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1부 꽃이 지는 밤 - 꽃이 지다(4)
[또각, 또각, 또각]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넋 놓고 있던 연재의 귓가에 누군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허공을 헤매던 연재의 눈동자가 돌아왔다.
'선생님이야!'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은영이 돌아오는 것이 분명했다.
연재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제 방으로 달려가 문을 뒤로 밀치며 침대에 누웠다. 문이 닫힐 듯 했지만 아주 살짝 틈을 두고 닫히지 않았다. 기압 때문이었다.
[딸깍. 또각, 또각.]
급하게 이불을 덮는 것과 동시에 현관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연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누군가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발소리는 한 명이 아니었다.
'선생님이...아닌가?'
[스르륵]
그런데 옷가지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 옷감이 서로 마찰하며 부스럭대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부산스런 몸짓.
"잠, 잠시만...하읏..."
속삭이듯 희미하게 들려오는 여자의 애절한 신음성.
연재로서는 도저히 헷갈릴 수 없는 이 목소리. 은영이었다.
연재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치떠졌다.
'선...선생님...!'
영길에게 손목이 잡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은영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놀이터에서 영길과 나눴던 말들을 곰씹고 있었다.
'...끝까지 굴린다...'
영길의 손에 의해 은영이 또 한번의 절정에 올라 흐느끼고 나서야 영길은 그녀를 안아주었다.
속살 깊이 손가락을 받아들인 채로 자신의 품에 안겨 가쁘게 숨을 내쉬는 은영에게 영길은 속삭였다.
"나는 처남댁을 끝까지 굴릴 거에요."
-...하아...하아...
"철저하게 걸레년으로 만들어버릴 겁니다. 흐흐...좆이라면 그저 좋아 죽는 그런 발정난 암캐년으로..."
-...그, 그런...
극단적인 언사에 은영의 몸이 놀람으로 경직된 것이 느껴졌다. 영길이 잠시 말을 멈추고 은영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영원히 날 벗어나지 못하도록... 흐흐..."
-영, 영길씨...
은영이 눈을 감았다. 그녀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있었다.
'결국...'
영길이 은영에게 마지막으로 벗어날 기회를 주었다.
"그러니까....지금이라도 도망가."
'도망이라고?....'
은영은 침묵했다.
여기서 도망을 간다고 해서, 과연 자신이 정말로 자유로워지는 것이 가능할까.
그보다 도망을 치면 어디로 치라는 말인가. 자신이 애써 일군 가족이라는 울타리, 사랑하는 재준과 시어머니, 번듯한 직장, 학교와 제자들을 버리고 가라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영길이 놓아준다고 하더라도 배봉은? 그 잔인한 사람이 과연 자신을 이대로 놓아줄까.
애초에 도망이란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회의감과 무력감이 전신을 무겁게 짓누르며 체념이란 결론으로 은영을 떠밀고 있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은, 은영이 가슴 한편에 본능의 속삭임을 내버려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그녀가 탈출을 원했다면 가능성 여부를 떠나 말로든 행동으로든 극복의 의지만이라도 내보였어야 했다.
구체적인 방법은 그 다음 이야기였다.
그러나 은영에게는 그런 의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뼛속 깊이 새겨진 지독한 쾌락의 기억에 지배당하며, 지금도 그녀의 아랫도리는 전율하면서 '남자'를 끈질기게 갈구하고 있었다.
은영의 체념은 기실 쾌락에 절여진 몸이 무의식을 통해 욕망을 이성으로 합리화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
숫자를 천천히 센다면 '열'까지 셀 수 있는 시간이 지날 때까지 은영은 말을 꺼내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처남댁, 꽤 시간을 많이 줬다고 생각하는데..."
-...
은영은 말없이 자신의 속살 깊이 파묻힌 손가락을 더욱 강하게 조여오며 그렇게 영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영길이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은영을 내려다보았다.
"...처남댁의 선택이 정 그렇다면 흐흐..."
영길이 은영의 등에 두른 팔에 힘을 주어 더욱 꽉 끌어 안는 동시에 그녀의 속살을 음미하던 손가락을 더욱 깊이 쑤셔넣었다.
"아흑!"
질벽을 깊게 긁어오는 자극에 은영이 신음을 토했다.
그녀의 귓가에 영길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완전히...길들여줄게요 흐흐..."
-...흐윽....
은영의 명치 즈음에서 미묘한 감각이 새롭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결국 거부하지 못했어...'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채 앞서서 걸어가는 영길의 등은 크고 막막하게만 보였다.
높고 깊은 절벽과도 같은, 위험하면서도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의 등.
"조금만...아주 조금만... 저를 아껴주세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먼저 뒤돌아서는 영길을 향해 은영이 흩날리는 듯한 어조로 속삭이듯 말했다.
잠시 멈춘 영길의 등을 향해 은영이 다가가 안았다. 영길이 멈칫했다.
"흐흐...아낀다라...글쎄요...나란 놈이...처남댁은 나를 믿습니까?"
은영이 중얼거렸다.
"...믿을 수밖에요..."
-뭐, 처남댁이 말을 잘 듣는다면...생각해보지요...흐흐
"...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은영은 영길의 손에 이끌려 묵묵히 걸었다.
'...생각해본다고 했어...'
그 한마디 말이라도 믿고 위안을 삼아야 했다. 앞으로도 그녀는 영길이 이끄는대로 묵묵히 따라가야만 하니까.
그 끝이 파멸이라고 해도...
현관에 들어서서 신발을 벗자마자 영길의 팔이 은영의 허리를 감아오며 다른 손으로는 원피스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하나 끌러내렸다.
"기, 기다려봐요...으흣..."
은영의 몸은 놀이터에서의 애무로 인해 이미 달아오른지 오래였다. 게다가 영길의 의미심장한 선언이 있은 뒤, 은영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지펴진 어떤 불길은 그녀를 또다른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영길로부터 애써 몸을 빼내며 간신히 코트를 벗기가 무섭게 영길의 손이 가슴팍을 점령하고 젖가슴을 우악스럽게 주물러댔다.
투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코트가 바닥에 떨어졌다. 영길의 손은 어느새 그녀의 벌어진 원피스를 헤치고 축축해진 팬티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잠, 잠시만...하읏..."
[찰박, 찰박]
은영의 애원은 무시하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속살의 축축한 느낌을 음미하던 영길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히죽 웃었다.
손목이 잡힌 은영이 반항할 새도 없이 그녀를 재준이 잠든 방으로 강제로 밀어넣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하윽..."
-흐흐, 스릴 넘치게 해보자는 거지. 처남댁.
당황한 은영이 소리죽여 항의하면서도 혹여나 재준이 깨기라도 할세라 곤히 잠든 재준의 얼굴을 살폈다.
덕분에 영길은 큰 저항 없이 은영의 옷을 쉽게 벗겨버리고 알몸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
"아니! 그래도 이건...흡...읍..."
-흐흐...이건 처남댁이 선택한거야...
영길의 주문과도 같은 한마디에 은영의 눈에 힘이 풀렸다. 그녀는 저항의 의지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었다.
은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선택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