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1부 일상을 죄어오는 어둠(4)
해맑게 웃던 재준의 표정이 흐려졌다. 별로 개운하지는 않은, 약간은 시큼한 듯한 냄새가 재준의 후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 글쎄. 냄새가 좀 나나? 히터가 좀 더러운가... 흐흐. 내가 내일 차 끌고 나오는 김에 세차도 하고 오겠네. 재준이."
영길의 당황하는 표정에 재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보니 최근에 세차를 한 기억이 없었다.
"아아, 매형 번거로우실텐데....그래주시면야 너무 감사하죠."
매형이라는 사람. 때때로 실없지만 마음씀씀이가 정말 고마운 사람이라고 재준은 생각했다.
"우리 은영이도 오래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지?"
조수석에서 긴장감에 몸을 잔뜩 굳힌 채로 눈치를 살피던 은영이 재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기름칠이 되지 않은 기계마냥 어딘가 뻣뻣했다.
"아, 아니야. 고생 많았어 오빠."
은영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뭐, 나는 처남댁이랑 이런저런 이야기 하면서 즐거웠는데 처남댁은 어땠는지 모르겠네 흐흐..."
-저, 저야 뭐...
은영이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은영의 몸이 좋지 않은 것인지, 서늘한 가늘날씨에도 불구하고 은영의 목덜미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것이 재준의 눈에 보였다.
차 안이 조금 후덥지근하기는 했다.
히터가 조금 과했던 것일까. 아까 코를 찌른 냄새는 아무래도 땀냄새인 것 같았다.
'열이 좀 있나...'
은영이 걱정된 재준이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려 하자 은영이 괜찮다며 몸을 뒤로 물렸다. 재준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은영을 바라보는데 문득 스커트 아래 맨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 스타킹..."
재준이 무심결에 입밖으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의 기억에 은영은 분명 오늘 아침에 검은색 스타킹을 신었었다.
"흐흐, 그, 그 스타킹? 처남댁 말로는 학교에서 올이 나가서 버렸다고 하더구먼 흐흐."
-그, 그랬군요...
답은 은영이 아닌 영길에게서 나왔다. 은영도 뒤늦게 맞장구 쳤다.
"마, 맞아. 책상 모서리에 걸려가지고..."
-그랬구나...우리 은영이 당황스러웠겠네...
은영이 영길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할 정도로 둘이 친해졌나 싶어 재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준이 아는 은영은 스타킹 올이 나갔다고 해도 학교에서 바로 벗고 다닐 사람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여기 차안에서 영길이 있는데 스타킹을 벗을 사람도 아니었다.
'은영이가...뭐, 알아서 잘 했겠지.'
재준이 생각을 떨쳐버리고는 애써 웃었다. 나날이 추워지는 날씨에 스타킹도 없이 하루를 보냈다면 컨디션이 좋지 않을 만 했다.
"매형 기다리느라 힘드셨을텐데, 이제 어서 출발하시죠."
-흐흐 그럴까? 알겠네 흐흐.
집으로 향하던 도중, 재준의 눈에 은영이 어디가 불편한 것인지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보였다.
"은영아 어디 아파?"
-으응...아니?
"아까부터 땀을 흘리고, 열이 있나 싶어서..."
-그, 그냥 속이 조금...
속이 많이 좋지 않은 것인지 애써 웃으면서도 손이 하복부 어림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땀이 날 정도이고, 속이 좋지 않은데 하복부 쪽이 불편하다면 체한 것은 아니리라. 재준의 생각보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런...처남댁 멀미 안 하시게 천천히 운전할게요 흐흐..."
-혹시 장염이야? 혹시 뭐 이상한 거 먹은 거 있어?
영길의 실없는 농담을 한 귀로 흘린 재준이 재차 물어보았지만 은영은 괜찮다는 듯 말없이 손사래만 쳤다.
"먼저 화, 화장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은영이 주차할 새도 기다리지 않고 차 문을 열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걱정스레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재준의 눈에 그녀의 스커트 뒤쪽이 꽤나 구김진 모습이 들어왔다.
그 때문에 은영이 달려가며 스커트가 흩날릴 때마다 그녀의 뒷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은영의 스커트가 평소 즐겨 입던 것보다 조금은 짧은 것 같았다.
'조금은 짧은 것 같은데...응?'
은영의 다리 사이로 무언가 액체 같은 것이 주르륵 흘러 떨어진 것 같았다. 재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영길이 주차를 끝내자 차에서 내린 재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무언가 떨어졌던 곳으로 다가가 살피려는데 영길이 뒤에서 재준의 어깨를 휘감아오며 말을 건넸다.
"재준이, 요즘 회사 일이 많은 것 같던데 흐흐."
