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1. 오늘도 보고 싶은데 참느라 힘들었어
직장 생활 3년 차. 커리어 우먼을 꿈꾸며 입사했지만 출근하면서 한 번, 퇴근하면서 또 한 번 마음속으로 사직서를 쓰는 회사원. 상상 속의 화려한 직장 생활은 현실과는 멀어져만 가고, 엑셀 위에 키보드 두드리는 일도, 회사 커피 맛에도 점점 질려가던 그 날, 퇴근길에 유빈에게 카톡 하나가 날아왔다.
친구로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
- 일 잘 마쳤어? 오늘도 보고 싶은데 참느라 힘들었어.
무료한 일상 때문이었을까, 직장 생활에 치여 연애 따위 관둔 지 너무 오래돼서 나타나는 부작용이었을까? 아무한테나 던져 보는 흔한 추파라는 걸 눈치챘지만 왠지 모를 설렘으로 다가왔다. 누가 보낸 카톡인지 궁금했다.
‘입사하고 바빠지면서 헤어졌던 전 남친인가? 아니면 지난주부터 출장 중이신 박 대리님?’
유빈은 설렜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답장은 집에 도착해서 하기로 하고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서울의 도로가 더 꽉 막히게 느껴졌던 건 그 카톡 때문이었을까? 집에 도착한 유빈은 습관대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런데 컴퓨터가 켜져 있었다. 조금 이상하단 생각을 하며 마우스를 흔들어 대기 모드를 해제했다. 바탕화면이 바뀌어 있었다. 하얀 배경에 빨간 글씨.
- 오늘도 보고 싶은데 참느라 힘들었어.
유빈은 허겁지겁 가방을 뒤져 휴대폰을 꺼내 퇴근길에 받았던 카톡을 다시 확인했다.
- 오늘도 보고 싶은데 참느라 힘들었어.
아무한테나 던져 보는 흔한 추파가 아니었다. 유빈이 혼자 사는 집에 들어와 바탕화면까지 바꿔놓고 가는 그는 스토커였다. 퇴근하면서 풀렸던 긴장감이 몇 배로 증폭되어 유빈의 전신을 짓눌렀다. 유빈의 손에서 나는 땀에 손에 쥔 휴대폰이 미끄러질 지경이었다.
유빈은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아직도 스토커가 이 집에 숨어 있을 것만 같았고 지나치게 커진 그녀의 심장박동 소리를 듣고 있을 것 같았다.
유빈은 미끄러운 휴대폰을 움켜쥐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아직 집에 있을까? 싸우면 내가 이길 수 있을까? 경찰을 불러야 하나?’
유빈은 일단 카톡에 답장을 해보기로 했다.
- 누구세요?
순식간에 1이 사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사진이 전송되어 있었다. 유빈은 더욱 커진 자신의 심장박동을 들으며 카톡을 확인했다. 유빈의 손끝에서 베어 나온 땀에 형광 빛으로 물든 휴대폰 화면 속의 사진에는 방금 유빈을 기겁하게 만든 컴퓨터 바탕화면이 찍혀있었다.
유빈은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떨리는 양손을 모아 가슴 앞으로 가져와 두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했다. 눈을 뜨고 집안을 둘러보았다. 유빈이 혼자 사는 1인용 아파트였고, 누군가 숨어 있을 곳은 많지 않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곳은 화장실이었다. 유빈은 부엌으로 가 과도를 챙겨 들고 화장실 문 앞에 섰다.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불은 꺼져 있었다. 암흑에서 누군가 튀어나올 것 같은 공포에 재빨리 불을 켰다. 아무도 없었다.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 다음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였다. 침대에 깔려 있는 이불의 모양이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울퉁불퉁했다. 유빈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과도를 꽉 쥐고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젖혔다.
아무도 없었다.
이불 아래 있던 건 지난밤 그녀가 베고 잤던 베개였다.
부엌 찬장과 빨래방, 세탁기 안까지 뒤졌지만 숨어 있는 사람은 없었다. 더 이상 집에 누군가가 숨어 있을 공간은 없었다. 과도는 땀에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고 유빈은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안도감과 아직 가시지 않은 스토커에 대한 공포가 동시에 몰려왔다.
한참을 울던 유빈은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다. 유빈이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한 남자가 거미처럼 손과 발을 천장에 붙이고 천장에 매달려 있다. 남자의 가슴과 옆구리에서 튀어나온 다른 다리들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남자가 기이한 각도로 목을 돌려 유빈과 눈을 마주친다. 남자의 한쪽 입꼬리가 치켜 올라가며 씨익 웃는다. 그러고는 팔 혹은 다리를 놀려 재빠르게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간다.
유빈이 옆으로 누운 자세에서 눈을 떴다. 대단히 기분 나쁜 꿈을 꿨다.
‘천장에…….’
유빈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얀 벽지만이 보였다. 꿈이었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꿈의 내용을 되짚어보았다. 천장에, 거미, 남자, 스토커. 꿈의 마지막 부분이 생생한 장면으로 떠올랐다. 거미인지 남자인지, 스토커인지 모를 그것이 침대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유빈의 팔에 소름이 돋아났다. 잠들기 전 침대 밑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사람 한 명이 숨어 있기 가장 좋은 공간인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침대 밑을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스토커의 손이 뻗어 나올 것만 같았다.
