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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화 〉1부 흔적(1) (102/109)



〈 102화 〉1부 흔적(1)

"어우....우욱..."

재준이 문득 몰려 오는 구토 기운에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여긴 어디....집인가.'


속이 느글거리고, 어지럽다.

커튼이 젖혀진 창가는 이미 환했다. 햇빛이 방으로 잘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미 해가 뜬 지 오래인 듯 했다.

옆에서는 이 시간까지 어쩐 일인지 은영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늦잠을 자는 사람이 아니었는데...어쩐 일로?'


입을 벌리고서는 자는 모습을 보아 하니 많이 피로했던 모양이었다.


"...우웁!"

발을 내딛을 때마다 머리가 울리듯 아파오며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지만 재준은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웩! 웩! 어우..."



변기를 부여잡고 속을 게워내자 변기물이 순식간에 탁하게 물들었다.


[쏴아]

토사물로 더러워진 변기 물을 내리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형님이랑 술을 마셨고...'

그 뒤로는 기억이 없었다. 제발로 집에 걸어들어온 것인지 영길이 데리고 온 것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옷은 갈아입혀진 상태.



'은영이가 갈아입혔나...'

곤히 자고 있는 은영에게 괜시리 미안해졌다.

"괜히 뻗대지 말고 자제할걸...어우..."


세면대의 물을 틀어 가글을 반복했다.

위산을 토해내는 것인만큼 목을 보호하려면 반드시 해줘야 하는 일.

하지만 아무리 가글을 해도 식도 아래쪽까지는 닿지 않아서, 결국 물을 마셔야 할 모양이었다.


주방으로 가서 물을 마시고, 인상을 찌푸리며 거실을 지나치는데 은영의 코트가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방에다 걸어놓지 않고 뭐하는거야..."



코트를 손에 들고 방으로 돌아가는데 이번에는 작은 천쪼가리가 보인다.

은회색의 실크 팬티. 은영의 것이었다.

재준이 결혼 3주년 기념으로 은영에게 선물했던 것으로 헷갈릴 리가 없었다.

'이게  여기에...'

집어들어서는 혹시나 해서 냄새를 맡아보니 지린내가 나가 나는 것이, 이미 입은 팬티다.



"...지금 집에 식구가 몇인데 이런 실수를..."

재준이 굳은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가 부부 세탁망에 은영의 팬티를 가져다놓고는 옷장에 코트를 걸었다.

은영은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좀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재준이 창문을 열었다. 아직 밖이 환하건만, 선선한 바람이 방안으로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말 오래 자기는 했나보네...'



재준이 찌뿌둥해서는 기지개를 펴다가 침대 아래쪽에 남자 팬티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어머니께서 최근에 장을 보시다가 싸고 좋다고 여러  사오셨던  팬티인  같았다. 스무 장 가까이 사오셔서는 재준과 영길, 연재에게 나눠주셨던 그 팬티.



'내가 언제 여기다 벗어뒀었나...'



재준이 고개를 갸웃 하다가는 생각을 접고서는  팬티를 집어다가 부부 세탁망에 던져넣었다.


재준이 조금 더 잘까 고민하다가 단념하고는 거실으로 나와 쇼파에 앉아 있기를 얼마간,

현관문이 열리며 영길이 들어왔다.

"매형! 어디 다녀오시나봐요?"

-....어? 어! 재준이!"



반갑게 맞이하는 재준을 보며 영길이 잠시 당황하는 듯 하다가, 이내 실실 웃으며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어제는 제가 실례가 많았..."

-아니 아니지! 재준이랑 술 먹을 때마다 내가 즐겁지 흐흐.


재준으로서는 요즘 따라 영길이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술에 관해서는  내키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몸에 잘 받지 않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영길은 쉼없이 마셔대는 말술 타입이어서 더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제가 술이 약하다보니까 그..."

-크크 남자는  먹고 취해도 보고! 막  떠보면 여기가 어딘가 싶기도 하고! 그래야 남자인거지 흐흐 괜찮어, 괜찮다니까.

"...아, 예..."

재준이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뭐 어떻게 하기가 어렵네, 술만은 최대한 피하는  밖에...'


회사에서도 버티기 어려운데 집에서까지 술에 시달리는 것만은 질색이었다. 재준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어디 볼일 보고 오신거에요?"

-아, 그러니까 그게...처남댁이 부탁해서, 카센타에 맡긴 차, 그거 찾아왔지 흐흐.



재준의 환한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영길이, 실실거리며 뒤늦게 대답했다.

"아아,  그래도 제가 다녀오려 했었는데...감사합니다 형님!"

-흐흐 우리가 뭐, 가족인데 서로 돕고 그러는거 아니겠는가 흐흐.


그런 영길을 바라보며 재준이 맑게 웃었다. 그리고는 무언가 생각난듯 입을 열었다.

"아, 은영이가 아까 일어나 있었어요? 얼마나 피곤하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자고 있는 사람이...."

