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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화 〉1부 꽃이 지는 밤 - 꽃이 지다(2) (92/109)



〈 92화 〉1부 꽃이 지는 밤 - 꽃이 지다(2)

둘은 잠시 걷다가 집에서 머지 않은 곳에 있는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그래서 내일 온다 하대요. 흐흐."

-아...네...

영길에게 듣자 하니 시어머니와 연수는 경상남도 창원까지 내려갔던 김에 같이 봉사 갔던 지인들과 통영 겨울바다를 보고 온다고 했다.

'그래서   집에 안 계셨구나.'


"...일은 내가 다 해놓고 시펄...흐흐"

-...고생하셨네요.


영길과 이렇게 평범한 대화를 나눌 수있다는 것이 은영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은영은 처음부터 영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 때문인지 경계하며 말을 해보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었다.



"...솔직히 처남댁 예전부터 나한테 너무했던 거 아닙니까 흐흐."

-...제가 무엇을...?

"그 막 백수라고 무시하고 그랬잖아요 흐흐..."

-그, 아니, 그러니까...

은영이 당황하며 손사래를 치자 영길이 히죽 웃었다.

물론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면  경계는 필요한 것이었지만, 불필요한 오해라거나 적개심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겠다는 후회도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처남댁은 훌륭한 선생님이니까 내가 영 마땅치 않겠지만, 나도 그래도 고아 치고는 나름 열심히는 살았어요 흐흐..."

-...아, 그렇죠, 그럼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모두 여의었다는 공통분모.

은영도 기억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부터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많았다. 탈선의 유혹. 포기하고 싶은 순간.

은영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 교사라는 번듯한 직장을 가진 것은 어찌 보면 기적과도 같았다.

영길이 말하는 힘겨움, 은영도 그 근본적인 외로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살아왔기에 그녀는 영길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애비 애미 없다며 깔보는 늙은 놈들, 뭐만 하면 수군거리던 동네 여편네들. 촌지 챙겨줄 부모 없으면 관심도 꺼버리던 학교 선생놈들까지... 처남댁도 알잖아. 그렇죠? 흐흐.."


지금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주먹을 쥐고 떠는 영길의 모습이, 결코 남일 같지 않았다.



"날 무시하는 인간들 앞에서 절대 무릎 꿇을 수는 없었죠. 싸구려 동정이나 받고 살긴 싫었다 이말이야 흐흐..."

-...이해해요...



건달생활이나 하던 것에 대한 변명이라면 변명이었지만, 그것은 부모가 없어 본 은영으로서는 구차하다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아픈 말들이었다.


"그러다가 연수, 마누라를 만났지..."

-아...


영길이 세상에 상처 받고 이리저리 치이던 때, 가출했던 연수를 만났다고 했다.

음울했던 영길에게 적당히 철없으면서도 자신을 챙겨주는 누나였던 연수는 한줄기 빛과도 같았다.


"지금은 저렇게 왈가닥이지만 흐흐, 예전엔 얼마나 귀여웠는데...흐흐"

-아...네...



자신과 하루가 멀다 하고 몸을 섞는 영길이 마누라를 추억하자 어딘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애써 속내를 감추었다.



'...뭐야, 내가 꼭 질투라도 하는 것 같잖아...'


은영이 저도 모르게 서운한 표정을 지으려다 멈칫했다.


"흐흐..흐흐"

영길이 갑자기 히죽 웃었다. 은영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영길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배봉이 그 새끼도 내 옆에 있어주긴 했지...흐흐"

-...배, 배봉씨는...

가장 듣기 싫은 이름이 영길의 입에서 나오자 은영의 얼굴이 굳었다.



"흐흐, 머리 검은 놈들  사십 평생  유영길의 뒷통수를 치지 않은 놈은 그 새끼밖에 없더구만요 흐흐..."

-하지만 시매부...그 사람은...



은영의 안색이 나빠지고 있었다.



"흐흐, 배봉이 그놈이 좀 음침한 구석이 있긴 하지."

-아...



영길에 대한 경계심이 서서히 풀리고, 마음 한켠에서는 어떠한 안정까지 얻고 있었지만, 배봉만큼은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시매부, 배봉...그 사람은 무언가 달라요... 위험한...무, 무서워요 흐흑..."

-흐흐, 무섭다니요. 뭐가요 처남댁.



은영이 영길의 팔을 붙들고 애절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큰 눈망울이 흔들리며 영길의 마음을 돌리고자 했다.

그러나 영길은 단호했다.



"처남댁. 나는, 그 녀석과 끝까지 갑니다 흐흐..."

-아아...

은영은 직감했다.

'결코 둘을 떼놓고 생각할 수는 없겠구나...'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 은영의 눈이 우울한 빛을 띠었다.

"하지만 시매부..."

