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1부 흔적(2)
"장모님 30분 뒤면 도착하신다는구먼? 처남댁은 아직 주무시나? 흐흐"
-아! 네 매형 곧 나갈게요!
도로 사정이 좋은 것인지 어머님 일행이 예상보다도 더 일찍 돌아오는 것 같았다.
어째서인지 영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은영이 재준을 더 꼭 끌어안았다. 재준이 그 모습을 보며 의아하게 여겼지만, 더 자고 싶은 마음에 그러는 것이라여기고는 웃으며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떼어내었다.
은영이 살짝 원망 섞인 눈길을 보냈지만 재준은 따뜻하게 미소지었다.
"요즘이 좀 많이 바쁜가봐? 우리 은영이가 이렇게 꾀도 부리고 하하. 안그래도 매형이 차 수리된 거 끌고 오셨더라구. 한번 나가서 확인해보자."
-...응? 시매부가 차를...?
은영이 의문섞인 눈망울로 반문하자 재준이 갸웃했다.
"매형이 아까 그러시던데? 아침에 네가 부탁했다고. 기억 안 나?"
-아, 아아...그랬었지...그랬던 것 같아.
은영이 멈칫하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자, 이러다 해 다 저물겠어. 하하..."
재준이 몸을 일으키고는 앞장 서서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그런 재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은영의 눈이 불안함으로 떨리고 있었다.
"어이고, 처남댁 많이 피곤하셨구만요, 이렇게 늦게까지 주무시고 흐흐."
은영이 방에서 나오자마자 멀리서 영길의 목소리가 그녀를 반겼다.
"흐흐 그래도 여전히, 예쁘긴 하시네요 흐흐."
-아하하...고, 고마워요 시매부...
반사적으로 움찔했던 은영이, 어색하게 인사를 받으며 재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재준이 해맑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하...두 분 가까워진 모습이 보기 좋네요. 그나저나 은영아, 어머니랑 누나 곧 오시니까, 슬슬 준비하자. 내가 뭐 도와주면 될까?"
-어...어제 해놓은 밥이랑 반찬 있으니까 그거 위주로 먹으면 될 것 같아.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은영이 재준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영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흐흐..."
그녀의 전신을 훑어대는 노골적인 시선. 은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애써 웃는 표정을 지으며 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엇을...어떻게...'
영길과 시선을 마주한 이후로는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벌렁대는 심장과, 반사적으로 젖어오는 은밀한 곳의 감각이 그녀의 신경을 분산되도록 만들었다.
지난밤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은영의 눈을 어지럽혔다.
'후우...'
영길과의 관계는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된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 연재가 걱정이었다.
'앞으로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지...'
연재에게 자신의 치태를 고스란히 내보였다는 그 좌절감.
또한 중요한 시기, 간신히 의지를 잡고 학업에 열중하려던 연재에게 혹여나 악영향을 끼친 것은 아닐지...
여자로서의 수치심인지 교사로서의 책임감인지 아니면 그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는 생각의 물결이 그녀를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은영아?"
- 어맛!"
뒤로 느껴지는 인기척에 은영이 살짝 긴장했지만 다행히 재준이었다.
"멍하니 서 있길래.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나 했지."
-아, 아아...
재준이 은영의 어깨를 부드럽게 주물러주었다.
"요즘 이래저래 힘든 것 같은데, 내가 큰 힘이 못 되주는 것 같아 미안해..."
- 아니야 오빠...
재준이 뒤에서 은영을 따뜻하게 포옹해주자 은영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미안해 오빠...나는...모르겠어...'
은영이 밥상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발소리와 함께 현관 문이 열리며 시어머니와 연수가 들어왔다.
"고생하셨어요 어머님, 형님."
-오랜만이야 올케! 우리야 뭐, 바다 보고 잘 놀다 왔지. 별일 없었지?
"...아, 예."
시어머니, 영길, 연수, 재준, 은영.
다섯 명이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사위 덕분에 이번에 일이 잘 되었어. 고맙네. 정말로 고생이 많았어."
-흐흐... 오랜만에 힘 써서 그런지 허리가 조금...
[찰싹]
"아야! 이 여편네.. 아니 연재 엄마, 아프잖아.."
-하여간 칭찬을 해줘도 못 받아 먹어요. 니가 고생한거 누가 몰라? 어휴...
한 편의 꽁트와도 같은 영길 내외의 실랑이에 밥을 먹던 모두가 웃음지었다.
은영만 빼고.
"애미야, 우리 연재는, 어디 갔니? 오늘이 학교 가는 날이든가..."
- 아, 아마도 독서실에 간 것 같아요.
도망치듯 멀어져 가는 뒷모습 이후로 연재를 보지 못했다.
지난 새벽 마주했던 연재의 슬픈 눈동자가 떠오르자 은영의 표정이 흐려졌다.
"애미가 많이 피곤한 모양이네, 얼굴에 그늘이 졌어."
- 아닙니다 어머니...
은영이 겪어 온 갖가지 수모를 생각하면 이렇게 애써 웃고 있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리라.
고개를 숙이고 숟가락만 애써 휘젓는 그녀를 재준이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그... 안 그래도 이 자리를 빌어 매형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응?'
여기서 갑자기 영길이 왜 나온단 말인가. 은영이 고개를 들었다. 다른 가족들도 재준을 바라보았다.
"최근에 은영이가 일이든 회식이든 많이 치이는지 피로하기도 하고, 또 아시다시피 교통사고도 있었고 해서,"
-흐흐...?