-그, 그게 말이지, 내가 거실에 있는데 처남댁이 엄청 피곤한 얼굴로 나와서는 조심스럽게 그.. 그래 부탁! 부탁을 했거든. 그래서 흐흐...

영길이 눈을 굴리며 대답하는 모습이 재준이 보기에 뭔가 어색하기는 했지만, 평소에도 그런 사람이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나저나 어머님이랑 누나는 언제쯤 오는지 연락 받으셨어요?"

-흐흐 그게 아마, 다섯 시  전에는 도착할 것 같던데 흐흐...

"그래요?  오실텐데. 온 가족이 저녁 같이 먹죠 그러면. 은영이 좀 깨워야겠어요. 은영아! 슬슬 일어나야지!"



재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큰 소리로 은영을 부르며 방으로 향했다.


"흐흐...처남댁이야 뭐.. 피곤할 수 밖에..."

방으로 사라지는 재준을 바라보며 영길이 중얼거렸다.

"은영아? 낮잠은 그만 자자. 응? 어머니랑 누나 곧 오신다니까 저녁 준비하자."

-....흐응....으응? 오...빠?



몸을 흔드는 느낌에 은영이 힘겹게 눈을 떴다. 남편 재준이 그녀를 깨우고 있었다.



"어서 일어나자, 황금 같은 주말인데. 대체 어제 뭘 했길래 이렇게 늘어지는거야?"

-으, 으응... 일이  많아서...

지난 밤의 일이 생각나며 은영의 눈이 흐려졌다.

은영의 표정이 찌푸려지는 것이 오로지 피로 때문인 것으로 생각한 재준이 은영의 팔다리를 주물러주었다.


"꺄아! 간지러워!"

-왜 이래? 우리 은영이 온몸이 뭉쳤나, 운동이라도 한거야? 온 몸에 알이 박힌거 같네. 어이구 우리 마누라!

"흐, 흐응..."

갑자기 장난기가 들었는지 재준이 은영의 온몸을 은근히 자극하기 시작했다.

간지럼을 타는지 신음을 흘리면서 몸을 배배 꼬는 은영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재준이 돌연 이상함을 느꼈다.

'없어...?'



은영의 사타구니 부분을 간질이다가, 삼각지 부분을 스쳤는데 본래 느껴져야 할 소복한 털의 촉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재준은 은영의 털을 쓰다듬는 것을 은근히 즐기는 편이었다.


'이상하네, 잘못 느낀건가...'

재준이 다시 손을 뻗어 만져보려는데 은영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서는 재준을 덮쳤다.


"왁!"

-뭐, 뭐야!

은영이 재준을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뜨며 째려보았다.

"술에 쩔어서는 오매불망 서방님을 기다리던 여인을 무려 불금에 독수공방시킨 극악무도한 죄인이 여기 있으렷다!"

-아하하, 미안, 미안해 하하

은영이 돌연 사극 톤으로 애교를 떨어오자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피식대는 재준이었다.

"오빠, 요즘 술 너무 많이 먹는거 아니야? 몸 좀 생각하세요 최재준씨."

-큭큭 미안해, 요즘 사장님이 변덕이 심해가지고. 그리고 어제는 오랜만에 매형이 한잔 하자 하셔가지고...

재준이 자신이 술에 취하던 날마다, 그녀가 이런 저런 남자들에게 돌려지고 있었음을 안다면 과연 무슨 표정을 짓게 될까.



'제발... 오빠가 그렇게 술로 인사불성이 될 때마다 나는...'

갑자기 코끝이 매워오는 것을 느낀 은영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억지로 활짝 웃으며 말하려는데 이미 코가 막혀서는 말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하깅 나동 회싱이 많...아씨, 흑, 흐윽..."

-은, 은영아? 울지 마, 울지 마... 많이 힘들었구나. 내가 잘못했어,  신경 쓸게요 우리 은영이...


갑자기 서럽게 눈물을 쏟는 은영을 보며 재준이 당황했다가, 이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안아주었다.

'요새 힘든 일이 많았나보네...'

돌이켜보면 요 며칠 사이에 은영에게 꽤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전근을 갔다는 동료 교사,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

"전근 가셨다는 이 선생님이랑 많이 친했었나보네 우리 은영이...어이구.."

-...흐응? 으, 으응...


재준이 생각하기에, 은영은 똑부러진 듯 하면서도 은근히 감수성이 풍부한 여자였다.

'심리적으로 의지했던 동료라면 그럴 수 있지.'


재준이 잘은 모르지만 이런 때일 수록 가족이 더 곁에 있어주고 섬세하게 챙겨야 한다고 어디 신문기사에서 읽은  같았다.



"많이 외로웠어요? 이 오빠한테 말하지 그랬어."

-흐윽...아니야...오빠, 내가 더 미안하지...흐윽...

"에이, 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이리 와, 꼭 안아줄게."



은영이 재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해 오빠...정말 미안해...'

재준이 은영을 품에 안고 토닥이고 있는데 밖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재준이!"

-네 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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