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1부 꽃이 지는 밤 - 자존감 붕괴(2)
"매형, 어욱...매형... 다, 다 잘될..거에..요, 욱!..."
재준이 자꾸만 감겨오는 눈커풀을 애써 밀어올리면서 영길을 바라보았다. 오늘 따라 재준은 술에 약한 것 치고는 오래 버티고 있었다. 그것이 남자의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평소라면 인사불성이 되었을 주량을 한참 넘긴 상태에서도 정신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러나 저러나 술에 취하지 않는 약까지 챙겨서 먹은 영길 앞에서는 큰 차이는 없었다. 단지 버티는 시간이 차이가 날 뿐이었다. 영길이 인상을 찌푸렸다.
-흐흐, 오늘 따라 징하구만 재준이.
영길이 재준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노무 자식은 예나 지금이나 눈치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은영을 안지 못한지가 벌써 일주일째다. 계속 술을 마시면 충분히 은영을 귀여워해주기가 어려울지도 몰랐다.
"매형, 요즘....윽.... 은영..이가... 이상해요."
-으, 응? 흐흐 그게 무슨
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오는 재준의 말에 영길이 숨을 멈췄다.
"나...나를...윽....이 남편을!...바라보는 눈빛이...왠지 모르게...슬퍼요...."
-흐, 흐흐 그거 재준이가 잘못 본거 아녀? 흐흐
"그게, 그러니까...그러니까 매형! 은영이가...이상...해..."
근래 은영의 변화에 재준도 무언가를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평소대로라면 재준이 이런 속내를 영길에게-무언가 요상한 매형이라 조금은 거리를 두게 되는- 터놓을 리는 없었겠지만, 술은 생각을 여과없이 입밖으로 밀어낸다.
'니 좆이 실좆이라 그래 임뫄 흐흐...'
마침내 재준이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재준이, 이봐 재준이? 흐흐 더 마셔야지, 일어나 봐 재준이! 흐흐"
멍청하고, 어리석은 처남. 영길은 재준에게 어느 정도 고마움은 가지고 있었다. 비록 처인 연수가 잠자리에서 동생인 재준을 자주 씹어대기는 했지만-친동생임에도 묘한 열등감 같은걸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갈곳 없는 영길 내외와 연재를 받아주기는 했으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가족'으로서 일말의 죄책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배봉이 보내준 그 영상은 영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은영을, 돌린다. 철저하게.
"이보게 재준이, 집 가야하는데 뿅 가버리면 어떡하나 흐흐... 자네 와이프도 뿅 갈 예정인데 이거..흐흐"
영길이 정신 잃은 재준을 잃으켜 세워서는, 짐짝 끌고 가듯 재준을 이끌며 술집을 나섰다.
배봉의 가게에 도착하자, 문 앞에는 예전에 보았던 그 젊은 놈이 서성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차에서 내리려던 은영이 그를 보고는 사색이 되어 차에서 내리려 하지 않는 것을 배봉이 억지로 차에서 끌어냈다. 히죽 웃고 있는 배봉과 그 옆의 창피함에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쥔 그녀를 보자 젊은 놈이 인사를 건네왔다.
"아이고! 가게 비워두고 어딜 그렇게 다녀오시나 아저씨. 거기 옆에 아가씨는 또 보네? 킥킥"
-임마! 귀한 모델분이시다! 큭큭 말 조심혀라 흐하하
"어이고? 모델은 무슨 떡만 존나게 칠거 같은데, 아가씨 나랑도 하자! 진짜 저런 년을 어디서 구했대요? 하 능력도 좋네 씨바."
-마, 꺼져. 동수 넌 다음에 와라, 오늘은 바쁘다! 큭큭
"약속했죠? 나중에 이 년 꼭 나한테도 빌려줘야 해요?"
-시끄러! 큭큭 빨리 들어가자! 바쁘다 큭큭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지, 본인인 은영이 있는 앞에서 그녀는 아랑곳없이 물건 품평하듯 희롱당하고 있었다. 배봉이 수치심에 몸둘 바를 몰라 울상인 은영을 끌고 가게로 들어갔다.
"뭐에요 대체! 저 사람은 누구고 왜 나를 빌려주니 마니, 내가 물건이냐구요!"
흥분해서 따지는 은영을 무시하고 주섬주섬 골라놓은 옷을 챙기던 배봉이 그녀를 스윽 바라보았다.
"은영아. 오늘은 좀 당당하네?"
-...그러니까 제 말은..
"왜 고상한 척 굴어? 큭큭 이미 가랑이 벌릴 대로 벌리고 다닌 년이... 수 틀리면 알지? 귀여워 해줄 때 알아서 고분고분하게 굴어야지 큭큭..."