잠들기 전 침대 옆에 떨어뜨렸던 과도가 생각났다. 만약 스토커가 침대 밑에 숨어 있다면 그 과도를 주워 들고 있을지도 몰랐다. 유빈은 여름 날씨에 안 맞게 떨리는 입술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스토커가 침대 아래에 숨어 있다면 침대 위도 안전하지 않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용기를 내어 침대에서 내려갔다. 침대 바로 옆 바닥에 발이 닿았다. 누군가 발목을 움켜쥐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져 화들짝 놀라며 발을 털었다. 착각이었다. 다행히 과도는 유빈이 떨어뜨린 그 자리에 있었다.
휴대폰에서 손전등 앱을 켜 침대 아래를 비췄다. 갑작스러운 불빛에 놀란 거미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유빈은 무언가에 홀린 듯 뒤로 주저앉아 멍하게 벽만 바라보았다.
* * *
기분 나빴던 그 날이 지나갔다. 유빈은 컴퓨터를 포맷했고 스토커의 카톡 계정은 차단했다. 철없는 누군가의 장난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끔찍했던 그 날의 공포를 억지로 기억 저편으로 밀어놓은 채 몇 주를 보냈다.
가끔 악몽을 꾸었고, 어두운 밤에 집에 들어갈 때면 이유 없이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잊어버려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 스토킹이 다시 시작되었다.
어젯밤 길어진 회식에 폭탄주까지 받아 마신 유빈은 기상 알람을 듣지 못했다. 눈을 떠 시계를 보니 출근 시간까지는 30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유빈은 머리도 감지 못한 채 서둘러 업무용 가방을 챙겨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려는데 평소와는 승차감이 달랐다.
주차장 기둥에 차를 부딪칠 뻔한 유빈이 급하게 내려 자동차를 살폈다. 운전석 쪽 앞바퀴가 주저앉아 있었다. 타이어에 날카로운 물체에 의해 가로로 길게 찢긴 흔적이 있었다. 누군가 고의로 찢은 것이 분명했다.
순간 유빈은 그날의 공포스러운 기억이 떠올랐지만 길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오전에 거래처 방문이 예정돼 있었고, 오후에는 회사의 실세인 상무님이 참여하시는 중요한 회의 일정도 잡혀있었다. 거래처 방문과 회의를 위해 준비해야 할 일도 많았다.
유빈은 어쩔 수 없이 차를 다시 주차 칸에 넣었다. 집으로 돌아가 운동화로 갈아 신고,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달려갔다. 출근 시간대 지하철은 역시 만원이었다. 유빈은 숙취로 찌든 몸과 지각 걱정에 불안한 마음을 욱여넣으며, 지하철 안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어갔다.
몇 정거장이 지나 긴장이 누그러지고 만원 지하철에 익숙해지려는 순간, 유빈의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유빈의 발을 밟았다. 하이힐 굽에 찍힌 발등이 욱신거렸다. 짜증이 확 밀려왔지만 사람 가득한 지하철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여자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것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하이힐 굽은 계속해서 유빈의 발등을 찍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유빈은 한 마디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그녀의 어깨로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그때 지하철 문이 열렸고 하이힐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유빈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여자가 사라져버린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음 정거장은 환승역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지하철에서 내렸다가 탔고, 한참 동안 사람들을 뱉고 삼킨 지하철은 문을 닫고 다음 정거장을 향해 출발했다. 유빈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불편한 자세로 숙취를 억지로 되삼키며, 지각하지 않고 회사에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때 뒤에서 불쾌한 감촉이 느껴졌다.
누군가 유빈의 엉덩이를 만지고 있었다. 처음 당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기분은 더러웠다. 유빈은 소리를 지를까 생각했지만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1분이라도 빨리 회사에 도착해야 했다. 오전에 방문하기로 한 거래처에서는 유빈이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성패를 좌우할 만한 큰 계약이 예정돼 있었다.
유빈은 꿉꿉한 마음을 애써 갈무리하고 회사에 도착했지만 이미 출근 시간은 지나 있었고, 팀장님께 쓴 소리를 들으며 그 날의 업무를 시작해야 했다.
“민유빈 대리. 회사 생활의 기본은 정시 출근이라고 누차 말하지 않았던가요? 퇴근 전까지 지각 시말서 제출하세요.”
업무를 시작한 유빈은 분주히 움직였다. 전화를 받고 이메일을 보내고 거래처를 방문한 다음, 회사로 돌아와 복사 용지를 채우고 자료를 인쇄해 회의에 참석했다. 거래처에서의 큰 계약도 잘 진행되었고, 회의도 상무님께 칭찬을 받을 만큼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자동차가 고장나 어쩔 수 없었다는 내용의 지각 시말서도 제출했다.
아직 잡다한 일들이 그녀의 책상에 쌓여 있었지만, 그중에 급한 일은 없었고 유빈은 나머지 업무들을 내일로 미뤘다. 그렇게 서류를 책상 한켠으로 밀어놓고 업무를 정리하고 나니 불현듯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들이 떠올랐다.
‘타이어는 누가찢어 놓은 거지? 컴퓨터에 손댄 그 스토커인가? 지하철에서 하이힐로 내 발을 밟던 여자는 누구였지? 그 남자는 왜 하필 오늘 엉덩이를 만졌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