-흐흐, 알아요 알아.



은영이 말을 잇지 못하자 영길이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배봉이한테 가랑이 벌리라고 하니까 싫은 거잖아요 흐흐."

-알고 있으면서...미워요! 후...


은영이 샐쭉한 표정이 되었다.


"큭큭, 뭐, 처남댁이랑 나랑 하하호호 웃던 사이도 아닌데 내가 신경 써 줘야 하나? 흐흐"

-꼭 그렇게 말을 해야...



은영이 눈을 흘기는 것을 보며 히죽 웃던 영길이 벤치에 등을 기대며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었다. 그런 영길을 바라보던 은영도 이내 벤치에 등을 기대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처남댁과 이렇게 길게 말해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흐흐."

-....그러게요...



둘은 잠시 말을 멈추고 맑은 밤하늘만 눈에 가득 담았다.

은영에게는 너무도  하루였다. 은영의 몸도 마음도 한계까지 닳아버린 그런 날.

잔잔한 바람이 스쳐지나가며 서늘함을 선사했다.

우습게도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보다  절망적일  없는 상황인데,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나아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다 타버린 재가 바람에 휘날리듯 휑한 느낌이라니.

은영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시매부, 아니 영길씨..."

은영이 영길의 이름을 부르자 영길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남댁이 이름 불러주면 느낌이  묘하긴 하네요 흐흐,  하실 말씀이라도?"

-그...예전...에는 정말 죄송했어요.



은영이 진심 가득 미안함을 담아, 크지 않은 목소리로, 하지만 분명하게 뜻을 전달했다.

"갑자기 그런 말 들으려니 쑥스럽기는 하네요 크흐흐..."

어색함에 쭈삣거리는 영길이 귀여웠는지 은영이 킥 하며 소리죽여 웃었다.



"언제고 했어야 하는 말이었는데. 자존심에 말을  했어요. 죄송해요."

-그러니까 그...뭐 그렇다면야...아, 적응 안되는구만요. 흐흐...


영길이 머리를 박박 긁고, 은영은 다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후, 잠깐 한 대 필게요 처남댁."



찰칵대는 라이터 소리와 함께, 담배에 불을 붙인 영길이 한모금 빨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후 불었다.


"....그 뭐, 내가 처남댁한테 사과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흐흐..."

-...알긴 아시네요? 쿡...

영길이 담배연기를 마저 뱉어내면서 민망한듯 중얼거리고 은영은 작게 웃었다.

"나도...뭐 좋은 놈은 아니니까...흐흐.."

-....



영길이 말을 흐렸다.

은영도 지난 기억이 물밀듯 밀려오며 울적함이 머리와 가슴을 메워오자 일부러 크게 얼굴을 찡그리며 슬픔을 애써 몰아냈다.


"뭐 솔직히, 처남댁이 나한테 나쁘게  굴었어도 욕심 내긴 했을겁니다. 처남댁은 존나게 쌔끈하거든! 크흐흐"

-...그 그런...



노골적인 언사였지만 은영은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미 몸을 섞은 사이라서 그런건지 마음이 편해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처남댁 결혼하던 날, 재준이가 미친듯이 부러웠지요. 크흐... 처남댁처럼 겁나 예쁜 마누라랑 존나게 떡칠걸 생각하면! 흐흐... 정말 탐나긴 했으니까..."

-...원래 응큼하셨네요...킥



은영이 피식거리자 영길이 흐 하고 웃었다.



"그리고 처남댁. 솔직히 섹스 좋잖아요? 재준이랑 할 때는 몰랐던거 많이 알게 되지 않았어요? 씹물 질질 흘리면서 허리를 요로코롬 튕겨대는거 보면 그냥 어휴...흐흐"

-하, 하지 마요! 내가 무슨! 휴우...



영길이 우스꽝스럽게 몸짓하며 킬킬대자 은영이 크게 당황했다. 얼굴이 빨개져서는 영길에게 손을 휘저으며 제지하려 했다. 그러다가 무게중심을 잃고 영길의 품으로 넘어지는 것을 영길이 자연스레 받아주었다.

은영이 영길에 품에 안겨 올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아..."

영길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연인의 품에 안긴 것 같은 각도가 되자 은영이 얼굴을 붉혔다.


"시, 시매부..."

-...조금은 고민했는데, 역시 처남댁 따먹는건 포기 못 할  같어요 흐흐...


끝까지 자신에 몸을 탐하겠다는 영길의 말에 화를 내야 하건만, 그녀는 어쩐지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은영은 복잡한 감정에 말없이 그저 영길의 얼굴만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가요..."

-처남댁 많이 좋아하기도 했고, 어찌됐건...흐흐


좋아한다는 말에 왜 설레는 것인지, 은영의 눈이 살짝 떨림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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