빈이 팬티를 다시 상자 속에 집어 던졌다. 어떻게 입는 팬티인지 상상하니 속이 메스꺼웠다.

갑자기 상자에서 진동 소리가 들렸다. 유빈이 화들짝 놀라 상자를 다시 열어 보니 팬티에 달린 실리콘 모양의 돌출물이 발광하며 진동하고 있었다. 정말로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집어 들었던 팬티를 다시 상자에 집어넣으려고 했을  휴대폰이 울렸다.

친구로 지정되지 않은 사용자.
- 예쁘게 입고 나와. 내일 지하철에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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