-...아 예, 매형. 요즘 사장님이 새로 맡기신 일이 있어가지고...
재준이 영길에게 끌려가면서도 고개를 돌려 아까 액체가 떨어진 자리를 흘긋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오늘 처남댁 컨디션이 확실히 안 좋긴 하더라 말이지. 흐흐.."
-그랬어요? 매형이 보기에도 은영이 요즘 많이 힘들어 하던가요?
은영에 관한 영길의 의미심장한 말에 재준이 고개를 홱 돌려 영길을 바라보았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흐흐"
-네 매형.
재준이 긴장하면서 영길을 따라 골목길로 향했다.
그런데 차 밖으로 나왔는데도 시큼한 내가 가끔씩 재준의 코에 전해지는 것 같았다.
'왜...내 코가 이상한가...'
"...흐흐 그러니까...재준이 와이프니까...재준이가 잘 신경 써 주더라고..흐흐..."
-아하...예...
재준은 영길이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가 싶어 잔뜩 긴장하고 따라갔는데, 정작 영길은 10여 분 간을 별 소득 없는 이야기만 했다.
자신의 연애사나, 누나인 연수와 화해했던 일 같은, 크게 의미는 없는 이야기들.
"감사해요 매형."
-흐흐, 처남댁에게 잘해, 재준이.
재준이 애써 웃으면서 몰래 한숨을 내쉬고는 집으로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은영아!"
재준이 집으로 들어가자, 방금 전 물을 내린 듯 '화아' 하는 소리와 함께 변기에서 물이 채워지는 소리가 화장실 문 너머로 작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은영이 물을 내린 것 같았다.
재준이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 사이에 샤워도 한 것인지 샤워기에서도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바로 씻다니, 아까 땀을 좀 많이 흘렸나보네....은영이 속은 좀 괜찮으려나...응?'
새 물이 차오르는 변기 안에 꼬부랑 털이 한가닥 맴돌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아닌 듯한 길이, 바로 음모였다.
'속을 게워낸 게 아니라 볼일을 본 거였나?'
세면대 배수구에도 비슷한 길이의 꼬부랑 털이 한가닥 걸려 있었다.
하지만 은영은 며칠전 왁싱을 해서 음모가 없지 않았던가. 은영의 것일 리 없었다. 다른 가족의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같이 산다지만 치울 건 치워야지... 누구 거지? 오늘 한마디 좀 해야겠네.'
재준의 이마가 한껏 찌푸려졌다.
어머니와 연수는 재준 등이 도착한 뒤에도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에야 느지막히 집에 돌아왔다. 재준 등이 늦게 온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인지 느긋하게 장을 본 모양이었다.
여유 있게 장을 보았어서 그런 것일까, 오늘따라 장바구니가 화려했다.
"오늘은 모처럼 장어를 사왔으니 다들 먹고 기력 좀 챙기려무나."
-장어! 정력에 좋다는 장어! 어이구 장모님 감사합니다 흐흐....악! 연재엄마!
잘 차려진 식탁, 한가운데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장어. 영길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신 실실거리자 연수가 냅다 등짝을 후려갈겼다. 영길이 비명을 질렀다.
"하여간 유영길이 나잇값 못하기는! 여기 니 입만 있냐 이 화상아!"
-거 왜 나한테만 그래...
영길이 입이 댓발이나 튀어나와서는 아픔을 호소했다. 연수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니가 요즘 비실비실거리는건 알겠는데, 양보 좀 해라. 여기 재준이도 있고 올케도 있는데 말야. 어휴..."
-하긴 우리 재준이도 먹고 힘 좀 써야지... 미안합니다 처남댁 흐... 아야! 왜 또!
"미쳤냐! 이 인간이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아주 그냥. 내가 다 쪽이 팔려요 어휴...미안해 올케."
영길의 어줍짢은 사과와 계속되는 연수의 역정. 연수가 영길을 향해 쌍심지를 켜다가 은영을 바라보며 이해를 구했다.
"호호, 저는 괜찮아요. 장어 많이 드세요 시매부."
은영이 작게 웃었다.
마치 한 편의 시트콤 같았다.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모두가 즐겁게 웃었다.
"다녀왔습니다."
한 차례 소동이 끝나고 마침내 식사가 시작되려는 순간, 때맞춰 연재가 현관에 들어섰다.
"우리 아들 왔어? 요즘 좀 열심히 하네?"
-아, 예...
연수는 그저 열심인 연재가 기특한 것인지 만면에 화색을 띠며 제 아들을 맞이했다. 연재가 마지못해 웃으며 답하다가 연수 너머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은영과 눈을 마주쳤다.
연재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