영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재준과 은영을 번갈아보다가, 무엇을 직감한 것인지 눈가가 휘어지고 있었다.
"혹시라도 여유가 되신다면, 출퇴근길에 저희 부부를 가끔 태워다주실 수 있는가 해서요."
영길로서는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다. 잔뜩 신난 영길이 당연히 그러겠노라 나서려 하는데 옆에서 허리를 꼬집는 손길에 허리를 배배 꼬았다.
"그럼! 내가...아야얏!"
- 당신은 가만히 있어봐.
연수였다. 기분이 상한 것인지 그녀의 이마가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아니, 넌 지금 매형을 기사 노릇 시키겠다는거야? 연재아빠가 당장은 일이 없는 건 맞아, 아무리 그래도 아랫사람 부리듯 그렇게 막 하면..."
-누나, 누나 말 뭔지 잘 알아요. 당연히 저도 알죠.
재준이 난처해하며 손사래를 쳤다. 연수가 언성을 높였다.
"근데도 그래! 야! 너네가 돈 벌면 다야!"
-누나, 그래서 저도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정말 고민했고, 매형께서 불편해 하실 것 잘 아는데... 그래도 은영이가 이렇게 힘들어 했던 적이 처음이라... 부탁할게요, 이해해주세요."
영길로서는 매우 기꺼운 전개였다. 평소에 은영과 둘만 같이 있으려면 신경 쓸 요인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머리가 아팠는데, 재준이 녀석이 알아서 제 마누라를 들어다 바치고 있었다.
'흐흐...진짜 멍청한건가... 여튼 고맙네 재준이!'
영길로서는 고민하는 척 하다 받아먹으면 그만이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흐흐, 연재 엄마. 내가 가만히 있는데 왜 연재 엄마가 열을 내고 그래. 흠흠.
영길이 연수를 달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 저도 가족으로서 뭔가 역할을 해야 하니까요 흐흐. 까짓거 기사노릇 그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럽디까... 흐흐 요즘 재준이도 회식 자리도 많은 것 같고, 우리 처남댁도 요새 많이 힘드신 것 같고 하니, 흐흐 제가 기꺼이 하겠습니다!"
모처럼 영길이 깔끔하게 말을 맺자 다들 새삼스럽다며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연재아빠, 정말 괜찮겠어?"
-뭐 못할 거 무에 있나? 흐흐..
영길이 으쓱했다.
"자존심 빼면 시체라던 양반이...별일이야...뭐 알아서 해들."
-매형!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따로 사례드릴게요.
연수가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풀었다. 재준도 감격한 표정이 되었다.
"이제 처남댁만 오케이 하시면 되는데, 어때요?"
모두의 시선이 은영에게 집중되자,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네, 저야 감사하죠..."
어느덧 자정.
재준이 씻으러 간 사이, 은영이 주방에 서서 물을 컵에 따라 마시는데 현관 문이 열렸다.
"다녀왔습니...!"
은영과 연재의 눈이 마주쳤다.
연재의 눈이 잠시 떨림을 보이더니, 이내 시선을 외면하며 도망치듯 제 방으로 향했다.
"연재야..."
은영이 작은 목소리로 불렀지만 연재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방문을 닫았다.
"방문 앞에서 뭐 해?
-으, 응?
재준이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면서 다가왔다.
"아, 연재가 방금 들어왔는데 표정이 별로 안 좋아보여서."
-그래? 무슨 일 있었나...학교에서 별일은 없었고? 은영이가 담임이잖아.
"글, 글쎄...나도 잘 모르겠어..."
그 이유는 죽어도 말할 수 없는 은영이었다.
"연재가 2학년이었지? 지금 한창 감수성 넘칠 때니까...어서 씻고 자자."
-응, 알았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재준이 방으로 향하자, 은영도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닫힌 방문을 좀처럼 떠나지 못했다.
일요일은 별일 없이 지나갔다. 은영이 겪었던 지난 며칠 간의 지옥은 마치 꿈이었기라도 한 것처럼.
시어머니와 연수는 함께 TV를 보며 시간을 보냈고, 연재는 독서실을 가는 것인지 이른 아침부터 가방을 메고 문 밖을 나가서는 자정 즈음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한편 영길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늘어지게 자다가는 경비 일을 한다고 나가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은영은 모처럼 재준과 방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없었구나."
-응 오빠. 확실히 편하긴 해.
당혹스런 표정으로 맨질맨질해진 피부를 쓰다듬는 재준을 보며 은영이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게 최선이었어...'
지난 금요일 밤 동수에 의해 털이 밀린 이후, 은영이 아무리 고민해보아도 이와 같은 극명한 신체적 변화는 숨길 방법이 없었다.
가끔씩 그녀의 하체를 훑고 가는 재준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차라리 먼저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었다.
재준이 야근하던 날, 엉겁결에 남편을 위한 '서프라이즈'라는 이유로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왁싱샵에 다녀왔고, 이제야 보여준다는 이야기.
"우리 은영이가 이렇게나 야하게 할 줄 알았다니 의외네. 하아..."
-오빠도 참...
모처럼 나누는 사랑, 소녀의 그것처럼 뽀얀 피부 아래 갈라진 틈새로 물건을 집어넣던 재준이 금세 사정해버렸다.
"후우...또 너무 일찍..."
-괜찮아. 나는 좋았어, 오빠.
재준이 숨을 헐떡이며 아쉬움을 표시하자 은영이 평온한 어조로 그를 칭찬했다. 은영은 결코 재준에게 실망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것도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