'어, 어떻게...'
은영이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자 배봉이 코웃음을 첬다.
"잔말 말고 이거나 입어봐."
-...
배봉이 은영의 품으로 옷가지를 몇 벌 던졌다. 엉겁결에 받아든 것을 확인한 은영의 볼이 붉어졌다.
'이런 걸..입고 사진을 찍어야 하는 거야?'
속옷이라고 던진 것은 브래지어와 팬티 한 쌍의 속옷이었다. 그런데 그 것은 속옷이라기보다는 잠자리에서 남자를 유혹하는 데만 최적화된 성인용 란제리.
브래지어를 보니, 와이어나 캡이 업는 천 재질의 홑겹 브라로, 그마저도 옆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윗가슴과 밑가슴도 거의 전부 드러낼 정도의 작은 크기였다. 게다가 젖꼭지가 닿을 부분은 두겹으로 가려지기는커녕 오히려 중심이 비어 있는 성긴 거미줄 문양으로 자수 처리되어, 마치 거미줄 가운데에 걸린 먹잇감마냥 유두와 유륜을 훤히 드려내며 강조하는 디자인이었다.
팬티는 일전에도 보았던 것과 비슷한 것으로, 구슬 너댓 개가 꿰여있는 얇은 끈 하나가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는, 그 외의 가림용 천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구슬팬티였다. 조금만 자세를 잘못 잡았다가는 은영의 계곡 사이로 파묻힐만한 아찔한 것으로, 팬티의 의미가 없었다.
은영이 안절부절 못하자 배봉이 인상을 썼다.
"줘남댁, 여기서 패션쇼할 수 있도록 내가 갈아 입혀줄까, 아니면 빨리 안에 들어가서 조용히 갈아 입을래."
-아, 알았어요...
은영이 쫓기듯 철문을 열고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진즉부터 스튜디오의 불이 켜져 있었다. 컴퓨터와 갖가지 촬영기구들, 샤워실, 그리고 침대까지. 그녀가 저 침대 위에서 눈물을 흩뿌리면서 배봉에게 능욕당한 지 채 24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그녀는 이 곳에 다시 와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떤 바닥을 보게 될까.'
은영은 다시금 밀려드는 슬픔에 눈가가 뜨거워졌지만 애써 참았다. 자신의 슬픔마저 즐기는 그들이었다. 특히 배봉 그 악마같은 남자는... 그녀가 이를 앙다물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쏴아아]
샤워실에 자주 들어오면서 은영이 알게 된 것들이 몇 가지 있다면, 배봉은 생각보다 청소를 자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은영이 샤워실을 자주 이용했지만 매번 깨끗하게 정리된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추레한 사람이... 의외다 싶었다.
오늘 은영이 주로 걱정하는 것은, 배봉보다도 영길이었다. 영길을 거부하고서 정작 배봉과 몸을 섞고 만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은영은 그것이 두려웠다. 자신을 이 바닥까지 끌어들인 원흉이면서 남자를 '제대로' 알게 한 사람이자, 매일매일 얼굴을 보아야만 하는 '가족'이었으니까.
영길만 아니었다면 배봉과 얽힐 일도 없었고, 학교에서 갖은 수모를 겪을 일도 없었다. 자신이 평생 그리워했고 또 소중하게 생각하던 '가족'이 정작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화근이 될 줄이야...
한편 재준이 걱정되기도 했다. 이제 30대가 가까워 오는 재준도 고된 직장일과 잦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몸이 조금씩 불어가고 있었다. 원래도 술을 못하고 싫어하던 재준인데 영길에 의해 최근 살인적인 수준으로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남편을 두고 딴 남자와 몸을 섞는 것도 모자라, 그 남편의 건강도 악화시키고 있는. 그러면서도 일상이 파괴될까 두려움에 떨다가 저들의 노리개가 된 자신이 남편을 걱정할 자격이 있는지, 이기적인 년은 아닌지 자책했다.
샤워를 마치고 수건걸이에 비치된 새 타올로 꼼꼼히 몸을 닦았다. 어차피 곧 더러워질 몸인데 이렇게 깨끗하게 닦아 뭐하냐 자조하면서도, 그녀가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거라고는 이런 것 밖에 없었으니까.
은영이 배봉이 입으라고 한 '속옷'들을 하나 하나 걸치기 시작했다. 워낙에 천쪼가리가 작고 비치는 소재이다보니 어디가 안감이고 겉감인지 헷갈릴 뿐 아니라 자신이 제대로 입고 있는 것인지도 헷갈렸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그녀가 속옷을 '제대로' 걸쳤다. 그리고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서는 살인적인 미모와 육감적인 몸매의 '창녀'가 은영을 마주보고 있었다.